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526678
· 쪽수 : 236쪽
· 출판일 : 2022-03-15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시바여왕 / 9
푸른 가시 고래 / 39
왕가의 숲 / 73
진홍의 바다 / 105
마더 구피 / 141
승마장 가는 길 / 173
이스마엘의 비행 / 209
저자소개
책속에서
실상 나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말로 태어나 죽고 사라지지만 우리의 영은 죽지 않고 말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사람은 일생으로 끝이 나지만 우리는 최후 심판 날까지 존재할 것이다. 그녀의 달덩이 같은 둥근 뺨을 반쯤 가린 곱슬머리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온통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입술을 본 적이 없다. 대마장 안으로 들어올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멀리 돌아오기가 귀찮아 대충 울타리 사이로 허리를 굽히고 바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마장을 거의 돌아 동쪽 입구에서부터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왔다. 장갑을 낀 손에 작고 짧은 채찍을 들고 검은 승마부츠를 신고 있었다. 나는 수업 내내 그녀를 흘깃거리며 훔쳐보았다. 나답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교관은 그녀의 아름다운 엉덩이가 내 등에 닿기가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시바여왕」 중에서)
몇 개월 후, 나는 고래가 되었다. 무리 가운데 있는 존재 말이다. 낙오된 고래가 무리를 만나서 합류한 것처럼 말이다. 새벽 2시 30분. 핸드폰이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발이 시리다. 새우등을 만들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더욱 한기가 들었다. 잠시 후 숙소를 출발한 우리는 깊은 골짜기 입구에 섰다. 휑한 길. 길만이 인간들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우리들의 걸음과 재잘거림으로 새벽의 정적이 깨지고 있었다. 깃털과 같이 부드러운 메아리가 사그랑거리며 되돌아왔다. 골짜기는 옷깃 스치는 소리도 메아리로 되돌려 주었다. 너무나 생경스러웠다. 다른 차원의 공간이었다. 마치 우주 밖으로 튕겨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 위로 별들이 가루처럼, 이슬비처럼 총총 거꾸로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시나이산을 오르고 있었다. (「푸른 가시 고래」 중에서)
남자와 마주선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나의 다음 작품을 정했다.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장면이 소재가 될 것이다. 파랑색 치마를 입고 좌대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남자를 장난스레 내려다보고 있다. 터번을 두른 남자는 방구석에 앉아 공주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는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있다. 여인들이 곁에 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남자가 자신이 ‘아무도 아니라고’ 말하고 묻는다.
“그러는 당신은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프라랑이야, 나는 공주야!” (「왕가의 숲」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