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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속도의 이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374345
· 쪽수 : 160쪽
· 출판일 : 2023-12-15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374345
· 쪽수 : 160쪽
· 출판일 : 2023-12-15
책 소개
시와편견 기획시리즈 9권 김승 시집. 김승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두 개의 축이 시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구에 찾아올지 모를 생물학적 종언을 염두에 둔 시인 자신의 심경, 그리고 동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약자의 삶에 대한 관심이다.
[시집해설]
시로 쓴 혈서, 길 끝에서 불사르는 노을빛 시혼
_김 승 시인의 시집을 읽다
복효근(시인)
1.
김승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두 개의 축이 시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구에 찾아올지 모를 생물학적 종언을 염두에 둔 시인 자신의 심경, 그리고 동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약자의 삶에 대한 관심이다. 문학은 자신의 삶과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길을 열어가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은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타파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비판적이며 참여적인 기능을 가진다.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시인이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물학적 종언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치명적 병마와 싸우면서(뒤에 살펴보겠지만 시인의 경우 ‘싸운다’는 이 상투적인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온 생을 바쳐 쓴 시편들인 것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언젠가 그 끝을 맞이하게 운명지어져 있다. 고등지각력을 가진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자신에게 닥쳐올 이 운명적 미래의 부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서 두려움을 넘어서고 어떻게 종언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 고뇌하고 탐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시인의 삶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집약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한 자신의 고통 속에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아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포함시켜 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김승 시인에게 사회적 관심, 특히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지속적인 시적 주제를 이루고 있었다. 시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또 하나의 축이었던 것이다. 시인의 경우, 그리고 이번 시집의 경우 문학의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편의상 나누어 살펴보겠지만 기실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시인의 시혼을 떠받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십 층 펜트하우스
꼬물거리는 자동차와
저녁놀을 내려다본다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는 공포
날아오르고 싶었던 만큼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
무너지지 않는 아파트의 신화 위에
맞지 않은 헐거운 옷
몸을 키워도
줄여도 맞출 수 없는
찢어버리고 싶은 날개
언제부터 나를 믿지 못하는 계절이 시작되었는지
만국기가 휘날리던 국민학교
담장 밑에 차려진 막걸리집
뿌연 먼지와 화약 냄새가 뒤섞인
가을 하늘
나머지들에게 주던 노트 한 권의 좌절과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선녀들 이야기만 반짝거렸고
무성하게 흔들리던 나뭇잎 아래
다리가 짧은 아이는
늦가을 매미처럼 울기만 했지
콩밭 끝에 묻힌 엄마는
호미질만 하고 있는지
돌아올 생각도 않는데
속살을 파고든 개미처럼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가려움
거머리가 머리까지 올라가
죽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당집의 요령처럼 흔들리는 저녁
갑자기 속이 메스껍다
「구토」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대비적으로 그려진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다리가 짧은 화자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에서 등수에 들지 못했다. 화자는 ‘나머지들’로 분류되어 노트 한 권을 받아들고 늦가을 매미처럼 처량하게 울었던 절망을 회상한다. 가난한 엄마는 밭에서 돌아올 줄 모르고 기괴하고 무섭기 그지없는 어른들의 이야기만 떠오른다. 가난과 소외를 일찍이 경험한 화자는 어느새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으로” “무너지지 않는 아파트 신화”를 따라 40층 펜트하우스 고급 아파트에서 살며 아래를 내려다 본다. 부를 이루었으나 만족감이나 행복이 아니라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는 공포”를 느낀다. “몸을 키워도/줄여도 맞출 수 없는” “맞지 않은 헐거운 옷”, 날개를 찢어버리고만 싶다.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면서 “언제부터 나를 믿지 못하는 계절이 시작되었는지” 화자는 묻고 있다. 그리고 속이 메스껍다. 구토증을 느낀다.
여기서 구토는 생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으로 인간이 사물의 본래적인 모습을 마주할 때 느끼는 생경하고 부조리한 감정이다. 싸르크르의 「구토」에서 로깡땡은 조약돌을 집어 든 순간,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조약돌은 물수제비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우연적' 존재로서 해변에 놓여 있을 뿐이고, 그가 이제까지 '물수제비'라는 본질에 의해 실존한다고 생각했던 조약돌이 사실 인간이 정해놓은 이념적 틀과 가치체계에 갇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너무도 익숙해서 거기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 문득 존재감을 드러낼 때 다가오는 낯선 느낌, 또는 사람들이 정한 규칙과 습관의 지배하에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어색해지는 느낌. 사르트르는 이처럼 존재 자체가 전적으로 우연성에 따르며 필연성을 상실했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현실의 메스꺼움을 '구토'라고 하였다.
싸르트르의 「구토」에서 로깡땡이 겪는 구토의 의미와 온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화자도 로깡땡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리가 짧아 등수에 끼지 못하고 매미처럼 울던 자아와 펜트하우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아의 존재론적 괴리, 모순된 욕망 앞에서 어떤 것이 진짜 자아인지 실존적인 고뇌를 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를 매순간, 문득문득 경험한다. 그러니까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인의 삶과 그가 속한 사회의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고뇌의 기록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2
아직 살아있나 죽음이 아침마다 묻습니다
생은 죽어가는 기분이 어때하고 저녁에 인사합니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별처럼
몸을 두고 벌이는 전쟁
말을 버리기로 합니다
의미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생각을 지우기로 합니다
먼지와 먼지 사이로
물을 나르는 일이 삶의 전부입니다
입안에 들어가는 건 먹을 것이 아닙니다
신을 죽인 대가로 치르는 고통의 재생산
두 겹에서 네 겹으로 늘어나는 채찍에
피 흘리는 몸이 점점 가벼워짐을 느끼는
지금은 정오입니다
「토리노의 말」
니체가 45세 때에 급속히 몸이 쇠약해져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그는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토리노의 말」은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이 일화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 광장. 프리드리히 니체는 카를로 알베르토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다. 그 토리노 광장에서 늙은 말이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한다. 보다 못한 니체가 달려가서 늙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운다. 말 대신 채찍을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라며 울다가, 미쳐버린다. 이웃에 의해 집으로 옮겨진 니체는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웅얼거린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는 식물인간에 가까운 삶을 10년간 살다가 56세에 세상을 떠난다. (다음 백과에서 발췌)
시인의 생애는 니체의 그것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치명적인 병마로 투병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죽음과 생이 육체를 두고 번갈아 묻는 질문에 화자는 “말을 버리기로 합니다/ 의미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생각을 지우기로 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화자는 “두 겹에서 네 겹으로 늘어나는 채찍에/ 피 흘리는 몸이 점점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 고통은 “신을 죽인 대가”라고 자인한다. 말을 버리고 의미를 포기하고 생각과 결별한 결과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하듯이 죽음을 섭리로서 수긍하고 수용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몸은 구 회 말 투아웃 노 주자/ 아직 방망이를 놓을 수 없는 나/ 더그아웃에서 소리쳐 응원하는데/ 무성영화처럼 들리지 않는다// 패색이 짙은 병실이지만/ 홈런 한방에 희망을 걸고/ 비급여 고액 치료제를/ 장모님과 의논하는 아내/ 잠든 척 돌아누운 채 숨을 멈춘다.”(「구 회 말」) 홈런 한 방에 마지막 명운을 건 것처럼 비급여 고액 치료제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는 가족의 고통 또한 화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절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녀 중 하나가 “밤마다 자면서도 아프다고” 호소한다. 해 뜨면 엄마는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야만 한다. 구두를 신고 거리를 활보하는 꿈을 꾸며 구두를 사 모으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극한의 병고를 치르고 있는 자신만큼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걸로 보인다. 한편 화자는 책을 사 모은다. 책은 외면의 한 방법이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도피처를 마련해보는 것이다. “쓰러진 꿈을 세우는 데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책”을 무덤 삼으려는 것이다.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이와 엄마에게 ‘죽음마저’ 용서받아야 하는 운명 앞에서 소용없는 고해성사밖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이의 엄마는 달려간 병원의 복도 끝에서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피는 꽃이라고/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그 끝을 기다”릴(「대기표를 들고」) 것이다. 이 절망 끝에 희망의 꽃이 과연 필까?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절망보다 오히려 희망이다.
“몸이 자석이 아닌데 먼저 보고 달려드는” 수많은 시계들 속에 화자는 산다. 시계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가리키며, “새 세상을 제시하며 죽은 책 속에 갇혀 있다고” 화자를 책망한다. “초침이 칼날처럼 날아오고” 이어서 분침의 칼날이 날아오고 “시침이 마지막 공격수처럼 묵직한 힘으로 척추를 치고 지나간다.” “발목에 찬 시계는 발목을 썰고 있었고 주머니의 시계는 허벅지를 자르고” 있는 고통의 극한을 그려내고 있다. 그 고통 속에 “쉽게 훔칠 것 같은 그녀의 꿈은 놓쳐버리고”(「선잠」) 만다. 그 절망의 한 중심에 ‘그녀’가 있다. 그녀에 대한 부채 의식이 죽음마저 놓아주지 않는다.
“몸은 더구나 “눈 감아도 검어지지 않는 밤을 건너며” “죽음처럼 까만 잠을 기대하면서”(「스틸녹스」) 깨어있는 시간에 몰려오는 공포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하여 수면유도제 스틸녹스를 삼키는 그 심경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희망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 오르는 희망이라는 단어
뿌리마저 없애고
지혜와 용기를 키우는 일
매일 죽어가면서 해야 할 몫이다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
부서지는 햇살에게 안부를 묻지 않는 것
발걸음 하나하나에 새기는 후회와 용서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 뒤에 오는 희열
죽어감에 감사하는 일
자유롭다는 것은 구속으로부터가 아니라
원하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
희망으로부터 자유가 진정한 해방이며
구원의 길임을
돌아오지 못할 길이 더 아름답다
「일방통행」
시인은 정면돌파를 택한다. 우회할 길이 없다. 이 길이 일방통행임을 인정하자. “손을 놓을 때는 과감하게 놓아야 한다”라고 미련을 두지 않는 결별을 다짐한다. “더 부드럽게 낙하지점에 낙하하기 위하여” “가슴에 구멍을 내며/가을을 준비하는 담쟁이”(「낙법」)처럼 그 길을 따르기로 한다. 꿈도 기도도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도 놓기로 한다.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부질없는 일 같은 것, “부서지는 햇살에게 안부를 묻지 않는 것.” 의미를 두지 않는다. 희망마저 두지 않는다. 비로소 진정한 해방과 구원은 희망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화자는 제임스 웹을 통해 블랙홀을 본다. “텅 빈 공간/ 모든 걸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블랙홀// 어머니 가슴처럼 모두 내어주고 남은 상흔/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놀라운 모성”을 본다. 그 빈 곳을 향해, “그 속으로 이제 다가가고자” 한다. 그렇다고 고통이 끝난 것은 물론 아니다. 다시 고통이 몰려온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회피하고 도피할까 했던 그 통증은 아니다.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알리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알리는/ 환희의 통증”인 것이다. 제임스 웹이 보여준 블랙홀을 통해 화자는 더욱 선명하게 그 빛을 보았다. (「제임스 웹」)돌아오지 못할 길이 더 아름답다는 것, 우리가 가는 길은 일방통행이라는 것을 보았다.
시인은 모든 것을 놓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 길은 가능하다고 한다. 시인의 시에 ‘비’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의 내적 심경를 반영하는 심리적 상관물이다. 그는 비가 “목적 없이 내린다”고 한다. “비는 호수에 내려 무의미의 왕관을 만들며 내린다. 비는 이유도 의도도 없이 내린다. 발가벗고 뛰어내려 만나는 사람마다 가슴 한복판으로 파고든다.” 목적도 이유도 의도도 없이 찾아온 비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밤마다 달이 떠오른다고 매일 자살한다. 반항하고 혁명을 꿈꾸다가 결별한다. (「이혼」) 다시 말하면 니체에게처럼 화자에게 말도, 의미도 생각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고통받는 이 순간의 나는 본질에 앞서 실존할 뿐이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익숙한 삶에 대하여 느끼는 낯선 이 감정과 태도, 이것이 로깡땡의 ‘구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전의 삶과 결별일 뿐이다.
시인의 시에는 비가 내린다. 내려서 “꿈이 젖는다/ 목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이 된다. “길거리를 붉게 물들이고/질퍽한 꿈에 달라붙는다.” 얼핏 죽음을 예감하는 어두운 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읽힐 수 있으나 그렇지만은 않다. 비는 “가슴 한복판으로 떨어져” 시인의 꿈은 “소용돌이친다.” 그 꿈의 실체는 “윤회를 끝내고 싶다”는 소망이다. 불교의 용어를 빌리면 니르바나를 향한 꿈인 것이다. 육도윤회를 멈춘 그 자리가 열반이다. 천국이나 그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것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자리다. 화자는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교향곡”이어서 “몽유병 환자처럼 안개를 덮어쓰고 새벽을 기다려” “하프를 타듯 비를 켠다” “그치지 않은 빗소리는 죽음의 속삭임으로 감미롭다.”(「비를 켜다」) 준비가 되어있다. 그 빛을 향하여 블랙홀을 향하여 화자는 한 발 더 다가간다.
아침마다 덥수룩하게 자란 생각을 잘라냅니다
밤새 웃자란 생각은 쉽게 잘리지만
고정된 관념은 쉽게 잘리지 않네요
그제는 먼지처럼 구석에 쌓여있던 책을 버렸습니다
눈이 맞아 신혼집에 데려와 각주까지 사랑하던
어제는 옷과 신발 서류 가방을 버렸고
오늘은 일기장과 필기구를 버리겠습니다
마침표를 찍기 위한 한 자루 붉은 펜만 남기고
여분의 옷도 가져가지 말라시던 그분의 말씀 따라
생각도 웃자라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르고
표정도 말도 면도하겠습니다
옹이처럼 굳은 신념을 제거하기 위해
조용히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겠습니다
내일은
「오컴의 면도날」
절망을 얘기하되 결코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희망마저 의미를 두지 않는다. 블랙홀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놀라운 모성”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화자는 마침표를 찍을 붉은 펜 한 자루만 남기고 ‘과감하게’ 다 잘라낸다. 면도를 하며 웃자란 생각도 잘라낸다. 그의 도피처가 되어 주고 꿈꾸게 하던 책도 버린다. 옷과 신발, 서류 가방, 일기장과 필기구를 버린다. 다 버리고 잘라내지만 평생을 통해 굳어버린 고정관념이 쉽게 가실 리 없다. 그러나 표정도 말도 다 면도해버리고 여벌 옷마저도 생략하고 조용히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는 바에야 옹이처럼 굳은 신념, 고정관념이라고 남겠는가? 그것들에 의해 규정되던 나는 그것들 없이도 이제 나로써 스스로 규정될 수 있게 되었다.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블랙홀이 화자 자신이었음을, 블랙홀이 그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줄 준비가 된 것이다.
3.
앞에서 생물학적 존재로서 한 개인이 겪는 극한의 병고 속에서 드러나는 감정과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철학을 소략하게 살펴보았다. 시인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와 모순과 고통에도 눈감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갖는 구조적 한계와 모순, 그것이 파생시키는 고통에 주목한다. 또한 폭압적 정치 현실이 약자에게 강요하는 고통을 주시한다. 잃지 않아야 할 소중한 인간적인 가치가 소멸되어 가는 현실 세태에도 시인의 눈길은 피해 가지 않는다. 시인의 안에는 소명의식으로서 굳게 자리 잡은 사회 역사의식이 있다.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향한 건강한 비판의식이다. 시로써 육체의 병고와 생물학적 죽음과 마주하고 한편으론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병폐와 마주하는 것이다.
시인이 우리 사회가 갖는 병폐에 맞서는 방법은 날카롭고 핏발 선 구호가 아니다. 대신 그는 정치 현실이나 세태와 문명을 풍자의 방법으로 비판하거나 잔잔한 고백과 회개의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옳음에 대한 믿음과 밝아오는 은유의 빛이 있다. 공감에서 비롯된 인간적 온기가 있고 연민이 있다.
우리 현실의 폭압은 은폐되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법이나 제도 혹은 관습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폭압인지 잘 모르게 되어있다. 드러나지 않게 ‘을’을 착취하고 옭아맨다. “생명보다 돈이 먼저”(「꽃의 비명」)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생리가 생래적으로 그러하다. 시인은 그의 시편 많은 부분을 약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시선으로 채우고 있다.
자본의 포식자를 시인은 개미귀신이라 칭한다. 주식시장에 몰려드는 수많은 개미를 먹이로 삼아 배를 불리는 거대 자본들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아침이면 떼를 지어 모래밭을 일구는 개미들”은 높은 빌딩에 사는 개미귀신들이 “즙을 다 빨아먹은 뒤 허물만 뱉아낸다.” 은밀하고 합법적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항금가루 안에서 죽어야 한다는/ 모래놀이는 치명적인 마약이다.”(「개미귀신」) 안전장치 없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주식 개미들의 몰락을 두고 화자는 아픈 가슴을 쓸어내린다. 황금빛 빌딩을 무너뜨릴 수는 없어도 시인은 황금빛 빌딩 속에는 개미귀신이 산다고 외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시집의 곳곳에 묻어난다. 대부분 뉴스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사건이거나 흔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매일 터지는 정치적 이슈 때문에 늘 약자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시인은 노량진 고시촌의 한 취준생을 그려낸다. 자본주의 시장에 흡수되지 못한 수많은 취준생의 상징으로 많은 젊은이가 공무원을 꿈꾼다. 그러나 선발되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어 자본은 늘 이들을 잉여로 둔다. 고시촌에 있는 카카오 인형을 뽑고 있는 한 젊은 고시생, “이번이 마지막 시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효도할 마지막 기회”라며 합격을 보장하는 주술의식처럼 인형 뽑기에 몰두한다. “유난히도 추운 정월 대보름/ 인형처럼 숨을 쉬지 않은 채” 고시생은 ‘발견’된다. (「중독」) 시인은 “하느님의 잔인한 뽑기 중독”이라 결구를 짓고 있다. 값싼 노동력으로 일회용처럼 쓰다 버리는 노동시장에 진입을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수많은 젊은이가 택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선택지임을 시인이라고 모르랴. 시인은 반어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하는 척해보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은 시급 만 원을 밑도는 급료를 받고 알바전선에 뛰어든다. 반지하 원룸에 살면서 외국계 거대 자본 “맥도널드 장화를 신고 피노키오 코를 달고 고깔모자에 방울을 달고 작은 키를 피에로 다리에 올려놓고 광고판 알바를” 한다. 혹은 “개업하는 전자제품 전문점에서/ 바겐세일을 하는 옷 가게에서/ 지나가는 꼬마에게 풍선 강아지 나누어 주며/ 늘 입술은 부풀어 있어야 하고/ 이빨은 검은 수박씨처럼 삐뚤삐뚤 흩어져 있어야” 한다.” 알아보는 이웃을 만날까봐 두려운 시간당 구천 원 알바를 해야 한다. (「피에로 다리」)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막다른 절벽으로 내모는가, 최저임금만큼 최저의 자존감만을 갖도록 하는가? 시인은 묻고 싶은 것이다.
새벽 세 시, 시인은 병실에서 CPRP CODE RED (심장외과 씨피알피 코드 레드) 심장외과 신호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멀리 사이렌처럼 밀려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성호를 그어야만 했다. “쌍둥이 생일파티 위해 달리던 마지막 배달/ 덤프트럭에 받혔다.” (「하느님도 배달의 민족을 사랑하신다」) 간혹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사고다. 어쩌다 인터넷을 보면 배달 라이더들의 수입이 몇 백에 이른다는 뉴스도 뜬다. 마치 그게 일반적인 현상인 것처럼 호도하는 자본의 ‘기더기’들이 나발부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절벽에 내몰린 우리의 젊은이들의 현주소를 시인은 라이더의 죽음을 통해 알리고자 한 것이다.
어떤 젊음은 밤을 지우며 수십 개의 카톡방, 밴드에 묶여 유폐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럴수록 사회적으로 더욱 고립되고 폐인이 될 수밖에 없다. “행복은 성적순으로 정해져 있었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전까지/ 올빼미 입술로 밤의 허기나 빨다가/ 굶주린 밤마저 더 내어놓을 게 없을 때/ 우리는 소주나 빨지 부탄도 불”며, 그렇게 산다. 어른들의 책망이 이어지면 언제고 “뛰어내릴”(「밤을 지우다」) 준비가 된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코알라가 있다. “아르바이트라 나가보면/ 목숨 걸고 하는 일이 한 시간에 빅맥 하나”값이다. 배달 라이더 열 시간에 겨우 친구 만나 소주 한 잔 값이다. 그들은 자주 경로를 이탈한다. “가게 앞에서 두더지나 두드리고 펀치 기계에 주먹질이나 하고 자주 포르노를 보고 아기가 되어가도” 경로 이탈을 경고해주는 이가 없다. “하루 스무 시간 침대에 누워 있어/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도 잊어”(「코알라」) 버린다.
누가 이들을 폐인으로 고층 옥상 절벽으로 몰아가는가? 더욱더 심화해가는 양극화 현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젊은이들을 누가 양산하는가? 인간을 돈을 위한 소모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냉혹한 자본의 착취구조가 그 바탕에 있음을 시인은 말하고자 한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폭압적이며 후안무치한 작금의 정치 권력에 대해서도 시인의 시선은 비켜가지 않는다.
명화극장을 보면서
주인공이 되어 마구 인디언을 죽였습니다
이라크를 공습하는 미군기를 보면서
학생 때 즐기던 갤러그를 떠올리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5.18은 폭도들이 일으켰고
유혈 진압을 구국의 결단으로 배우며
정의사회와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를 보냈습니다
세월호 때 314명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목숨을 잃어도
골목길 바람처럼 조용히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는 팔팔 뛰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죽을 때는
이게 나라냐고 찍소리 한번 못하면서
「회개」
인디언은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었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유럽인들은 인디언을 그렇게,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었다. 미군은 이라크의 민간인 거주지에 무차별 폭격을 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그게 전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갤러그 게임을 떠올리며 환호를 보내서는 안 되었다. 5.18은 폭도들이 일으켰고 유혈 진압은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거짓을 믿어서는 안 되었다. 세월호 때 314명이,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그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서는 안 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는 팔팔 뛰면서 우리나라 국민이 수도 없이 죽어갈 때는 이게 나라냐고 찍소리 한번 못 내어서는 안 되었다. 왜 안 되었음에도 못했을까, 안 했을까? 강대국에 예속되어 그들의 입장에 서서 꼭두각시가 된 역대 통치자들이 국민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는 안 되었음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독재의 무력 통치가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소불위 국가권력의 갖은 기망과 폭압적 권력 행사로 못하고 안 하고 있다. 시인은 ‘회개’라는 이름으로 소시민적 무지와 무력감을 자책하고 있다. 자책과 회개는 할 수 있으되 그게 어디 시인과 혹은 시인과 같은 소시민 탓이었겠는가?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안 하고, 못하게 만든 잘못된 권력에 대하여 은근히 에둘러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권력을 향하여 “이게 나라냐” 하고 저항하는 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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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부분 생략)
압수수색은 원래 팡팡 터뜨리기 위해서 존재해요
삼백 번 영장을 발부했다고 죽이는 건 아니잖아요
비눗방울은 많을수록 재미있고 아름다워 보이잖아요
어디까지 보여야 아름다운지
누구의 심장이 더 강한지
기더기*기들은 사람을 낭떠러지 위에다 세워놓고
떨어질 때까지 밀어요 재미난 게임처럼
인적 드문 골목길 돌아 집으로 오면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질 것 같아 가슴이 콩닥콩닥
이건 나약한 우리의 비겁한 신앙
남편 이름 대신에 김 검사라고 저장해요
오십억은 아니어도
오억이라도 떨어질지 모르잖아요
아니 오천만 원이라도 로또죠
나는 찬동이니까 저 쳐다보지 마세요
「반동」
국가권력에 의한 공포정치를 풍자한 시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 압수수색을 명가의 보도처럼 행사하고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 과정에서 정권에 밉보인 자이거나 정적들은 기가 꺾이고 재판으로 가기 전에 힘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뿐이랴. 국민은 평생 가야 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할 50억이라는 뒷돈이 왔다갔다 한다. 권력이 부정한 자본을 눈감아주고 보호해준 대가다. 여기에 정치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언론권력은(기더기)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미명 아래 사람을 낭떠러지 위에 세워놓고 떨어질 때까지 재미난 게임처럼 아무 죄의식 없이 밀어제낀다.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전화기에 남편의 이름 대신 김 검사라고 저장한다. 검사라는 이름이 자신을 보호해주거나 뉴스에서 보듯이 50억, 아니 오억, 아니 오천만 원이라도 때아닌 횡재를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 때문이겠다. 부정한 권력 행사가 횡행하는 현실에 대한 풍자적 상황이다. 이러한 폭압적 권력 행사는 혐의를 받는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일반 소시민들까지 위축시키고 저자세로 만들고 비굴하게 만든다. 이 시에서 화자는 급기야 “나는 찬동이니까 저 쳐다보지 마세요.”라고 지레 자신을 방어하고 변호하기에 이른다. 풍자적 상황이지만 이러한 풍자를 통해 시인은 부정한 권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실레네꽃나비 장식을 한 뱀같이 갖은 감언이설로 유권자를 유혹하고 투표로 선택받지만 결국은 민생을 돌보지 않고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뒷돈을 챙기는 정치도 시인의 풍자를 피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약자는 늘 약자로 재생산된다. 약자에게 답은 각자도생(「투표」)밖엔 없다.
시인은 미얀마에서 진행 중인 민주화운동을 그려낸다. “헬기 소리가 들린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들/ 낮은 지붕을 뚫고 젖 먹던 아이의 머리를 뚫고 지나간다/ 빌딩에서 쏟아져 내리는 유리 조각들/ 입마다 핏방울을 물고 떨어진다// 울음소리마저 말라버린 피의 거리에/ 햇살도 핏빛으로 눌어붙어 파리처럼 기도하는”(「다시 금남로에 서다」)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5.18의 재판이다. 5.18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동족 수백 명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짓밟으며 권력을 탈취한 5.18은 온전하게 그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희생자의 명예 회복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살의 원흉은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죽었다. 집권당과 권력자는 그의 정권 탈취를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그가 부정하게 취득한 재산은 아직도 환수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않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실종자/ 아직까지 진행형인데/ 모두 잊고 용서하자”(「손수건」) 한다. 이 같은 현실에 시인은 분노가 솟구친다. 그래서 시인은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에 “다시 금남로에 서다”라는 제목을 붙여 진행 중인 5.18을 불러낸 것이리라.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책무요 소명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냥 쌓이는 것이 아니다
겨울 산의 주인은 바람
겨울바람의 눈을 피해
내리면 먼저 납작 엎드리고
더 낮은 곳으로 재빨리 찾아들어야 한다
바람이 눈을 뜨기 전에 나뭇가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벗기려는 자와 덮으려는 자
칼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시퍼런 겨울바람 앞에도
두려운 기색 없이 하얀 웃음으로 맞서야 한다
소리 내지 않고
새벽을 틈타
칼끝보다 더 날카로운 하얀 빛의 절정이 되어야 한다
어둠을 찢고 터져 나오는 여명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져야 견디는 겨울 공화국에서
새잎이 터져 나올 수 있게 온몸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깃털처럼 가볍게 내리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야 한다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가지 위에 가랑잎 위에
하얗게
「상고대」
발 딛고 선 현실을 겨울 공화국이라 인식하는 데서 시적 화자의 자세는 결정된다. “벗기려는 자와 덮으려는 자/ 칼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시퍼런 겨울바람”이 겨울 공화국을 군림하고 있다. 시인은 여기에 맞서는 방식에 대하여 말한다. 폭압적 현실에 맞서는 것은 칼을 드는 방식이 아니다. 마치 김수영의 ‘풀’처럼 바람보다 먼저 누워야 한다. “먼저 납작 엎드리고/ 더 낮은 곳으로 재빨리 찾아들어야 한다.” “바람이 눈을 뜨기 전에 나뭇가지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빨을 드러내고 적의를 드러내는 대신 두려운 기색 없이 하얀 웃음으로 맞서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하고 나약한 가지와 가랑잎 위에 “깃털처럼 가볍게 내리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야 한다.” 상고대란 공기 중에 습기가 갑자기 차가운 바람을 만나 나뭇가지에 눈꽃처럼 하얗고 아름답게 맺히는 것을 말한다. 상고대는 폭압적 현실에 저항하는 시인의 은유다.
시인의 저항과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은 때론 풍자로 때론 은유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자본의 야수적 속성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폭압적이고 기만적인 정치 권력뿐만 아니라 허위와 가식에 찬 세태, 영혼이 소거된 문명비판까지 그 영역은 다양하다.
진영역을 지나며 진영정치를 떠올리면서 서로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진영정치를 무겁지 않은 언어유희로 비판한달지(「진영」), 20세기에나 있을 법한 연탄가스 중독 사망 뉴스가 반복되어도 연민이나 사랑이 소거된 세태를 풍자한다.(「11시 11분」) 친구의 죽음 앞에서 “가야 하나 조의만 표할까” 고민하는 소시민적 이해타산을 풍자하기도 한다.(죽음이 오는 방식) 긴밀한 유대나 소통 없이 집에서도 각자 따로 도는 포노사피엔스의 동행방식을 안타까워하고(「유튜브」), 자유라는 이름으로 표피적인 관계 속에서 영혼 없는 사랑을 나누고 삶을 임기응변하는 세태를 풍자한다.(「포스트잇」) 가상세계로 대체된 현실 세계의 허구성을 풍자한다.(「뉴로링크」) “쇳밥을 먹는 사람은/ 쇠똥을 누고/ 눈에도 손에도 쇠가 자라는데/ 씻을 힘 없어 누운 연립주택/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금이 간 얼굴”(「쇳밥」), 용접 노동자의 일상을 아프게 그려내기도 한다.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죽을 만큼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저항하고 비판하며 풍자한다. 그것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시인이 숨 쉬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연민하며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올곧음을 지향하는 시인의 시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세상이 저항의 언어마저 낚아채 갔을 때도/ 아침이면 새가 지저귀고/ 다람쥐는 목을 축이듯/ 시인은 떠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떠드는 일은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 혀가 뽑히면 손톱으로라 벽이라도 긁어야 한다”며 “침묵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진단한다. 시인은 불의를 불의라 떠들어야 하는 존재이며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운명을 가진 자이다. 옳지 못한 것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고 시인은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시인은 “죽어서도 외쳐야 한다.”(「반항」)
4.
나는 하늘도 업신여기는 시인
단단한 뿌리로 담벼락 움켜잡고 벽화를
동백나무 칭칭 감아 붉은 생각 읽어 들이며
바늘구멍만 있어도
담 밖으로 뻗어나가 담쟁이 마음 순식간에 빼앗는다
잘리면 잘릴수록 더 빨리 자라고
더 깊고 더 넓게 뿌리를 뻗으며
악착같이 담장에 쓰는 일기
검붉은 시로 피어날지니
달아나는 문장을 쫓아 새벽까지 잠 못 들고
여백이 있으면 끊임없이 써나갈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
용서하라
담 밖으로 떨어지는 주홍빛 최후를
「혈서」
시인은 치명적 병고를 겪으며 미구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생물학적 종언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과정을 시로써 보여주었다. 시 한 편 한 편이 들뜨거나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고 허허롭게,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혈서를 쓰듯 핍진하게 써내려갔다. 시인은 단단한 뿌리로, 벽을 움켜쥐고 꽃의 영혼을 읽어들이는 담쟁이덩굴처럼 “잘리면 잘릴수록 더 빨리 자라고/ 더 깊고 더 넓게 뿌리를 뻗으며/ 악착같이” 삶과 시를 살아왔다. 스스로를 “하늘도 업신여기는 시인”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세상의 갖은 질곡과 고통을 시로써 헤쳐나왔고 건강한 비판의식으로 우리 사회와 역사의 병폐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이 시집에 실린 한 편 한 편 시들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포즈나 제스처가 아닌 순도 높은 시혼이 담겨있는 혈서와 같은 것이다. “달아나는 문장을 쫓아 새벽까지 잠 못 들고/ 여백이 있으면 끊임없이” 시를 쓰는 시인의 운명을 살아왔으니 “담 밖으로 떨어진다 하여도” 끝까지 시인으로서 명예롭고 그 마지막은 주홍빛으로 아름다우며 장렬하다 아니 할 수 없겠다. 시인도 시도 용서할 게 없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래도 잠시 쉬어가면 안 되겠니
겨울이 다가오는데
나는 색깔 한번 가진 적이 없구나
너는 활짝 피우렴
자주색이든 분홍색이든
한 번쯤 너의 색깔로 세상을 덮어보렴
하회탈 같은 미소와
하늘하늘한 손짓으로
많은 사람들의 배경이 되어주렴
사랑은 손에 쥔 물 같은 것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잡으려 하지 말고 떠나보내렴
밟히고 꺾이는 거 두려워하지 말고
밤에 내리는 이슬을 가까이 하렴
힘들고 외로우면
가을 밤하늘
제일 멀리 있는 별을 사랑하렴
가장 좋은 꿈은
꿈꾸지 않는 거라는데
네게 너무 큰 꿈을 얘기한 건 아닌지
「핑크뮬리」
자녀에게인지, 사랑하는 모든이에겐지 자분자분 당부하는 투로 씌어진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을 옮기며 해설을 마무리할까 한다. 기실 시인의 시는 난해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필요하지 않은 말장난이 없다. 겸허한 표현을 즐기며 맑고 따뜻한 시심을 담고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보이는 연민과 애정은 시인의 인간적인 시인으로 특징 지워 주는 주요한 부분이다. 때론 시인을 “쓰러뜨리기도 하고 일으켜 세우기도 했던 헛헛한 시어”는(「시집과 감귤」) 시집 속에 담겨 그리고 뒤에 남은 이들의 가슴에 별처럼 빛날 것이다.
시로 쓴 혈서, 길 끝에서 불사르는 노을빛 시혼
_김 승 시인의 시집을 읽다
복효근(시인)
1.
김승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두 개의 축이 시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구에 찾아올지 모를 생물학적 종언을 염두에 둔 시인 자신의 심경, 그리고 동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약자의 삶에 대한 관심이다. 문학은 자신의 삶과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길을 열어가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은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타파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비판적이며 참여적인 기능을 가진다.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시인이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물학적 종언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치명적 병마와 싸우면서(뒤에 살펴보겠지만 시인의 경우 ‘싸운다’는 이 상투적인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온 생을 바쳐 쓴 시편들인 것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언젠가 그 끝을 맞이하게 운명지어져 있다. 고등지각력을 가진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자신에게 닥쳐올 이 운명적 미래의 부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서 두려움을 넘어서고 어떻게 종언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 고뇌하고 탐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시인의 삶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집약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한 자신의 고통 속에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아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포함시켜 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김승 시인에게 사회적 관심, 특히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지속적인 시적 주제를 이루고 있었다. 시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또 하나의 축이었던 것이다. 시인의 경우, 그리고 이번 시집의 경우 문학의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편의상 나누어 살펴보겠지만 기실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시인의 시혼을 떠받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십 층 펜트하우스
꼬물거리는 자동차와
저녁놀을 내려다본다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는 공포
날아오르고 싶었던 만큼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
무너지지 않는 아파트의 신화 위에
맞지 않은 헐거운 옷
몸을 키워도
줄여도 맞출 수 없는
찢어버리고 싶은 날개
언제부터 나를 믿지 못하는 계절이 시작되었는지
만국기가 휘날리던 국민학교
담장 밑에 차려진 막걸리집
뿌연 먼지와 화약 냄새가 뒤섞인
가을 하늘
나머지들에게 주던 노트 한 권의 좌절과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선녀들 이야기만 반짝거렸고
무성하게 흔들리던 나뭇잎 아래
다리가 짧은 아이는
늦가을 매미처럼 울기만 했지
콩밭 끝에 묻힌 엄마는
호미질만 하고 있는지
돌아올 생각도 않는데
속살을 파고든 개미처럼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가려움
거머리가 머리까지 올라가
죽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당집의 요령처럼 흔들리는 저녁
갑자기 속이 메스껍다
「구토」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대비적으로 그려진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다리가 짧은 화자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에서 등수에 들지 못했다. 화자는 ‘나머지들’로 분류되어 노트 한 권을 받아들고 늦가을 매미처럼 처량하게 울었던 절망을 회상한다. 가난한 엄마는 밭에서 돌아올 줄 모르고 기괴하고 무섭기 그지없는 어른들의 이야기만 떠오른다. 가난과 소외를 일찍이 경험한 화자는 어느새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으로” “무너지지 않는 아파트 신화”를 따라 40층 펜트하우스 고급 아파트에서 살며 아래를 내려다 본다. 부를 이루었으나 만족감이나 행복이 아니라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는 공포”를 느낀다. “몸을 키워도/줄여도 맞출 수 없는” “맞지 않은 헐거운 옷”, 날개를 찢어버리고만 싶다.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면서 “언제부터 나를 믿지 못하는 계절이 시작되었는지” 화자는 묻고 있다. 그리고 속이 메스껍다. 구토증을 느낀다.
여기서 구토는 생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으로 인간이 사물의 본래적인 모습을 마주할 때 느끼는 생경하고 부조리한 감정이다. 싸르크르의 「구토」에서 로깡땡은 조약돌을 집어 든 순간,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조약돌은 물수제비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우연적' 존재로서 해변에 놓여 있을 뿐이고, 그가 이제까지 '물수제비'라는 본질에 의해 실존한다고 생각했던 조약돌이 사실 인간이 정해놓은 이념적 틀과 가치체계에 갇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너무도 익숙해서 거기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 문득 존재감을 드러낼 때 다가오는 낯선 느낌, 또는 사람들이 정한 규칙과 습관의 지배하에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어색해지는 느낌. 사르트르는 이처럼 존재 자체가 전적으로 우연성에 따르며 필연성을 상실했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현실의 메스꺼움을 '구토'라고 하였다.
싸르트르의 「구토」에서 로깡땡이 겪는 구토의 의미와 온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화자도 로깡땡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리가 짧아 등수에 끼지 못하고 매미처럼 울던 자아와 펜트하우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아의 존재론적 괴리, 모순된 욕망 앞에서 어떤 것이 진짜 자아인지 실존적인 고뇌를 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를 매순간, 문득문득 경험한다. 그러니까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인의 삶과 그가 속한 사회의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고뇌의 기록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2
아직 살아있나 죽음이 아침마다 묻습니다
생은 죽어가는 기분이 어때하고 저녁에 인사합니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별처럼
몸을 두고 벌이는 전쟁
말을 버리기로 합니다
의미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생각을 지우기로 합니다
먼지와 먼지 사이로
물을 나르는 일이 삶의 전부입니다
입안에 들어가는 건 먹을 것이 아닙니다
신을 죽인 대가로 치르는 고통의 재생산
두 겹에서 네 겹으로 늘어나는 채찍에
피 흘리는 몸이 점점 가벼워짐을 느끼는
지금은 정오입니다
「토리노의 말」
니체가 45세 때에 급속히 몸이 쇠약해져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그는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토리노의 말」은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이 일화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 광장. 프리드리히 니체는 카를로 알베르토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다. 그 토리노 광장에서 늙은 말이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한다. 보다 못한 니체가 달려가서 늙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운다. 말 대신 채찍을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라며 울다가, 미쳐버린다. 이웃에 의해 집으로 옮겨진 니체는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웅얼거린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는 식물인간에 가까운 삶을 10년간 살다가 56세에 세상을 떠난다. (다음 백과에서 발췌)
시인의 생애는 니체의 그것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치명적인 병마로 투병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죽음과 생이 육체를 두고 번갈아 묻는 질문에 화자는 “말을 버리기로 합니다/ 의미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생각을 지우기로 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화자는 “두 겹에서 네 겹으로 늘어나는 채찍에/ 피 흘리는 몸이 점점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 고통은 “신을 죽인 대가”라고 자인한다. 말을 버리고 의미를 포기하고 생각과 결별한 결과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하듯이 죽음을 섭리로서 수긍하고 수용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몸은 구 회 말 투아웃 노 주자/ 아직 방망이를 놓을 수 없는 나/ 더그아웃에서 소리쳐 응원하는데/ 무성영화처럼 들리지 않는다// 패색이 짙은 병실이지만/ 홈런 한방에 희망을 걸고/ 비급여 고액 치료제를/ 장모님과 의논하는 아내/ 잠든 척 돌아누운 채 숨을 멈춘다.”(「구 회 말」) 홈런 한 방에 마지막 명운을 건 것처럼 비급여 고액 치료제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는 가족의 고통 또한 화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절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녀 중 하나가 “밤마다 자면서도 아프다고” 호소한다. 해 뜨면 엄마는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야만 한다. 구두를 신고 거리를 활보하는 꿈을 꾸며 구두를 사 모으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극한의 병고를 치르고 있는 자신만큼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걸로 보인다. 한편 화자는 책을 사 모은다. 책은 외면의 한 방법이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도피처를 마련해보는 것이다. “쓰러진 꿈을 세우는 데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책”을 무덤 삼으려는 것이다.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이와 엄마에게 ‘죽음마저’ 용서받아야 하는 운명 앞에서 소용없는 고해성사밖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이의 엄마는 달려간 병원의 복도 끝에서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피는 꽃이라고/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그 끝을 기다”릴(「대기표를 들고」) 것이다. 이 절망 끝에 희망의 꽃이 과연 필까?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절망보다 오히려 희망이다.
“몸이 자석이 아닌데 먼저 보고 달려드는” 수많은 시계들 속에 화자는 산다. 시계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가리키며, “새 세상을 제시하며 죽은 책 속에 갇혀 있다고” 화자를 책망한다. “초침이 칼날처럼 날아오고” 이어서 분침의 칼날이 날아오고 “시침이 마지막 공격수처럼 묵직한 힘으로 척추를 치고 지나간다.” “발목에 찬 시계는 발목을 썰고 있었고 주머니의 시계는 허벅지를 자르고” 있는 고통의 극한을 그려내고 있다. 그 고통 속에 “쉽게 훔칠 것 같은 그녀의 꿈은 놓쳐버리고”(「선잠」) 만다. 그 절망의 한 중심에 ‘그녀’가 있다. 그녀에 대한 부채 의식이 죽음마저 놓아주지 않는다.
“몸은 더구나 “눈 감아도 검어지지 않는 밤을 건너며” “죽음처럼 까만 잠을 기대하면서”(「스틸녹스」) 깨어있는 시간에 몰려오는 공포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하여 수면유도제 스틸녹스를 삼키는 그 심경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희망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 오르는 희망이라는 단어
뿌리마저 없애고
지혜와 용기를 키우는 일
매일 죽어가면서 해야 할 몫이다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
부서지는 햇살에게 안부를 묻지 않는 것
발걸음 하나하나에 새기는 후회와 용서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 뒤에 오는 희열
죽어감에 감사하는 일
자유롭다는 것은 구속으로부터가 아니라
원하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
희망으로부터 자유가 진정한 해방이며
구원의 길임을
돌아오지 못할 길이 더 아름답다
「일방통행」
시인은 정면돌파를 택한다. 우회할 길이 없다. 이 길이 일방통행임을 인정하자. “손을 놓을 때는 과감하게 놓아야 한다”라고 미련을 두지 않는 결별을 다짐한다. “더 부드럽게 낙하지점에 낙하하기 위하여” “가슴에 구멍을 내며/가을을 준비하는 담쟁이”(「낙법」)처럼 그 길을 따르기로 한다. 꿈도 기도도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도 놓기로 한다.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부질없는 일 같은 것, “부서지는 햇살에게 안부를 묻지 않는 것.” 의미를 두지 않는다. 희망마저 두지 않는다. 비로소 진정한 해방과 구원은 희망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화자는 제임스 웹을 통해 블랙홀을 본다. “텅 빈 공간/ 모든 걸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블랙홀// 어머니 가슴처럼 모두 내어주고 남은 상흔/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놀라운 모성”을 본다. 그 빈 곳을 향해, “그 속으로 이제 다가가고자” 한다. 그렇다고 고통이 끝난 것은 물론 아니다. 다시 고통이 몰려온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회피하고 도피할까 했던 그 통증은 아니다.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알리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알리는/ 환희의 통증”인 것이다. 제임스 웹이 보여준 블랙홀을 통해 화자는 더욱 선명하게 그 빛을 보았다. (「제임스 웹」)돌아오지 못할 길이 더 아름답다는 것, 우리가 가는 길은 일방통행이라는 것을 보았다.
시인은 모든 것을 놓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 길은 가능하다고 한다. 시인의 시에 ‘비’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의 내적 심경를 반영하는 심리적 상관물이다. 그는 비가 “목적 없이 내린다”고 한다. “비는 호수에 내려 무의미의 왕관을 만들며 내린다. 비는 이유도 의도도 없이 내린다. 발가벗고 뛰어내려 만나는 사람마다 가슴 한복판으로 파고든다.” 목적도 이유도 의도도 없이 찾아온 비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밤마다 달이 떠오른다고 매일 자살한다. 반항하고 혁명을 꿈꾸다가 결별한다. (「이혼」) 다시 말하면 니체에게처럼 화자에게 말도, 의미도 생각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고통받는 이 순간의 나는 본질에 앞서 실존할 뿐이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익숙한 삶에 대하여 느끼는 낯선 이 감정과 태도, 이것이 로깡땡의 ‘구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전의 삶과 결별일 뿐이다.
시인의 시에는 비가 내린다. 내려서 “꿈이 젖는다/ 목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이 된다. “길거리를 붉게 물들이고/질퍽한 꿈에 달라붙는다.” 얼핏 죽음을 예감하는 어두운 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읽힐 수 있으나 그렇지만은 않다. 비는 “가슴 한복판으로 떨어져” 시인의 꿈은 “소용돌이친다.” 그 꿈의 실체는 “윤회를 끝내고 싶다”는 소망이다. 불교의 용어를 빌리면 니르바나를 향한 꿈인 것이다. 육도윤회를 멈춘 그 자리가 열반이다. 천국이나 그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것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자리다. 화자는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교향곡”이어서 “몽유병 환자처럼 안개를 덮어쓰고 새벽을 기다려” “하프를 타듯 비를 켠다” “그치지 않은 빗소리는 죽음의 속삭임으로 감미롭다.”(「비를 켜다」) 준비가 되어있다. 그 빛을 향하여 블랙홀을 향하여 화자는 한 발 더 다가간다.
아침마다 덥수룩하게 자란 생각을 잘라냅니다
밤새 웃자란 생각은 쉽게 잘리지만
고정된 관념은 쉽게 잘리지 않네요
그제는 먼지처럼 구석에 쌓여있던 책을 버렸습니다
눈이 맞아 신혼집에 데려와 각주까지 사랑하던
어제는 옷과 신발 서류 가방을 버렸고
오늘은 일기장과 필기구를 버리겠습니다
마침표를 찍기 위한 한 자루 붉은 펜만 남기고
여분의 옷도 가져가지 말라시던 그분의 말씀 따라
생각도 웃자라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르고
표정도 말도 면도하겠습니다
옹이처럼 굳은 신념을 제거하기 위해
조용히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겠습니다
내일은
「오컴의 면도날」
절망을 얘기하되 결코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희망마저 의미를 두지 않는다. 블랙홀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놀라운 모성”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화자는 마침표를 찍을 붉은 펜 한 자루만 남기고 ‘과감하게’ 다 잘라낸다. 면도를 하며 웃자란 생각도 잘라낸다. 그의 도피처가 되어 주고 꿈꾸게 하던 책도 버린다. 옷과 신발, 서류 가방, 일기장과 필기구를 버린다. 다 버리고 잘라내지만 평생을 통해 굳어버린 고정관념이 쉽게 가실 리 없다. 그러나 표정도 말도 다 면도해버리고 여벌 옷마저도 생략하고 조용히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는 바에야 옹이처럼 굳은 신념, 고정관념이라고 남겠는가? 그것들에 의해 규정되던 나는 그것들 없이도 이제 나로써 스스로 규정될 수 있게 되었다.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블랙홀이 화자 자신이었음을, 블랙홀이 그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줄 준비가 된 것이다.
3.
앞에서 생물학적 존재로서 한 개인이 겪는 극한의 병고 속에서 드러나는 감정과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철학을 소략하게 살펴보았다. 시인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와 모순과 고통에도 눈감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갖는 구조적 한계와 모순, 그것이 파생시키는 고통에 주목한다. 또한 폭압적 정치 현실이 약자에게 강요하는 고통을 주시한다. 잃지 않아야 할 소중한 인간적인 가치가 소멸되어 가는 현실 세태에도 시인의 눈길은 피해 가지 않는다. 시인의 안에는 소명의식으로서 굳게 자리 잡은 사회 역사의식이 있다.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향한 건강한 비판의식이다. 시로써 육체의 병고와 생물학적 죽음과 마주하고 한편으론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병폐와 마주하는 것이다.
시인이 우리 사회가 갖는 병폐에 맞서는 방법은 날카롭고 핏발 선 구호가 아니다. 대신 그는 정치 현실이나 세태와 문명을 풍자의 방법으로 비판하거나 잔잔한 고백과 회개의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옳음에 대한 믿음과 밝아오는 은유의 빛이 있다. 공감에서 비롯된 인간적 온기가 있고 연민이 있다.
우리 현실의 폭압은 은폐되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법이나 제도 혹은 관습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폭압인지 잘 모르게 되어있다. 드러나지 않게 ‘을’을 착취하고 옭아맨다. “생명보다 돈이 먼저”(「꽃의 비명」)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생리가 생래적으로 그러하다. 시인은 그의 시편 많은 부분을 약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시선으로 채우고 있다.
자본의 포식자를 시인은 개미귀신이라 칭한다. 주식시장에 몰려드는 수많은 개미를 먹이로 삼아 배를 불리는 거대 자본들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아침이면 떼를 지어 모래밭을 일구는 개미들”은 높은 빌딩에 사는 개미귀신들이 “즙을 다 빨아먹은 뒤 허물만 뱉아낸다.” 은밀하고 합법적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항금가루 안에서 죽어야 한다는/ 모래놀이는 치명적인 마약이다.”(「개미귀신」) 안전장치 없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주식 개미들의 몰락을 두고 화자는 아픈 가슴을 쓸어내린다. 황금빛 빌딩을 무너뜨릴 수는 없어도 시인은 황금빛 빌딩 속에는 개미귀신이 산다고 외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시집의 곳곳에 묻어난다. 대부분 뉴스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사건이거나 흔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매일 터지는 정치적 이슈 때문에 늘 약자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시인은 노량진 고시촌의 한 취준생을 그려낸다. 자본주의 시장에 흡수되지 못한 수많은 취준생의 상징으로 많은 젊은이가 공무원을 꿈꾼다. 그러나 선발되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어 자본은 늘 이들을 잉여로 둔다. 고시촌에 있는 카카오 인형을 뽑고 있는 한 젊은 고시생, “이번이 마지막 시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효도할 마지막 기회”라며 합격을 보장하는 주술의식처럼 인형 뽑기에 몰두한다. “유난히도 추운 정월 대보름/ 인형처럼 숨을 쉬지 않은 채” 고시생은 ‘발견’된다. (「중독」) 시인은 “하느님의 잔인한 뽑기 중독”이라 결구를 짓고 있다. 값싼 노동력으로 일회용처럼 쓰다 버리는 노동시장에 진입을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수많은 젊은이가 택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선택지임을 시인이라고 모르랴. 시인은 반어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하는 척해보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은 시급 만 원을 밑도는 급료를 받고 알바전선에 뛰어든다. 반지하 원룸에 살면서 외국계 거대 자본 “맥도널드 장화를 신고 피노키오 코를 달고 고깔모자에 방울을 달고 작은 키를 피에로 다리에 올려놓고 광고판 알바를” 한다. 혹은 “개업하는 전자제품 전문점에서/ 바겐세일을 하는 옷 가게에서/ 지나가는 꼬마에게 풍선 강아지 나누어 주며/ 늘 입술은 부풀어 있어야 하고/ 이빨은 검은 수박씨처럼 삐뚤삐뚤 흩어져 있어야” 한다.” 알아보는 이웃을 만날까봐 두려운 시간당 구천 원 알바를 해야 한다. (「피에로 다리」)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막다른 절벽으로 내모는가, 최저임금만큼 최저의 자존감만을 갖도록 하는가? 시인은 묻고 싶은 것이다.
새벽 세 시, 시인은 병실에서 CPRP CODE RED (심장외과 씨피알피 코드 레드) 심장외과 신호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멀리 사이렌처럼 밀려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성호를 그어야만 했다. “쌍둥이 생일파티 위해 달리던 마지막 배달/ 덤프트럭에 받혔다.” (「하느님도 배달의 민족을 사랑하신다」) 간혹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사고다. 어쩌다 인터넷을 보면 배달 라이더들의 수입이 몇 백에 이른다는 뉴스도 뜬다. 마치 그게 일반적인 현상인 것처럼 호도하는 자본의 ‘기더기’들이 나발부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절벽에 내몰린 우리의 젊은이들의 현주소를 시인은 라이더의 죽음을 통해 알리고자 한 것이다.
어떤 젊음은 밤을 지우며 수십 개의 카톡방, 밴드에 묶여 유폐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럴수록 사회적으로 더욱 고립되고 폐인이 될 수밖에 없다. “행복은 성적순으로 정해져 있었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전까지/ 올빼미 입술로 밤의 허기나 빨다가/ 굶주린 밤마저 더 내어놓을 게 없을 때/ 우리는 소주나 빨지 부탄도 불”며, 그렇게 산다. 어른들의 책망이 이어지면 언제고 “뛰어내릴”(「밤을 지우다」) 준비가 된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코알라가 있다. “아르바이트라 나가보면/ 목숨 걸고 하는 일이 한 시간에 빅맥 하나”값이다. 배달 라이더 열 시간에 겨우 친구 만나 소주 한 잔 값이다. 그들은 자주 경로를 이탈한다. “가게 앞에서 두더지나 두드리고 펀치 기계에 주먹질이나 하고 자주 포르노를 보고 아기가 되어가도” 경로 이탈을 경고해주는 이가 없다. “하루 스무 시간 침대에 누워 있어/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도 잊어”(「코알라」) 버린다.
누가 이들을 폐인으로 고층 옥상 절벽으로 몰아가는가? 더욱더 심화해가는 양극화 현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젊은이들을 누가 양산하는가? 인간을 돈을 위한 소모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냉혹한 자본의 착취구조가 그 바탕에 있음을 시인은 말하고자 한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폭압적이며 후안무치한 작금의 정치 권력에 대해서도 시인의 시선은 비켜가지 않는다.
명화극장을 보면서
주인공이 되어 마구 인디언을 죽였습니다
이라크를 공습하는 미군기를 보면서
학생 때 즐기던 갤러그를 떠올리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5.18은 폭도들이 일으켰고
유혈 진압을 구국의 결단으로 배우며
정의사회와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를 보냈습니다
세월호 때 314명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목숨을 잃어도
골목길 바람처럼 조용히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는 팔팔 뛰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죽을 때는
이게 나라냐고 찍소리 한번 못하면서
「회개」
인디언은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었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유럽인들은 인디언을 그렇게,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었다. 미군은 이라크의 민간인 거주지에 무차별 폭격을 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그게 전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갤러그 게임을 떠올리며 환호를 보내서는 안 되었다. 5.18은 폭도들이 일으켰고 유혈 진압은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거짓을 믿어서는 안 되었다. 세월호 때 314명이,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그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서는 안 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는 팔팔 뛰면서 우리나라 국민이 수도 없이 죽어갈 때는 이게 나라냐고 찍소리 한번 못 내어서는 안 되었다. 왜 안 되었음에도 못했을까, 안 했을까? 강대국에 예속되어 그들의 입장에 서서 꼭두각시가 된 역대 통치자들이 국민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는 안 되었음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독재의 무력 통치가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소불위 국가권력의 갖은 기망과 폭압적 권력 행사로 못하고 안 하고 있다. 시인은 ‘회개’라는 이름으로 소시민적 무지와 무력감을 자책하고 있다. 자책과 회개는 할 수 있으되 그게 어디 시인과 혹은 시인과 같은 소시민 탓이었겠는가?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안 하고, 못하게 만든 잘못된 권력에 대하여 은근히 에둘러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권력을 향하여 “이게 나라냐” 하고 저항하는 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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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부분 생략)
압수수색은 원래 팡팡 터뜨리기 위해서 존재해요
삼백 번 영장을 발부했다고 죽이는 건 아니잖아요
비눗방울은 많을수록 재미있고 아름다워 보이잖아요
어디까지 보여야 아름다운지
누구의 심장이 더 강한지
기더기*기들은 사람을 낭떠러지 위에다 세워놓고
떨어질 때까지 밀어요 재미난 게임처럼
인적 드문 골목길 돌아 집으로 오면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질 것 같아 가슴이 콩닥콩닥
이건 나약한 우리의 비겁한 신앙
남편 이름 대신에 김 검사라고 저장해요
오십억은 아니어도
오억이라도 떨어질지 모르잖아요
아니 오천만 원이라도 로또죠
나는 찬동이니까 저 쳐다보지 마세요
「반동」
국가권력에 의한 공포정치를 풍자한 시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 압수수색을 명가의 보도처럼 행사하고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 과정에서 정권에 밉보인 자이거나 정적들은 기가 꺾이고 재판으로 가기 전에 힘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뿐이랴. 국민은 평생 가야 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할 50억이라는 뒷돈이 왔다갔다 한다. 권력이 부정한 자본을 눈감아주고 보호해준 대가다. 여기에 정치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언론권력은(기더기)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미명 아래 사람을 낭떠러지 위에 세워놓고 떨어질 때까지 재미난 게임처럼 아무 죄의식 없이 밀어제낀다.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전화기에 남편의 이름 대신 김 검사라고 저장한다. 검사라는 이름이 자신을 보호해주거나 뉴스에서 보듯이 50억, 아니 오억, 아니 오천만 원이라도 때아닌 횡재를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 때문이겠다. 부정한 권력 행사가 횡행하는 현실에 대한 풍자적 상황이다. 이러한 폭압적 권력 행사는 혐의를 받는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일반 소시민들까지 위축시키고 저자세로 만들고 비굴하게 만든다. 이 시에서 화자는 급기야 “나는 찬동이니까 저 쳐다보지 마세요.”라고 지레 자신을 방어하고 변호하기에 이른다. 풍자적 상황이지만 이러한 풍자를 통해 시인은 부정한 권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실레네꽃나비 장식을 한 뱀같이 갖은 감언이설로 유권자를 유혹하고 투표로 선택받지만 결국은 민생을 돌보지 않고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뒷돈을 챙기는 정치도 시인의 풍자를 피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약자는 늘 약자로 재생산된다. 약자에게 답은 각자도생(「투표」)밖엔 없다.
시인은 미얀마에서 진행 중인 민주화운동을 그려낸다. “헬기 소리가 들린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들/ 낮은 지붕을 뚫고 젖 먹던 아이의 머리를 뚫고 지나간다/ 빌딩에서 쏟아져 내리는 유리 조각들/ 입마다 핏방울을 물고 떨어진다// 울음소리마저 말라버린 피의 거리에/ 햇살도 핏빛으로 눌어붙어 파리처럼 기도하는”(「다시 금남로에 서다」)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5.18의 재판이다. 5.18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동족 수백 명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짓밟으며 권력을 탈취한 5.18은 온전하게 그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희생자의 명예 회복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살의 원흉은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죽었다. 집권당과 권력자는 그의 정권 탈취를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그가 부정하게 취득한 재산은 아직도 환수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않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실종자/ 아직까지 진행형인데/ 모두 잊고 용서하자”(「손수건」) 한다. 이 같은 현실에 시인은 분노가 솟구친다. 그래서 시인은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에 “다시 금남로에 서다”라는 제목을 붙여 진행 중인 5.18을 불러낸 것이리라.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책무요 소명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냥 쌓이는 것이 아니다
겨울 산의 주인은 바람
겨울바람의 눈을 피해
내리면 먼저 납작 엎드리고
더 낮은 곳으로 재빨리 찾아들어야 한다
바람이 눈을 뜨기 전에 나뭇가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벗기려는 자와 덮으려는 자
칼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시퍼런 겨울바람 앞에도
두려운 기색 없이 하얀 웃음으로 맞서야 한다
소리 내지 않고
새벽을 틈타
칼끝보다 더 날카로운 하얀 빛의 절정이 되어야 한다
어둠을 찢고 터져 나오는 여명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져야 견디는 겨울 공화국에서
새잎이 터져 나올 수 있게 온몸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깃털처럼 가볍게 내리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야 한다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가지 위에 가랑잎 위에
하얗게
「상고대」
발 딛고 선 현실을 겨울 공화국이라 인식하는 데서 시적 화자의 자세는 결정된다. “벗기려는 자와 덮으려는 자/ 칼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시퍼런 겨울바람”이 겨울 공화국을 군림하고 있다. 시인은 여기에 맞서는 방식에 대하여 말한다. 폭압적 현실에 맞서는 것은 칼을 드는 방식이 아니다. 마치 김수영의 ‘풀’처럼 바람보다 먼저 누워야 한다. “먼저 납작 엎드리고/ 더 낮은 곳으로 재빨리 찾아들어야 한다.” “바람이 눈을 뜨기 전에 나뭇가지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빨을 드러내고 적의를 드러내는 대신 두려운 기색 없이 하얀 웃음으로 맞서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하고 나약한 가지와 가랑잎 위에 “깃털처럼 가볍게 내리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야 한다.” 상고대란 공기 중에 습기가 갑자기 차가운 바람을 만나 나뭇가지에 눈꽃처럼 하얗고 아름답게 맺히는 것을 말한다. 상고대는 폭압적 현실에 저항하는 시인의 은유다.
시인의 저항과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은 때론 풍자로 때론 은유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자본의 야수적 속성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폭압적이고 기만적인 정치 권력뿐만 아니라 허위와 가식에 찬 세태, 영혼이 소거된 문명비판까지 그 영역은 다양하다.
진영역을 지나며 진영정치를 떠올리면서 서로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진영정치를 무겁지 않은 언어유희로 비판한달지(「진영」), 20세기에나 있을 법한 연탄가스 중독 사망 뉴스가 반복되어도 연민이나 사랑이 소거된 세태를 풍자한다.(「11시 11분」) 친구의 죽음 앞에서 “가야 하나 조의만 표할까” 고민하는 소시민적 이해타산을 풍자하기도 한다.(죽음이 오는 방식) 긴밀한 유대나 소통 없이 집에서도 각자 따로 도는 포노사피엔스의 동행방식을 안타까워하고(「유튜브」), 자유라는 이름으로 표피적인 관계 속에서 영혼 없는 사랑을 나누고 삶을 임기응변하는 세태를 풍자한다.(「포스트잇」) 가상세계로 대체된 현실 세계의 허구성을 풍자한다.(「뉴로링크」) “쇳밥을 먹는 사람은/ 쇠똥을 누고/ 눈에도 손에도 쇠가 자라는데/ 씻을 힘 없어 누운 연립주택/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금이 간 얼굴”(「쇳밥」), 용접 노동자의 일상을 아프게 그려내기도 한다.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죽을 만큼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저항하고 비판하며 풍자한다. 그것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시인이 숨 쉬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연민하며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올곧음을 지향하는 시인의 시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세상이 저항의 언어마저 낚아채 갔을 때도/ 아침이면 새가 지저귀고/ 다람쥐는 목을 축이듯/ 시인은 떠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떠드는 일은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 혀가 뽑히면 손톱으로라 벽이라도 긁어야 한다”며 “침묵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진단한다. 시인은 불의를 불의라 떠들어야 하는 존재이며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운명을 가진 자이다. 옳지 못한 것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고 시인은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시인은 “죽어서도 외쳐야 한다.”(「반항」)
4.
나는 하늘도 업신여기는 시인
단단한 뿌리로 담벼락 움켜잡고 벽화를
동백나무 칭칭 감아 붉은 생각 읽어 들이며
바늘구멍만 있어도
담 밖으로 뻗어나가 담쟁이 마음 순식간에 빼앗는다
잘리면 잘릴수록 더 빨리 자라고
더 깊고 더 넓게 뿌리를 뻗으며
악착같이 담장에 쓰는 일기
검붉은 시로 피어날지니
달아나는 문장을 쫓아 새벽까지 잠 못 들고
여백이 있으면 끊임없이 써나갈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
용서하라
담 밖으로 떨어지는 주홍빛 최후를
「혈서」
시인은 치명적 병고를 겪으며 미구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생물학적 종언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과정을 시로써 보여주었다. 시 한 편 한 편이 들뜨거나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고 허허롭게,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혈서를 쓰듯 핍진하게 써내려갔다. 시인은 단단한 뿌리로, 벽을 움켜쥐고 꽃의 영혼을 읽어들이는 담쟁이덩굴처럼 “잘리면 잘릴수록 더 빨리 자라고/ 더 깊고 더 넓게 뿌리를 뻗으며/ 악착같이” 삶과 시를 살아왔다. 스스로를 “하늘도 업신여기는 시인”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세상의 갖은 질곡과 고통을 시로써 헤쳐나왔고 건강한 비판의식으로 우리 사회와 역사의 병폐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이 시집에 실린 한 편 한 편 시들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포즈나 제스처가 아닌 순도 높은 시혼이 담겨있는 혈서와 같은 것이다. “달아나는 문장을 쫓아 새벽까지 잠 못 들고/ 여백이 있으면 끊임없이” 시를 쓰는 시인의 운명을 살아왔으니 “담 밖으로 떨어진다 하여도” 끝까지 시인으로서 명예롭고 그 마지막은 주홍빛으로 아름다우며 장렬하다 아니 할 수 없겠다. 시인도 시도 용서할 게 없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래도 잠시 쉬어가면 안 되겠니
겨울이 다가오는데
나는 색깔 한번 가진 적이 없구나
너는 활짝 피우렴
자주색이든 분홍색이든
한 번쯤 너의 색깔로 세상을 덮어보렴
하회탈 같은 미소와
하늘하늘한 손짓으로
많은 사람들의 배경이 되어주렴
사랑은 손에 쥔 물 같은 것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잡으려 하지 말고 떠나보내렴
밟히고 꺾이는 거 두려워하지 말고
밤에 내리는 이슬을 가까이 하렴
힘들고 외로우면
가을 밤하늘
제일 멀리 있는 별을 사랑하렴
가장 좋은 꿈은
꿈꾸지 않는 거라는데
네게 너무 큰 꿈을 얘기한 건 아닌지
「핑크뮬리」
자녀에게인지, 사랑하는 모든이에겐지 자분자분 당부하는 투로 씌어진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을 옮기며 해설을 마무리할까 한다. 기실 시인의 시는 난해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필요하지 않은 말장난이 없다. 겸허한 표현을 즐기며 맑고 따뜻한 시심을 담고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보이는 연민과 애정은 시인의 인간적인 시인으로 특징 지워 주는 주요한 부분이다. 때론 시인을 “쓰러뜨리기도 하고 일으켜 세우기도 했던 헛헛한 시어”는(「시집과 감귤」) 시집 속에 담겨 그리고 뒤에 남은 이들의 가슴에 별처럼 빛날 것이다.
목차
1부
비를 켜다
골디락스 존
구토
끄자
누리예수님
반항
비를 켜다
십자가 아래서
오르골
오컴의 면도날
이것은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이혼
일방통행
제임스 웹
토리노의 말
투표
2부
용실호텔
11시 11분
광명을 지나며
다시 금남로에 서다
뚜껑
반동
상고대
손수건
쇳밥
용실호텔
중독
진영
카스트 외전
코알라
피에로 다리
하느님도 배달의 민족을 사랑하신다
회개
3부
죽음이 오는 방식
개미귀신
구 회 말
꽃의 비명
낙법
누름돌
리클라이너
세라믹 나이프
속도의 이면
와인 래그
와치 와인더
유튜브
죽음이 오는 방식
진인사대천명
포스트잇
핑크뮬리
4부
대기표를 들고
고드름
꿈틀거리다
뉴로링크
대기표를 들고
물속의 집
밤을 지우다
서로 사랑하여라
선잠
소바와 냉면
스틸녹스
시집과 감귤
신세계
차가운 말만해요
혈서
시집해설_복효근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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