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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1697247
· 쪽수 : 364쪽
· 출판일 : 2023-06-15
책 소개
목차
004 여는 시
008 연보
1부 발자국 읽기
014 김종회
017 조동범
020 노희준
023 이승하
026 황유원
2부 다시 보는 시
032 대표시
045 교과서 수록시
057 외국어 번역시
3부 시 속의 삶과 언어
평론
074 투시적 상상력의 힘/이광호
080 불쌍한 몸, 불쌍한 마음/윤재웅
094 육체의 고행과 트임/최현식
109 확대경, 투시경, 내시경/임지연
129 서울에 온 말테/류신
144 어떤 난생(卵生)의 울음소리/나희덕
157 신생의 꿈과 언어/홍용희
대담
186 시인의 둘레길/노지영
4부 설렘, 후회, 잡생각
240 불구성의 유희
245 머리카락 자화상
253 왜 시를 쓰는가
257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
260 시 속에서 몰래 울기
5부 수다예찬
264 시
308 에세이
321 시 읽기
333 수다예찬 어록
저자소개
책속에서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둥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김기택)
껌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 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김기택)
그는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이렇게 세 권의 시집을 일구어내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사무원』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답답함’이 드디어 한 경지를 얻었다는 생각을 했다. 웅크릴 대로 웅크려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몸 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리는”(「바늘구멍 속의 폭풍」) 것처럼, 터지기 직전의 갈등과 억압의 동력을 내장해온 그의 언어들은 조금의 이완도 허락하지 않은 오늘에 이르렀다.
일찍부터 시적인 개성과 방법론을 확보한 때문인지 그의 시에 따라다니는 수사들은 크게 엇갈리지 않는다. 대립항들의 고요한 긴장(김훈), 틈의 시학(신철하), 소내(內)하는 힘(김진석), 인간학적 감각(황종연), 투시적 상상력을 통한 감각의 갱신(이광호), 해부학적 묘사(박혜경) 등은 그의 시 특유의 정신적 긴장과 감각적 상상력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들이다. “김기택의 시는 과학과 미술 사이에 있다”는 이희중의 말 또한 이런 특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필요에 따라 생태학적 방법과 해부학적 방법을 빌려온다는 점에서 과학과 유관하며, 세상에 실재하는 무엇을 옮겨내는 방법”의 요체가 묘사라는 점에서 그의 시가 미술의 기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희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