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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526289
· 쪽수 : 296쪽
책 소개
목차
Ⅰ하늘
비약 ·9
봄의 순유 ·까마귀 울다 ·42
등뼈 ·56
사랑의 전설 ·71
둘레길 돌다 ·85
모년모월모일 ·99
Ⅱ 땅
무명씨의 책 ·115
시인의 은발 ·131
레 미제라블 ·144
시인과 덩굴손과 버려진 발 ·158
키다리와 작다리 ·172
헬스클럽 ·184
Ⅲ 사람
세 사람의 벤허 ·199
추자 ·212
방귀도사 ·225
고시생 ·239
적토마 ·253
별과 같이 살다 ·265
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언제부터였을까, 그날의 아픔과 두려움이 되살아난 것은. 청솔 아래 쓰러져 있던 장끼와 비탈밭 가에 잠들었던 형의 모습이 수시로 꿈속에 나타났다. 식은땀에 젖은 채 눈을 뜨면 다시는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기억의 촉수가 이렇게도 집요할 줄은 몰랐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겪은 모든 죽음의 원형이면서, 언젠가 나에게 닥칠 처음이자 마지막 죽음의 상징이었다. 불면증이 심해지면서 그 고통은 밤의 안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때, 문득 경주 친구가 생각났다. 그가 비약을 완성했는지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그는 한 알의 비약으로 모든 고통을 잠재울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어쩌면 기억의 고통도 그 범주에 들지 모른다. 나는 친구를 찾아 고도로 내려갔다. (「비약」 중에서)
햇살 속을 걸어가며 그는 생각했다. 멀쩡한 구두가 왜 버려졌을까? 몇 가지 유추를 해보다가 문득 구두 주인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그도 봄비 속을 걸어가 엽서를 띄워 본 사람일까? 그러다가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에는 누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입던 옷가지나 물건들을 태워 없앴다. 태우기 성가셔서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조금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 구두를 남긴 채 떠나고, 그 구두를 생전에 알지도 못한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하고 이어 신는다. 그것도 계절의 순환만큼이나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봄의 순유」 중에서)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이사가 마무리되고, 경비실 옆 빈 공터에 버리고 간 세간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사를 하면 꼭 저렇게들 남기고 갔다. 그 버림받은 세간들을 둘러보다가 이번에야말로 까무러치듯 놀라고 말았다. 소파와 침대, 옷장과 함께 버려져 있는 화장대 앞에 까마귀 한 마리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지상에 내려온 까마귀! 햇살이 비낀 환한 거울 속에 까만 새의 전신이 걸려 있었다. 땅 위에 내려앉은 까마귀는 날아다닐 때보다 엄청나게 커 보였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전율이 일었다. 그 순간, 온 아파트 단지가 한 마리 까마귀에게 점령당한 느낌이었다. 그 음험한 점령자를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단호하고 강인해 보였다.(「까마귀 울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