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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91192913827
· 쪽수 : 456쪽
· 출판일 : 2024-05-10
책 소개
목차
머리말
1장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 한국 최초의 간호사들
2장 박자혜: 궁녀, 간호부, 산파, 그리고 독립운동가
3장 정종명: 가장 유명한 산파이자 최초의 여성 공산당원
4장 한신광: ‘간호부’를 알린 모자보건사업의 개척자
5장 이금전: 최초의 간호유학생이 걸어간 지도자의 길
6장 조귀례: 대한민국 제1기 간호장교
7장 박명자: 실무, 행정, 교육을 넘나든 봉사자
8장 박정호: 비판적 사고, 연구, 실무 발전의 연결
9장 이순남: 자기 성장과 함께한 보건간호 40년
맺음말
주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1장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
1876년 개항 이후, 다양한 외국인이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중 일본인이 가장 많았으며,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호주 등에서 온 서양인도 있었다. 외교관이 아닌 서양인은 대개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입국했지만 조선 정부에서는 직접적인 선교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다. 선교의 목적으로 입국한 서양인은 대신 의료사업을 통해 한국인과 조선 정부의 호감을 얻고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남녀 간에 내외하는 문화와 생전 처음 보는 서양인에 대한 거부감이 겹쳐 남성 서양인 의사가 여성 한국인 환자를 치료하기가 특히 어려웠다.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서는 서울에 여성 전용 병원을 운영하기로 하고, 1887년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62~1930)를 파견했다. 하워드는 서울에 도착해 정동의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 환자를 보다가 곧 한옥 건물을 이용하여 여성병원을 시작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이 병원에 ‘보구여관’, 즉 여성을 편안하게 치료해주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을 내려서 격려했다.
2장 박자혜
기사 중에 “간판은 비록 산파의 직업이 있는 것을 말하나 기실은 아무 쓸 데가 없는 물건으로 요사이에는 그도 운수가 갔는지 산파가 원체 많은 관계인지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는 일이 없어 돈을 벌어보기는커녕 간판 붙여 놓은 것이 도리어 남부끄러울 지경”이라는 문장이 있다. 정말 여기에 쓰인 대로 산파가 많아서 박자혜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까?
전근대 조선에서 출산은 주변 여성들의 도움을 받아 치르는 여성의 일이었다. (…) 개항 이후 분만이 무사히 이루어져 인구가 증가해야 부국강병해지므로 출산을 돕는 산파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어졌고, 1910년에는 사립 조산부양성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산파제도를 시작했는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일본인 산파의 수도 늘어났다. 정상분만의 경우 산파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경향은 여전히 있었지만, 출산 자체가 많았고 난산도 많았던 만큼 산파에 대한 수요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7장 박명자
박명자는 1956년 3월 31일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전역하고 곧바로 4월 1일 자로 서울대학교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병원에 출근해 보니 2개 수술실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군에서 선진 의학지식과 의료기술을 익힌 박명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관행이 유지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환자 가족이 수술실에 들어와 수술을 참관하는 것이 허용될 뿐 아니라, 평상복과 신던 신발 그대로 수술실에 들어올 정도로 무균술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박명자는 무균술을 준수하기 위해 환자 가족이 참관할 때에는 수술 가운을 착용하고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술 환자의 회복을 위해 별도의 회복실이 운영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표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 수술과 회복에 중요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었다. 박명자는 자비로 참관인용 신발을 사다 놓고 갈아 신도록 하는 등 무균술 시행을 확대하고자 했고, “수술실 옆의 창고 같은 방을 청소하고 침대와 이불을” 마련하고 “그곳에 환자를 눕혀놓고 회복을” 기다리는 회복실을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