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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251
· 쪽수 : 422쪽
· 출판일 : 2023-09-27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단편소설
낯선 시간 위에서
후에에는 눈이 내린다
베트남의 혼령
이양선異樣船
승계
물
골패
임진강
어머니의 눈썹 문신
■중편소설
空과 色의 그림자
호아글레이^호아글레이
저자소개
책속에서
구찌 터널의 숲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 위로 저녁놀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와 김시운을 깔아뭉개고 저 멀리 달아나고 있다. 그는 사선 아래 모래밭에 피투성이로 으깨져 누워있다. 아, 거기에 내가, 데이빗이 또한 피투성이로 누워있다. 그러자 문득, 이 낯선 여행길을 언젠가 내가 똑같은 모습으로 지나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버스와 승객들도 그때의 그 사람들로 신기하게 낯이 익었다. 그때 김시운의 자살도 내 눈으로 보았었고 이제야 동일한 장면이 현실로 재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시감, 버스에 앉아 구찌의 저녁놀을 보는 내 모습도 과거에 보았던 기억의 재현이었다.
이 낯선 시간이 전혀 낯설지 않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낯선 시간 위에서」)
한 주일을 치른 화마이 데불람 작전 이후,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은 중대는 기진맥진하고, 침울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장태산의 증세는 더욱 심했다. 대개 점심식사는 상황실에 모여 장교들끼리 하건만 장태산은 전령을 통해 몸이 불편하다는 전갈 한마디를 던지고 며칠째 상황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대에서 날아오는 정보나 잠복초의 배치 문제로 그를 부르면 그는 마지못한 듯 상황실로 왔는데, 권총탄띠나 철모도 없고 정글화는 끈을 매지 않고 질질 끌고 있었다. 그의 눈은 암울하게 희번덕거렸고, 볼은 꺼졌고, 입술은 꺼멓게 말라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맑고 선홍빛이 돌던 피부는 어디로 갔는가. 그의 얼굴은 잿빛 어둠이 깔려 칙칙해 보였다.(「후에에는 눈이 내린다」)
본관 계단을 내려서며 문과대학 쪽을 쳐다보았다. 녹물 흘러내린 갈색 석벽에 앙상한 담쟁이 줄기가 깡마른 늙은이의 혈관처럼 불거져 늘어붙어 있다. 그 지하실, 과 연구실에 모여 문예사조를 정리한다고 졸라의 ‘목로주점’을 가지고 끝도 없을 듯 언성을 높여 토론하던 기억이 났다. 어둠이 내리고, 추위와 허기에 쫓겨 껌껌한 복도를 걸어 나올 때의 구두 발짝 소리의 울림, 달콤하게 느껴지던 피곤과 무언가 학문적 형체가 잡혀가고 있다는 즐거움, 교정을 일시에 바닷속의 신비로 몰아넣던 푸른 달빛……. 이런 감상적 분위기를 왈칵 뒤집으며 대장 격인 김일근 선배는 늘 소리 높여 고함질렀다. “배고픈 드라큘라들아! 오늘은 무얼 잡아먹는다? 생과부년? 생피 뚝뚝 흘리는 아다라시?” 그리곤 곧장 빈대떡집으로 가 막걸리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뿔뿔이 흩어졌었다.(「이양선異樣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