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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526548
· 쪽수 : 244쪽
· 출판일 : 2021-11-1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이사 간다
누구나 다 안다
돌아보지 마라
아무도 모른다
얼굴, 그리다
눈길을 걷는다
부산에 갔다
존엄 / 소년
해설
끝나지 않은 애도 / 장두영
저자소개
책속에서
냄비에 물이 몇 차례 끓어오르는 동안에도 여자는 국수 면을 집어넣지 못하고 뜨거운 물이 넘치면 자꾸 찬물을 붓는다. 찬물에 맥없이 주저앉은 냄비 속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서 있던 여자가 천천히 문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밤낮없이 퍼붓는 빗방울로 마당은 온통 물이다. 마당보다 낮은 문턱 위를 넘어 들어오는 빗물로 부엌 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여자의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물의 감촉이 서늘하다. 예약한 이삿짐 트럭은 오지 않고 장맛비는 쉼 없이 쏟아진다. 기상청 예보와 달리 하늘은 빗줄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이삿짐 트럭은 비를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 여자는 ‘어서, 이사 가야 하는데…’라는 문자만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빗속을 견디고 있다. (「이사 간다」 중에서)
여자는 아침부터 불안한 기운에 열차의 선로를 자꾸 들여다보았다.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선로는 금방 햇빛이 만든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 검붉은 색을 띠었다. 선로는 그 검붉은 색 사이로 은빛 잔주름을 아로새긴 채 움직임 없는 새파란 속살을 이따금 드러내곤 했다. 여자는 지난겨울 청년을 만난 이후로 부쩍 불안을 느끼는 날이 많아졌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이 결혼하자 떠밀듯이 억지로 이민을 내보낸 여자는 두 평 남짓한 지하철 가판대에 몸을 우벼 넣었다. 남편이 뛰어든 열차 선로가 빤히 보이는 가판대에 누에고치처럼 자리를 잡은 여자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선로를 만났다. 선로는 매일매일 여자를 미쳐버리게 할 만큼 기분 나쁘면서도, 마치 사형수의 목을 옥죄는 밧줄처럼 서서히 몸을 죄어왔다. 여자는 혼자서 저항하고 반항하지만, 공허하기만 한 아침들을 보내면서 두려웠지만,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의 시간을 견디며 여자는 점점 자신의 상처 속으로 침잠했다. 그사이 몰라보게 나이가 든 얼굴에 비치는 여자의 나이는 선로의 명암에 따라 기묘하게 변하고 달라지기도 했다. (「누구나 다 안다」 중에서)
오늘 오전 일을 시작할 때였다. 팔레트에 음료를 쌓고 있는데 맨 아래층 팔레트가 투입되면서 또 센서를 건드린 모양인지 자동기계 설비가 멈추었다. 동우는 늘 그랬듯이 고장 원인을 찾기 위해 기계 밑으로 들어갔다. 센스와 간지 투입 기계를 한참 살피는데 갑자기 멈추었던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그 위에 몸이 끼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숨이 막혀왔다. 순간 할머니를 떠올렸는가 싶었는데 자신의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고, 곧 피투성이 자신의 몸이 잠깐 보이는가 싶더니 할머니가 잠든 집에 와 있었다. (「돌아보지 마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