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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526777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2-04-28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1장 일본행 밀항선에서 / 9
2장 재일조선인으로 11년 / 33
3장 공화국인민으로 35년 / 141
4장 탈북의 험로에서 / 189
5장 돌아온 고향에서 / 245
저자소개
책속에서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발동선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모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내가 발동선 밑창에 숨은 것이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면서였다. 배가 일단 출항을 했으니 내가 숨은 것이 발각되더라도 다시 회항이야 하겠느냐는 배짱까지 슬그머니 생기는 것이었다. 근래에 제주도 해안지대에 경찰의 단속망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일단 출항한 배가 선수를 돌려서 회항했다가 다시 출항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경찰의 감시망을 피한 것도 용한 일이었지만, 밀항선 선장의 눈에 띄지 않은 것은 더욱 용한 일이다 싶었다. 캄캄한 어둠을 틈타서 살짝 올라탈 때의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이다. 밀항선에 도둑 승선을 한 것은 갑자기 결행된 행동이었지만 그동안 한밤 중의 밀항선 출입 동정에 대하여 예의 주시하고 살펴두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밀항선이 많이 이용하는 화북 마을 곤을동 포구는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나에게 아주 친숙한 동네였다.
선장은 도착 즉시 배를 돌려서 제주도로 떠났고, 하선한 사람들을 앞장서서 인도한 사람은 김회천 씨였다. 배 안에서 쓰고 있던 오래된 맥고모자를 그는 아직도 쓰고 있었는데, 낯선 땅에 와서도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서 어떤 믿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도 물론 김회천 씨의 표정을 살피며 그의 뒤를 따라나설 참이었다. 김회천 씨나 다른 사람들이 들고 온 짐 보따리는 큼직했지만 내 보따리는 이들에 비해 반만큼도 되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살아갈 준비도 꼭 이만큼일 터이었다. 아직 어두운 밤길인데 어디로 가나 했더니, 잠시 후에 조그만 트럭이 우리 앞에 도착하였다. 운전수는 제주도 출신이라고 했는데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는 것으로 봐서 일본에 온 지 오래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김회천 씨는 미리 사전 준비가 잘된 듯이, 트럭에 탄 사람들을 네 번에 나누어서 내리도록 했다. 되도록 많은 인원이 함께 다니는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이 점을 주지시켰다. 8^15해방 후 한국으로 갔다가 난리를 피해 일본으로 다시 들어오는 사람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면 괜히 고생한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일부러 미명의 이른 아침 시간에 밀항선이 입항한 이유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 싶었다.
그 즈음에 장 사장과의 사상적인 대립에 맞서서 나 자신의 노선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켜 준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하반기에 실시된 일본정부의 외국인등록 갱신업무에 관련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종전 후 사회혼란기에 외국인들의 불법 출입국 사례가 많았던 것을 정리하여 확실한 외국인 등록자 명단을 만들었는데, 최근접 국가 코리아에서 온 사람들의 국적은 북반부의 조선과 남반부의 한국이라는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 같은 외국인등록 갱신을 신청한 코리안의 수는 대략 47만이었는데, 이들 신청자 중에 자기 국적을 ‘한국’이라고 써낸 사람은 겨우 14%인 반면에 ‘조선’이라고 써낸 사람은 무려 86%였다는 것이다. 코리안들이 지원하는 국적에서 드러나는 표면적인 차이만 보더라도 북한의 김일성 정권 지지자가 월등하게 많다는 것인데, 여기에다가 이들 재일동포 인구의 거의 전부가 남반부 출신자임을 고려하면 이들 집단의 순수한 사상 성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종전 직후에는 남반부 지지자들이 훨씬 더 많았던 상황이 불과 5년 동안에 뒤바뀐 것이다. 그들은 조상들의 출신지가 남반부라는 과거의 인연, 자기 인생의 뿌리까지 저버리고 낯선 땅 북반부의 공화국을 자기 조국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4^3사건과 같은 인민봉기에 대한 남한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정책과도 무관치 않은 현상이라 생각되었다. 북반부의 공화국을 자기 조국으로 생각하는 이 사람들이 6^25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만약에 이들이 총을 들고 이 전쟁에 나간다면 어느 쪽을 편들 것인지, 불문가지의 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