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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1859133
· 쪽수 : 192쪽
책 소개
목차
1부 배고픔과 꿈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 13
배고픔과 꿈 16
산다는 이 일 20
시를 뭐하러 쓰냐고? 24
도덕 하는 사람들 28
성년成年으로 가는 여행 35
맹희 혹은 다른 눈眼 39
죽음에 대하여 47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56
가수와 시인 61
머물렀던 자리들 66
2부 헤매는 꿈
나의 유신론자 시절 75
호칭에 관하여 79
헤매는 꿈 83
둥글게 무르익은 생명 88
짧은 생각들 92
한 해의 끝에서 97
비어서 빛나는 자리 100
유년기의 고독 연습 103
없는 숲 109
양철북 유감 113
3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폭력을 넘어서 119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124
1980년대의 시에 관하여 130
‘가위눌림’에 대한 시적 저항 135
4부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여자가 여자에게 145
일중이 아저씨 생각 150
새에 대한 환상 154
H에게-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159
최근의 한 10여 년 172
신비주의적 꿈들 176
시인의 말 183
개정판 시인의 말 187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러나 나는 이제 이 자리를 뜨고 싶다. 눈길을 돌리고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어서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펴고서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가고 싶다. 움직이고 싶다. 다른 많은 것을 보고 싶다. 내가 아닌 다른 아름다운 것들을. 썩은 웅덩이로부터 눈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저 들판과 길에 나도는 수많은 아름다운 것이 내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어느 순간 나는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나 걷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순간을 꿈꾸고 있다. 내가 첫발을 떼어놓는 그 순간을.
그러니까, 언제나 내 꿈을 짓밟아오기만 한 인생아, 마지막으로 한판만 재미있게 잘 풀려줄래? 그러면 그다음에 내가 고이 죽어줄게. 꽃처럼 피어나는 모가지는 아니지만, 고이 꺾어 네 발밑에 바칠게. 이번에도 네가 잘 풀려주지 않으면 도중에 내가 먼저 깽판 쳐버릴 거야. 신발짝을 벗어서 네 면상을 딱 때려줄 거야. 그리고 절대로 고이 죽어주지 않을 거야.
_ 「시를 뭐하러 쓰냐고?」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끝과 시작처럼 떠난다는 것과 되돌아온다는 것은 하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무수히 떠나고 무수히 되돌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그것도 대부분 괴로움과 불행의 시간을 바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어쩌면, 행복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행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는, 조금은 쓴, 그러나 넉넉한 인식뿐일는지도 모른다. (……) 인간은 강하되, 그러나 그 삶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아주 떠나지는 못한 채, 그러나 수시로 떠나 수시로 되돌아오는 것일진대,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한번 물으면 어느새 비가 내리고,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두 번 물으면 어느새 눈이 내리고, 그사이로 빠르게 혹은 느릿느릿 캘린더가 한 장씩 넘어가버리고, 그 지나간 괴로움의 혹은 무기력의 세월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 띄워놓고 보면, 사랑인가, 작은 회한들인가, 벌써 잎 다 떨어진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한 해가 이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나 그 헐벗음 속에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할 차례일지도 모른다.
_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시에 대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믿음과 환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하더라도, 그러나 최소한 데뷔 시기를 전후하여 시를 쓰고 싶다는 열정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갖고 있었던 한 시인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시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없고, 시를 쓰고 나면 다시 읽어보기도 싫고, 시를 쓰고 나서도 마뜩지가 않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뭔가 미진하고 뭔가 아쉬워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인, 메마른 불모의 시인. 그런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할 가치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는 비난의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듯도 하다. 그런데도 시를 쓰는 한 나는 시인인 것일까? 어쩌면 내 시를 읽는 독자들 중에서, “무슨 시가 이래? 맛있는 살코기는 하나도 달려 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뼈다귀만 남았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영양분이 담뿍 들어 있는 맛있는 살코기를 제공하지 못하는 시인.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불모의 딱딱한 뼈다귀만을 내놓는 시인(혹시나 그 뼈다귀를 푹푹 고아 맛있는 국물이라도 우러나온다면. 제발 그럴 수라도 있다면).
_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