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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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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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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비누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1751888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4-08-15

책 소개

경남 창원에서 활동 중인 이우걸 시조시인의 시조선집 『비누』를 창연출판사에서 펴냈다. 시인이 직접 엄선하여 골라낸 75편의 시조가 실려 있고, 정미숙 문학평론가의 ‘이우걸, 감각의 현상학’이란 해설이 실려 있다.

목차

시인의 말•5

세계는 갑자기•13
물•14
지금은 누군가 와서•15
그대 보내려고•16
찬 이마 마주 뎁히면•17
남해 맑은 물은•18
빈 배에 앉아•20
발견•21
섬•22
낙화•23
봄비•24
단풍물•25
비•26
팽이•27
겨울 삽화•28
비누•29
길 •30
저녁 이미지•34
강•35
아가•37
눈•38
나사·2•39
모란•40
옛 집에 와서•41
나이테를 바라보며•42
강•43
아홉 시 뉴스를 보며•44
소금•45
해금시인 12인집을 읽으며•46
지상의 밤•47
방황•48
시계•49
거울·3•50
손•51
겨울 항구•52
비•53
새벽 2시의 시•54
과일•55
넥타이•56
도서관에서•57
책의 죽음•58
맹인•59
가계부•60
이름•61
피아노•62
서서 우는 비•63
산인역•64
신문•65
늪•66
모자•67
두포리 서신•68
사무실•69
꽃•70
부록•71
안경•72
링•73
흉터•74
치과에서•75
월평을 읽으며•76
코스모스•77
아직도 우리 주위엔 직선이 대세다•78
어머니•79
집•80
모자•82
국수처럼•83
어둠을 연주하는 두 개의 에스키스•84
묵언 시집•86
터미널 엘레지•87
구름•88
아침 식탁•89
카페 피렌체에서•90
영화관에서•91
북천역•92
서울역 엘레지•93
라면•94

해설
이우걸, 감각의 현상학
-정미숙 문학평론가•95

저자소개

이우걸 (지은이)    정보 더보기
경남 창녕출생. 1973년 『현대시학』 등단. 시조집 『저녁 이미지』, 『사전을 뒤적이며』,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이명』 외. 시조 비평집 『현대시조의 쟁점』, 『우수의 지평』, 『젊은 시조문학 개성 읽기』, 『풍경의 해석』.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정운시조문학상, 백수시조문학상, 유심시조작품상, 외솔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등 수상
펼치기

책속에서

이우걸, 감각의 현상학

정미숙 문학평론가

1. 전율하는 세계와 감각의 발기

시인 이우걸은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8남매 중에 7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시 전편에서 끈끈한 가족애는 자주 발견되나 개인사가 상세하지는 않다. 「자화상」에서 시인은 힘겨운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생애를 일별하고 있다. 시인의 자화상은 개인적이지 않다. 유난히 길고 고달팠던 시절의 기억이고, 모두 힘들고 가난했던 시대적 상흔을 확인하게 한다.

사변을 만나고, 기아에 허덕이고, 독재를 만나고, 시위에 휩싸이고
내 생이 스친 역들은
늘 그런 화염이었다
- 「자화상」 부분

「자화상」에서 이우걸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 시간을 ‘화염’이라 말한다. 화염(火焰)은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재앙이다. “사변을 만나고, 기아에 허덕이고, 독재를 만나고, 시위에 휩싸이고”에서 굴곡진 그의 시간은 우리 근현대사의 지난한 맥(脈)이다. 다행히 화염을 스치고 견뎌, 노시인으로 건재하나 여전히 충격과 허무,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하다. 독재 처단과 시민 혁명을 이끈 시대적 성과를 언급할 법도 하나 어느 시편에서도 그런 여유를 찾을 수 없다.

아버지
두꺼비집
헐렸다 눈 감으셨다
눈, 비와 광풍의
질정 없는 외압전류를
몸으로 막아주시던
아버지
잠이 드셨다

봉선화 꽃물 들고 수세미 청이 곱고
정아 퇴원하고 농협빚 갚아 가는데
망연히 전깃줄 위에
제비처럼
앉은
우리
- 「가족」 전문

「가족」에서 시인의 은밀한 내면을 알 수 있다. 우선, 「가족」의 시행 배치가 주목된다. 이러한 시행 배치는 그 자체로 의미이다. “아버지/두꺼비집/헐렸다 눈 감으셨다”를 그냥 슥 읽으면 마치 아버지께서 두꺼비 집을 손보시다 감전 사고로 돌아가신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다시, 읽으면 ‘두꺼비집’ 역할을 하신 ‘아버지’ 죽음의 충격을 단말마적으로 타전한 전보(電報) 닮은 비명임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곧 두꺼비집이다. ‘두꺼비집’은 무엇인가. 누전을 차단하고 전류, 단락(합선)을 차단하는 곳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곧 외압 전류를 막아줄 ‘두꺼비집’의 사라짐을 말한다. 두꺼비집의 헐림은 남은 가족들이 전율하는 외부세계에 함부로 노출될 수 있다는 경보(警報)이다. “제비처럼/앉은/우리”에서 어린 이우걸이 눈뜬 막막한 현실이 애달프다.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슬퍼할 여유도 잃었다. 압도적 상황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제비처럼 모여 앉은 채 망연할 뿐이다. “봉선화 꽃물 들고 수세미 청이 곱고/정아 퇴원하고 농협빚 갚아 가는” 순차적 진행은 아버지가 있어 가능했다. 아버지 부재는 전망 소멸이다. ‘아버지’를 바라보던 눈길은 길을 잃었다.
전율하는 감전(感電)의 세계에 던져진 그가 직면한 것은 ‘허기’이다. “내 하루의 노둣돌 같은 밥 한 그릇 여기 있다/내 한의 얼레줄 같은 밥 한 그릇 여기 있다.”(「밥」)에서 여전한 정서적 허기가 감지된다. 정서적 허기는 경제적 결핍과 관계적 결핍으로부터 발생한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살았으나 허기진 우리 삶과 타자들의 고통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전율하는 세상 속에서 허기의 감각은 발기한다. 발기된 감각은 개인적 삶의 고통과 시대/세대의 아픔이 중첩되는 지점에 기반한다. “내면의 허기를 메울/그런 집을 꿈꾸고 있다/새로 필 꽃들을 위한/ 말의 집을 꿈꾸고 있다”(「집」)에서 확인된다. 이우걸의 시작(詩作)은 허기의 정서를 타자와 공감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다.
여기서 감각은 일차적으로 ‘살아있는 몸‘을 말한다. 알듯이 ‘몸’은 의식과 정신활동의 담지체인 감각의 공간이다. 권력이 실현되는 곳이며 타자성과 그 대응 방식을 모색할 수 있는 장소다. ‘감각’(sensation)은 감각기관에 의존하며 감각기관을 통해서 오성에 전해지는 우리가 갖는 대부분의 관념들의 원천이다. 감각은 세상의 이해이자 우리를 세상에 열어주는 살아있는 중개자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이우걸의 시조를 ‘감각의 현상학’으로 읽어내고자 한다. 알듯이 현상학은 한 작가가 시간이나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 혹은 물질적 대상들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이다. 여타의 외재적 접근방법을 거부하고 작품 자체에 나타난 작가 의식의 양상만을 고구한다. 현상학이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반복되는 주제나 이미지의 패턴 과정에서 발견되는 정신의 심층 구조이다. 이에 필자가 사용하는 ‘감각의 현상학’은 이우걸 시조에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지각주체(subject)이자 지각대상(object)인 ‘감각’이 어떻게 지각되고 형성되는가 하는 방식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이우걸 시조의 타자 지향성의 의미를 규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감각의 활용과 타자성의 발견

이우걸은 감각적이다. 이우걸에 있어 ‘감각’이 주목되는 까닭은 감각적 수사(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등)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우걸이 활용하는 감각에는 모든 감각기관이 동원된다. 이는 흥미로운 발견이다. 먼저 ‘이마’ ‘눈’ ‘입/입술/이빨’ ‘손/손톱’ ‘귀’ ‘발/신발’로 세분화된 감각으로 활용되고, ‘영혼’, ‘영육’, ‘몸’ 등으로 확장, 통합되어 드러나기도 한다. 감각은 곧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연결된다. 감각과 감정은 그 자체가 실제적 운동(반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은 곧 몸으로 제재이자 주제로 뻗어간다. 이우걸은 섬세한 감각의 촉수를 동원하여 나와 너의 상호조응을 통하여 타자성을 발견하고 소통의 진정성에 이르고자 한다.


2-1. 이마-눈(빛) : 타자의 발견과 공감의 회로

정서 촉발과 동정(sympathy)의 중재는 뇌 영역 전두엽(이마엽)에서 걸러진다. 그런 까닭인가. 이우걸 시에서 ‘이마’는 시의 근원이자 번민, 판단의 처소로 드러난다. ‘이마’는 바라보는 자의 눈빛 혹은 시선에서 발견된다. 현상학적 시선은 대상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데 ‘타자’를 알고 이해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몸의 맹점(盲點), 존재자의 헤아릴 길 없는 신비, 과거의 깊이, 장래의 불확정성. 타인의 초월성과 같은 다양한 경험 분야에서 의식은 이 절대적 비가시성의 문턱에 부딪히게 된다. 현상학에서 지평(地平)은 이 모든 절대적인 비가시성의 문턱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다.

잠긴 문전에서 등 돌린 바람 속에서

무심히도 바라뵈던 이승의 문패 아래서
수 없이 나를 결별한 내 이마를 건지고 싶다
- 「어두운 창을 열고」 부분

「어두운 창을 열고」에서 시 창작을 향한 시인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시 창작은 ‘만경창파’속 ‘돛배’처럼 외로운 작업이나 멈출 수 없다. 시는 ‘잃어서 얻은 저 목숨’처럼 절대적인 대상인 까닭이다. ‘사멸의 눈길 안에도 연엽(軟葉)같은 운(韻)돋는’ 시어 탄생의 찰나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으나, 장담할 순 없다. “잠긴 문전” “등 돌린 바람” “이승의 문패 아래”에서 유산되거나 철회된 시의 잔해마저 다시 들추려는 시인의 집요한 사랑을 엿본다. “수 없이 나를 결별한 내 이마를 건지고 싶다”에서 ‘내 이마’는 내 것이나 내 것이 되지 못한 시를 향한 애련에 젖어있다.

진한 거역 씻어내고 찬 이마 마주 뎁히면
흔들수록 흔들릴수록 우리는 한 점 어등(魚燈)
죄 없는 영혼을 만나러 하늘 아래 놓였다
- 「찬 이마 마주 뎁히면」부분

아이러니하게도 ‘이마’는 얼굴의 가장 윗부분에 좌정하여 본인은 볼 수 없고 상대에게는 잘 보인다. 쉽게 보여 닿기에 더욱 조심스러운, ‘이마’는 좁힐 수 없는 실존의 거리이다. ‘찬 이마’는 ‘진한 거역’의 열기를 낮춘 지성의 온도를 품고 관용의 마음자리를 지향한다. “죄 없는 영혼을 만나러 하늘 아래 놓였다”에서 부족한 서로에 대한 인정과 “우리는 한 점 어등(魚燈)”에 불과하다는 낮고 절실한 고백으로 만나 찬 이마를 마주 뎁힌다. ‘이마’는 지성과 관용의 자리이다.
그래서 ‘이마’는 날이 서 있다. “눈을 뜨면 이마 위엔/언제나 돌이 있다/그늘을 지우기 위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돌」)”에서 명증한 사유를 위해 언제고 가다듬으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묘하게 넘긴 처세가 이마를 벗겨놓았다”(「잔나비」)처럼 약삭빠른 처세를 취하면 ‘이마’는 언제고 풍자의 대상으로 추락한다.

따스한 눈빛만이/가장 확실한 격려/굴곡 많은 네 이마의/
상처를 바라보다가/벨소리 나기도 전에/면회실을 빠져 나온다
- 「마산교도소-K에게」부분

「마산교도소-K에게」에서 ‘이마’와 ‘눈빛’의 조응은 사랑처럼 따스하고, 고백처럼 신중하다. ‘따스한 눈빛’이 ‘굴곡 많은 이마’를 향해 건넬 수 있는 것은 조심스런 ‘격려’이다. 변함없는 믿음과 마음을 전하는 동행이다. 화자의 진중한 배려는 “벨소리 나기도 전에/면회실을 빠져 나온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두 사람의 조용한 교감을 흔드는 ‘벨소리’는 무엇인가. 교도소 내의 질서와 규율을 드러내는, ‘너’를 수감자로 부르는 호출이 아닌가. 벨을 피한 화자는 눈빛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다.
이우걸 시에서 눈빛은 따스하고 섬섬하다. “그 섬섬한 눈빛이 닿아/고이어 맺힌 하늘” (「이슬」) “그 사람/눈빛처럼/말없이 따라와선 「남해 맑은 물은」”에서 알 수 있듯이 ‘눈빛’은 ‘이슬’로 ‘물’로 결정(結晶)된 위로의 전언으로 드러난다. 그러하기에, 비관여적인 ‘눈빛’은 오래 타자를 따를 수 없다. 거두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과정에서 흔들리고 어긋날 수 밖에 없다.

따뜻한 날개를 가진 종이배는 꿈의 나라
고운 살결 깎여버린 어두운 물 위에서도
남이는 정성을 다해 종이배를 띄워보낸다

아득히 먼 곳을 향해-
그리운 먼 곳을 향해-
내 눈빛이 부서져서 맴돌고 있을 때에도
남이는 물을 넘어선 한 마리 학을 본다
- 「종이배」 부분

이 시는 부자(父子) 동행의 시이다. 「종이배」는 서로 갈리는 ‘눈빛’의 향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부자는 냇가에서 종이배를 띄우고 있다. 이 아득하고 행복한 풍경은 멀리서 보면 영원할 듯하나 정작 그 지속의 시간은 길지 않다. 아들 ‘남이’에게 ‘종이배’는 꿈의 나라이나 아버지에게는 돌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정성을 다해 종이배를 다루는 ‘남이’의 눈빛은 그의 꿈을 담고 있다. “아득히 먼 곳을 향해-/그리운 먼 곳을 향해-”동경의 시선을 쏘아 올린다. ‘남이’가 “물을 넘어선 한 마리 학”을 볼 때 “내 눈빛”은 이미 부서져서 맴돌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객관적 사실의 인지인 지각의 영역을 넘어서는 심연을 드러내는 풍경이다. 아버지인 화자가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일종의 의식적 감각 행위(sentir)이다. 아들이 느끼고 믿는 체험의 시간을 완전히 의식하고 이해하는 상태이다. 이버지는 어린 아들의 꿈이 현실에서 위태롭고 이루기 힘든 꿈의 시간임을 안다. 그럼에도 아들 편에서 바라보는 원망(願望)을 겹치기도 했으리라. 바라보는 방향은 같으나 그 의미가 같을 수 없어, 시선은 갈리고 부숴진다.


2-2. 손/발 : 현실적 위치와 소외의 간극

‘손’과 ‘발’은 무엇보다 우리의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작동주로 개인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손’과 ‘발’은 각 개인이 처한 구체적 일상과 현실적 위치(계급성) 그리고 친소관계를 드러내는 데 기능한다. 이우걸 시조에서 ‘손’과 ‘발’은 구체성과 관념성을 담보하는 매개이다.
먼저 ‘손’의 경우, 「손·2」에서 시인은 ‘손’을 찬양한다. ‘손’은 ‘천사’이고 운명의 결단을 일임받은 자이며 ‘고향’이고 ‘언덕’이다. 「손·2」는 ‘손’의 돌봄과 행함을 통해 ‘손’의 기능성과 초월적 가능성을 강조한다. “그저 약속도 없이/잔은 만나려 한다/만나서 가꿀 수 있는 한 평의 뜰이 없어서” “어쩌면 손에 대한 향수 때문에/잔을 만나려 한다 만나서 불타려 한다”(「잔」)에서 손이 갖는 접촉의 반향은 강렬하다. 「잔」의 주체는 누구인가. 잔인가 잔을 들고 있는 자인가. 주체와 대상의 무화는 단순하지 않다. 잔이 손에 닿는, 잔에 닿는 손의 시간은 타진의 순간으로 마음에 한 평 뜰을 가꾸는 시간이다. 손길 혹은 접촉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심원한 진실이 뜨겁다.
‘손’은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영역에 스며들어 매우 심오하게 변주된다. “어릴 땐 크고 따스한 아메리카의 손”(「아메리카」)에서 ‘손’은 굴욕적 원조로 「비누」에서 ‘손’은 구체적 대상(‘비누’)을 철학적 승화(영혼의 거울)로 길어 올리는 매개로 작동한다. 아내의 “멍이 든 손끝”(「꽃」)은 정원 같은 가정을 가꾸기 위한 가혹한 희생, 헌신을 의미한다.

나사가 나사일 땐 나사인 줄 몰랐다
병든 자본의 가지 끝에 앉아서
마지막 조립을 위해 피 흘리던 손이여

무너진 계단 밑에서 잠이 든 너를 보며
으깨진 사체 속에서 일어서는 너를 보며
어둡고 아름다운 세상의
나사를 생각한다
- 「나사·2」 - 삼풍백화점 부분

「나사·2-삼풍백화점」에서 주목한 손은 노동자의 손이다. 「나사·2」는 ‘삼풍백화점’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시이다. 삼풍백화점 참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 부실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화자는 희생자를 “병든 자본의 가지 끝에 앉아서/마지막 조립을 위해 피 흘리던 손이여”로 호명한다. ‘나사’ 같은 존재인 ‘피 흘리던 손’ 노동자를 희생자로 내세운 것은 이례적이다. 노동자는 실질적인 권한은 없으나 그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도 어려운 애매한 존재인 까닭이다.
나사가 자리를 잃고 튀어나오면서, 노동자의 ‘피 흘리던 손’이 발견된 것은 진정 반가운 일이나, 후속 조치는 씁쓸하다. 사실상 폐기대상인 튀어나온 ‘나사’는 눈길을 오래 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화자 또한 지금 이곳의 탐색을 멈춘다. “어둡고 아름다운 세상의/나사를 생각한다”로 장을 넘긴다. 미래지향적이긴 하나 현실적 체념과 한계를 보인다. “으깨진 사체 속에서 일어서는 너를 보며” 가능한 상상은 반듯한 자본주의의 건립일까. 멈출 수 없는 발전에 대한 다짐일까. 소외된 노동자, 피해자에 대한 현실적 처우는 더디고, 유보되는 과정에 있는 것은 아닌가.

들일하다 돌아온 마음씨 착한 우리 형수님
무심코 본 손톱의 반달이 희미하다
무좀이 번져서 일까
외로움이 깊어서 일까.
- 「손톱」 부분

어디 익명의 노동자 삶에 그칠까. 힘겹고 고독한 삶은 모두 각자의 몫으로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다정한 화자인 시동생은, 깊이 숨어 보이지 않는 형수의 ‘손톱’을 볼 수 있다. ‘손톱의 희미한 반달’에서 질환인 ‘무좀’과 ‘외로움’을 읽어낸다. 마음만 건넬 뿐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반지」에서 연인에게 반지를 끼워 주며 “그 손에 내 마음 입힌 반지를 끼워 보네“ “우리 삶 푼 수 만한 황금 두 돈 반지”의 일성은 배타적인 손의 친밀성과 그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웅변한다.

‘발’은 우리를 어디에나 갈 수 있게 실어 나르는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발’은 ‘다리’ 혹은 ‘신발’로 달리 불리며 등장한다. 이우걸에게 ‘발’은 매우 각별하다. 영혼과 육체의 구분이 의미 없는, “묵묵히 한 생의 무게를/감당해 온/ 신뢰밖엔“(「발에게」)이라며 칭송하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정해져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발’의 거처는 공동체의 의미와 주체의 존재 감각을 환기한다.

이따금 엽서에다 누나는 소식을 쓴다
성한 그, 다리로는 밟지 못할 고향 땅에
어머니 추우실까 봐 털옷도 짜 보낸다
- 「우리 누나」 부분

아무나 이곳에 와서/신발을 벗지 못한다
영육의 문신을 온 몸에 나눠 새기며
꿈꾸는/사람들끼리만/백성이 되는/나라.
- 「방·1」 전문

「우리 누나」 「방·1」 두 편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발’은 자유롭지 못하다. 무슨 까닭일까. 「우리 누나」의 ‘우리 누나’는 성한 다리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다고 한다. 고향은 누나에게 닫힌 공간이다. 이는 누나의 선택이기보다는 암묵적인 고향의 배제 논리를 내면화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무슨 사연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누나의 사적이고 수치스러운 일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짐작될 뿐이다.
고향은 이중적이다. 보통의 경우 고향은 ‘장소’(place)로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중심이다. 그러나 ‘우리 누나’에게 ‘고향’은 간섭과 사시적 시선을 견뎌야 하는 곳일 뿐이다. 누나는 개방과 자유의 공간(space)을 찾아 떠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노출되고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은 채 개인사에 예외를 두지 않은 고향에서는 실존적 외부성만 확인할 뿐이다.
「방·1」의 논리는 더욱 폐쇄적이다. ‘영육의 문신’을 ‘온 몸’에 나눠 새기며 (같은)꿈을 꿈는 사람들끼리 ‘백성’만이 들 수 있는 공간이 ‘방’이다. 이 좁디좁은 논리를 가진 ‘방’에 머물 수 있는 사람만이 ‘백성’이니, 방이 곧 나라이다. ‘아무나’는 ‘신발’을 벗지 못하니 감히 근처에 얼씬할 이유가 없다. 금지와 배제, 선택적 허용의 공간이 ‘고향’이고 ‘방\1’이다.
그런데 금지와 배제의 공간은 ‘고향’과 ‘방1’에만 그치지 않는다. 넘나들 수 없는 공간은 우리 마음이 만드는 거리이기도 하다. 기다려도 발길 닿지 않는 공간이 고향이기도 하고 한 방에 누운 식구라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을 긋는 공간이 집이다. 고향에 “섬처럼” 농사일하는(「형님」) 형님과 ‘자궁암’을 앓으며 ‘폐선’처럼 그늘져 있는 형수님이 계신다. 왕래가 잦았다면 이토록 쓸쓸하지도, 병의 치료 시기를 놓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몇 번을 건설하고 또 몇 번을 파괴해 온
산마루 꼭대기에는 바람뿐인 집이 한 채
절망과 희망이 누워
서로 다른
꿈을 이룬다.
- 「식구」

「식구」를 보면 「방·1」이 품은 폐쇄적 동일시 논리가 순진하고 눈물겹게 느껴질 정도이다. 「식구」에서 산마루 꼭대기에 지어진 한 채 뿐인 집은 바람 소리만 들린다. 산마루 꼭대기 집을 찾는 이가 누가 있을까. 오고 가는 이가 없는 이 집의 외로움은 식구들에게서 더욱 짙다. “절망과 희망이 누워/서로 다른/꿈을 이룬다”는 무엇인가. 식구들은 서로 다르다. 한 집에 있으나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서로 다른 꿈을 이루기에(이루기 위해) 꿈을 공유할 수 없는 듯 하다. 그들은 서로의 공간에 갇혀 왕래가 없다. 식구도 없고 집도 보이지 않는다.


2-3. 입과 귀 : 자기 성찰과 감각의 갱신

무엇보다 ‘입’(/입술)과 ‘귀’는 성찰의 장으로 드러난다. 말하고 듣고, 듣고 말하는 감각기관인 입과 귀는 긴밀하게 연결되는 수신, 소통체계인 까닭일까 서로의 진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입과 귀는 생생한 고통을 토로한다.
먼저 「입술」은 복잡한 표정 속 다양한 의미로 읽힌다. 먹고 마시고 말하는 감각처인 ‘입’은 성애적 공간이자 욕망의 근원이고, 죄를 짓고 반성하는 언어의 도가니이다.
유채 꽃밭에선 나비들이 놀고 있다.
뜬 가슴처럼 부산한 흰 구름의 나들이
그대의 작은 입술이
물기에 젖고 있다
- 「입술·2」 전문

너를 키우는 건 불굴의 남근일까
수초 우거진 긴 밤의 덩굴사이로
굶주린 사내들은 와서
홍등을 물어뜯는다
- 「항구」 부분

사뭇 대조적인 위 두 편의 시는 입술이 처한 유동적 자세를 역설한다. 「입술·2」는 낭만적 연애의 폭주하는 기쁨을 담고 있다. 「항구」는 매춘의 배설적 성애를 다룬다. 「입술·2」에서 노오란 ‘유채 꽃밭’을 봄 풍경으로 하여 유희와 환희의 몸짓이 펼쳐진다. 나비의 가슴은 뜬구름처럼 가볍고 날개 짓은 한없이 부드러울 것이다. 나비의 목표는 ‘그대’ ‘작은 입술’의 반응을 향한다. 물기에 젖어 드는 작은 입술은 익어가는 봄처럼 몽환적이다.
반면 「항구」는 어떤가. ‘항구’는 본능의 배설적 공간이다. ‘남근’을 가진 ‘굶주린 사내’들이 우거진 수초 덩굴을 헤치고 ‘홍등’을 물어뜯는다. 수초(水草)는 여성 성기의 외피적 모양새임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들이 물어뜯는 것이 여인의 성이 아니라 홍등이라는 표현은 기이하다. ‘홍등’은 매매춘의 유흥가와 인격성과 관계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파괴적이고 파편적(破片的)인 섹슈얼리티를 말한다. 환멸을 남길 뿐이다.
「겨울 항구」는 “어둠의 사슬에 묶여 포구에 갇힌 선박들”이 머무는 황량한 현실로 ‘오리무중의 내일’을 닮았다. 주변의 ‘여인숙 하수구’는 ‘병든 낭만’을 방류하고 있다. 이러한 대비적 현상을 통해 시인이 지향하는 것은 치열한 관계욕망이다.

그리움의 살결이 짐승처럼 만나서
피 흘리며 짜내는 직조물 같은 파도여
밤마다 네 소리 때문에/달이 하나 뜨곤 한다
- 「사랑 노래」 부분

이우걸에게 ‘사랑’이란 진정한 영육의 결합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뜨겁고 새로운 감각의 장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움의 살결”이 전제되어야 한다. 서로에 대한 갈망이 ‘짐승’처럼 만날 때, ‘피 흘리며 짜내는 직조물’같은 파도를 부를 수 있다. ‘파도-소리-달’의 이음은 몽환적 인 충만함이다.
이토록 직접적이고 예민한 관계의 감각기관인 입(입술)을 향한 이우걸의 삼가와 근심은 깊다. 무엇보다 ‘입’이 자신에게는 성실을, 타자에게는 진정을 담보하는 도구로 한정되길 원한다. “마른 낮달처럼/너를 피리 불어 이 세상을 속인 죄로/숨겨둔 퍼어런 멍울만/한밤에 아려온다.”(「입술·1」)에서 보듯이 입술은 ‘마른 낮달’의 창백한 기만으로 언제든 죄를 범할 수 있다. ‘입’은 진정한 관계, 증언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무책임한 침묵도 비판의 대상이다. ‘달콤한 침묵’은 쉽게 취하여 빠져 들 수 있는 ‘뱃놀이 같은 마약’(「입술·3」)이라고 경계한다. “천근의 무게를 빙자해/내가 채우는 쇠통 하나”(「입술·6」)에서 나서지 못하는 비겁함을 꾸짖고 있다. 입술은 진정성을 위한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다. 그래서 입술은 이마 위 돌처럼 언제고 고해성사를 마련한다. “젖은 담요를 깔고 잠은 지금 누워 있다/오늘밤 그가 맞이할 영혼의 고해성사/아파트 베란다에 걸린/빨래들이 푸석거린다”(「입술·3」)는 불면의 밤처럼 진지하다. 「자정에 이닦기」에서 시인은 “상대편을 헤치고 비게덩일 무찌르는/내 수성(獸性)의 입안을 깨끗이 씻기 위해/밤마다 나는 이빨을 닦아야 하는 걸까”라며 하루를 마감하고 내일을 다짐하는 시간에 ‘수성’을 씻어낼 이빨을 살핀다. 진정한 관계 맺기를 위한 자기 수신(修身), 성찰의 시간이 치열하다.


시인은 이명의 고통, ‘귀울음’의 대속(代贖)을 통해 감각을 갱신하고자 한다. “설은 밥알 같은, 떫은 풋감 같은/그런 과거사를 귀는 알고 있다/그것이 울음이 되어/스스로를 닫으려 한다”(「이명·3」)에서 ‘이명’을 고백한다. 이명은 ‘설은 밥알’ ‘떫은 풋감’ 같은 말을 제대로 듣지도, 해독하지도 못한 까닭에 이것이 ‘귀울음’으로 퍼지며 문을 막은 것이다. 과거사이나, ‘이명’은 멈추지 않는다. 여러 편의 시에서 ‘귀’ ‘귀울음’ ‘이명’으로 등장하고 화자는 고통을 호소하며 뒤척인다.
‘이명’이 깊을수록 들음의 방향은 선명해진다. 다행으로 처방도 얻었다. “마음이 길을 잃어서/오래전에 병든 귀”(「귀」)에서 ‘귀울음’의 증상과 대안이 간파된다. ‘이명’은 자연의 비경, 생의 진경을 알고 싶어 뒤척이던 지난 열망을 되찾으라는 타전이었다.

생의 언덕바지엔 목 쉰 파도가 산다
파도는 사연 많은 생채기의 울음들이다
그 소리 다 읽고 싶어
귀는 늘 잠이 없었다
- 「이명·2」

「이명·2」에서 ‘귀’는 ‘생채기의 울음들’을 다 읽고 싶어 잠들 수 없다. 화자가 앓고 있는 신열은 듣고 싶은 것을 잘 들을 수 없어 애타는 몸부림이다. 귀울음은 바르게 듣고, 뜨겁게 느끼고자 하는 의지이다. 다시 말하면 경청(傾聽)의 의지 표방이다. 경청은 진실된 바의 주체화로 이해되는 고행적 실천이다. 경청은 개인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을 확인하게 해주고 진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럴 때 귀(청각)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정념적이고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이성(logos)을 더 잘 받아들이는 감각이라는 사실을 새길 필요가 있다.

들으려 하지 않는 귀,
들을 수도 없는 귀,
이미 편 갈린 귀,
서로 닫아 버린 귀,
마음이 길을 잃어서
오래 전에 병든 귀
- 「귀」

제대로 듣고 말한다는 ‘이명’의 주제 의식과 그대로 연결된다. 나의 체험과 감각을 통하여 세상이 들어오고 해석되는 것이 아닌가. 시인의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감각기관이다. 하나의 귀이거나 눈이고, 뇌이다. 한통속인 몸의 오류를 넘는 방법은 욕망의 주체인 나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갱신 의지의 지속이다.


3. 감각 너머, 이해와 소통의 지평

이우걸은 생생한 감각을 활용하여 타자의 이해와 세상의 해석에 이르고자 하였으나 몸이 분리되어 있듯이 나뉜 간극을 메우기는 어려웠다. 이에 이우걸은 가시태적인 감각 너머 비가시태의 영역인 내면의 감각 시학을 도모한다. 이는 보이고 보여지는 존재의 한계, 이해 불가능성의 협로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다. 현상학은 현전에 대한 사유가 아니며 부재에 대한 사유도 아니다. 현상학은 충만하고 완전한 현전도 아니고 순수한 부재도 아니며 항상 ‘은연한 현시’이자 ‘비-현시’인 지평구조에 대한 사유이다. 현상학은 드러냄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감추어진 의미를 의미작용과 목적이라는 이중의 방향성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맹인」과 「봄」 그리고 「숙제」에 활용된 읽기, 듣기, 그리기의 방식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듯 하다.


맹인은 사물을 손으로 읽는다
손은 그가 지닌 세계의 창이다
마음이 길을 잃으면
쓸쓸한 오독(誤讀)도 있는….

눈 뜬 우리는
또 얼마나 맹인인가
보고도 만지고도
읽지 못한 세상을
빈 하늘 뜬구름인양
하염없이 바라본다.
- 「맹인」 전문

「맹인」의 ‘맹인’은 치명적인 사람이다. 시력을 잃었으니 감각의 절반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라보는 눈빛을 느낄 수 없어 자신을 깊이 알 수도 없다. 맹인이 지문(指紋)을 통해 읽는 것은 세상이 허락한 최소한의 지문(地文)이다. ‘맹인’이 ‘손’의 감각으로 빛을 끌어내는 애타는 한 길 여정도 ‘마음’이 결정한다는 사실은 큰 울림을 준다. ‘맹인’의 목숨줄 같은 한 길 여정도 마음이 길을 잃으면 오독이 따른다는 진실은 눈뜬 우리가 새겨야 할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어둠의 세계에서 맹인은 자신의 손끝에서 심오한 빛을 찾는다. 맹인은 마음을 세워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맹인일 수 없다.
「맹인」은 읽을수록 눈이 밝아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시이다. 우리가 알고 보는 것이 진실이 아니고 진리가 아님을 이토록 명쾌하게 짚을 수가 있을까. “눈 뜬 우리는/또 얼마나 맹인인가/보고도 만지고도/읽지 못한 세상을/빈 하늘 뜬구름인양/하염없이 바라본다”는 날카로운 풍자이다. 맹인이 아닌 우리는, 보고 만진 세상을 전부라고 믿는 진정한 맹인이다. 마음의 빛에 닿지 못한 까닭일까. 통탄할 일은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자기 갱신의 감각을 통한 전환적 사유만이 전반에 깔린 관계의 타자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수피(樹皮)속엔 어둠을 쫓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그것들이 상처에 닿으면
죽창 같은 잎을 내민다
어혈진 가슴을 푸는
이 화해의 영토 위에서.
- 「봄」 전문

「봄」은 처절한 모순으로 우리를 겨눈다. ‘봄’을 보는 화자의 시선도 분열적이고 ‘그것들’의 기세는 전투적이다. 화자는 ‘수피 속’을 보고 ‘어둠을 쫓는 물소리‘를 듣고 있다. 어둠을 뚫고 생명이 펼치는 전쟁의 함성을 듣는다. 화자의 혜안이다. 봄의 생명과 화해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죽창(竹槍)은 물릴 수 없는 생명의 권리 장전(章典/裝塡)이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죽창 같은 잎’을 내민 봄을 보며 저항과 순응의 생명에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화자는 우매를 가장한 느긋한 시선 대비로 현상 너머, 진정한 여정을 제시한다.
「맹인」과 「봄」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심원한 생명의 감각 지대가 약동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함부로 엿볼 수도 넘볼 수도 없다는 생명, 타자의 세계에 대한 경외감은 지금 이곳의 자세를 교정하게 한다.

바닥난 우물 깊숙이 두레박을 드리우듯
아버지의 발을 그린다
조심조심 그린다
세상의 짐이 무거워 잠에 빠진 그 발을……

한 번도 다정스레 안아준 적 없었지만
한 번도 다정스레 불러준 적 없었지만
새벽에 불을 켜놓고
아이는 발을 그린다
- 「숙제」 전문

마침내, 이우걸은 전율하는 세계에 내몰리며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아버지’를 끌어올리려 한다. “바닥난 우물 깊숙이 두레박을 드리우듯/아버지의 발을 그린다”에서 읽을 수 있듯이 이제 ‘아버지’는 우리들의 든든한 ‘두꺼비집’이 아니다. 그저 깊숙한 ‘심연’일 뿐이다. 왜 시인은 ‘아버지의 발’을 그리려 하는가. ‘바닥난 우물’ ‘깊숙이’ ‘두레박을 드리우듯‘은 두렵고 막막한 시간을 말한다. 우물에 닿는 더딘 시간과 닿을 수 있을지조차 막막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발’은 이우걸이 영육의 구분 없이 신뢰를 갖는,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허물없이 여기는 곳이다.
「숙제」의 ‘아이’는 아이와 어른의 구별을 지났다. 아버지의 발을 ’세상의 짐이 무거워 잠에 빠진 그 발을‘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아버지의 시간을 사는 성장한 시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깊이를 알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한 번도 다정스레 안아준 적 없었지만/한 번도 다정스레 불러준 적 없었지만”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절망 사이에서 분열하는 시인은 여전히 내면 아이의 시간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의 발을 정확히 그리기 위해서는 각인된 아버지상을 지우고 다시, 그려야 한다. 그래서, 원망과 갈망의 그늘을 걷으며 “새벽에 불을 켜놓고/아이는 발을 그린다”는 깊은 울림을 갖는다. 언제나 무의식의 그늘에 숨어 있던 아버지 혹은 아버지라는 상처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린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직시이고 아버지에 대한 이해이고 도달이다. 마침내, 긴 두려움의 시간을 지나 화자는 ‘아버지’의 타자성에 이르는 시적 직관에 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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