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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3135259
· 쪽수 : 316쪽
· 출판일 : 2024-10-30
책 소개
목차
제1장 벼랑 끝에 서서
미워도 다시 한번 · 정진형
아기가 향수를 먹었어요 · 유은혜
심장이 뛴다 · 유새빛
애기, 엄마 · 이수영
폐경 유감有感 · 박천숙
확률과 선택 · 조동현
각자의 파란만장 · 이동준
벼랑 끝에 서서 · 박관석
제2장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마지막 재회 · 이도홍
거북이의 눈물 · 채명석
마지막 소원 · 박관석
사망진단서 · 문윤수
운명의 무게, 430g · 허지만
언제든, 어디에서든 · 우샛별
창밖에 핀 여름꽃은 당신인가요? · 안상현
평안입니다 · 강준원
제3장 당신이 하루 더 살 수만 있다면
유방암 환자의 군가 · 최상림
뽀뽀를 하재요 · 김기경
회색,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하여 · 한언철
엄마의 눈물 · 이수영
철을 깎는 파도 · 이진환
우리들의 블루스 · 구본대
말 한마디의 무게 · 정다정
밤 인사 · 박지욱
Que Sera, Sera케세라세라 · 장준호
제4장 내 삶의 하루를 나누어드립니다
법으로 막을 수 없는 것 · 최세훈
어떤 인연 · 이영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기적, 뇌사자 장기기증 · 박성광
의사 생활하면서 정신이 번쩍 든 순간 · 유정주
불확실성 견디기 · 김준기
한 뼘의 벽을 사이에 두고 · 이한준
죽음을 맞이하는 의사라는 직업 · 김연수
제5장 다시 환자 곁으로
내 어린 고양이 유자 · 박진선
국경 없는 마을 · 유인철
평양 일기 · 김창근
반찬통과 테트리스 · 성혜윤
철심鐵心 의사 분투기 · 문성호
구멍 뚫린 날 · 박희철
수술방의 온도 · 박천숙
그녀의 신발 · 유새빛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 박미희
너의 가족이 되어줄게 · 이신애
한미수필문학상 심사평 & 소개
· 제21회 한미수필문학상 심사평
· 제22회 한미수필문학상 심사평
· 제23회 한미수필문학상 심사평
· 심사위원 소개
· 한미수필문학상 제정 취지 및 선정 방법
· 수상작
책속에서
백신 부작용으로 입원을 경험했지만 부스터 샷을 신청했고, 밀접 접촉자로 격리되어 회복된 후에도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온몸을 덮은 땀띠를 두꺼운 방호복 속에 감춘 채, 벼랑 끝에 깊게 뿌리내린 한 그루 나무처럼 굳건히 버텨냈다. 누군가에게 희망의 열매를 건네줄 수 있기에, 또 ‘벼랑 끝에 서서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앉았을 때조차도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세상 쪽으로 한 발자국 끌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진실 하나를 믿기 때문에. 어둠과 고통의 이 시간도 언젠간 지나가겠지. 아니, 살면서 다시 벼랑 끝에 설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때마다 오늘을, 기쁨에 울던 아기 엄마의 눈물을, 또 어느 벼랑 끝에 서 있을지 모를 나무 한 그루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일어나 힘껏 손을 내밀 것이다. 포기하고 주저앉아 일어설 힘조차 없는, 벼랑 끝에 선 모든 내 환자들에게.
“끼잉―” 갓 태어난 포유동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산모가 이걸 들었을까. 괜히 들어서 그녀의 가슴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싶어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반응을 살짝 살폈으나 알 수 없었다. 태아는 이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 울음소리가 세상에 나온 태아의 첫인사이자 유언이었다. 이름 없는 존재로 몇 초뿐이긴 했지만, 그것도 ‘인생’이었음을 말하는. 난 태아를 포로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 위로 손을 올려 잠시 토닥토닥하며 마음속으로 유언에 답했다. ‘고생 많았는데 미안…해……. 잘 자렴, 아가…….’ 그날 밤, 일정을 마치고 병원을 나가는 길에 산모의 남편과 마주쳤다. 걸어오던 그의 표정이 허망한 듯 씁쓸해 보였다고 생각하는 건 단지 내 기분의 투사일 뿐일까. 그는 나를 보고는 응급실에서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지 멋쩍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였다. 나도 “고생많으셨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어디 가시는 길인지 여쭤보았다. 그는 장례식장이라고 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보니 그의 옆에 서 있는 병원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직원은 보자기에 싸인 작은 상자 하나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무게는 분명 430g일 것이다. 생도 신고하지 못했는데 죽음을 신고한다는 건 시작이 없는 끝처럼 무언가 결여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트에도 기록되지 않는 태아의 인생은 어디에 보관해야 알맞은 것일까. 적어도 그와 나의 인연만큼은 덜어내어 가슴속에 담아 두기로 했다.
환자들에게 명확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의사여야 하지만 정작 회색, 그 모호한 경계에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 그 경계에서 나의 판단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그렇게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놓치기도 한다. 이 회색의 공간은 내가 의사라는 업을 놓을 때까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회색의 공간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의료진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절대적인 답은 없다는 것이다. 한낱 인간인 의사가 내린 판단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의 판단이 더 맞기를 바라고, 더 옳고 바른 방향이기를 바라며,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길이기를 바란다. 그런 간절한 바람을 갖고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하며 동고동락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명확한 경계가 뚜렷하게 보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회색, 그 모호한 경계를 두드리며 오늘도 나는 환자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