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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4087946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25-12-17
책 소개
―오랜 침묵 끝에 세상에 다시 건네는 말들
시대의 욕망과 윤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날카롭고 단단한 질문을 던져온 기자 박선영. 「도라에몽은 울지 않는다」, 「약자가 약자를 혐오할 때」, 「따뜻한 개천으로 내려오든가」 등, 시민이기에 지켜야 하는 최저선을 끈질기게 상기시키면서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마음들을 사려 깊게 돌아보며 힘 있게 직진하는 그의 칼럼들은 공개될 때마다 빠르게 공유되며 ‘박선영’이라는 이름을 신뢰의 바이라인으로 각인시켰다. 냉철한 현실 인식과 뜨겁게 타오르는 결기로 치열하게 세상을 향해 발신하던 그가 오랜 시간 몸담았던 《한국일보》를 떠날 때 수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토로한 이유다. 그로부터 7년, 어디에도 글을 쓰지 않은 침묵의 끝에서 그가 다시 세상을 향해 말을 건넨다.
박선영의 첫 에세이 『그저 하루치의 낙담』은 전직 기자로서의 회한, 인간으로서의 비애, 시민으로서의 윤리가 교차하는 내면의 기록이다. 언론이라는 현장을 떠나 삶의 한복판으로 깊숙이 들어간 그는 속보도 마감도 독촉도 없는 무용한 시간 속에서 낙담과 희망, 욕망과 윤리,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끝내 떨치지 못한 화두들을 마주한다. 우리가 품었던 꿈과 저지른 실패에 대하여, 우리를 더 현명하게 만드는 세계의 비참과 슬픔에 대하여, 필연적인 패배 앞에서 아름답게 몰락하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 그리고 다만 인간으로서 조금은 숭고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자리에서 시작된 고백이되 자기연민에 그치지 않는 이 글들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각, 그리고 언제나 뜨거운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것이었던 그의 문장에 수많은 독자들이 열광한 이유를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이며, 빠른 판단과 즉각적인 반응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대에 더더욱 빛을 발하는 느리고 단단한 사유의 힘을 새롭게 확인시킨다.
나의 슬픔이 세계와 만날 때
―한 사람의 낙담이 보편의 질문이 되기까지
기자라는 직업을 내려놓고 한 인간으로 돌아온 저자는 분초를 다투는 저널리즘의 현안들에 밀려 제쳐놓았던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들여다본다. 이제는 어떤 입장도 대변할 필요 없는 자리에서 낙담과 회한, 상실과 연민의 이야기들을 찬찬히 살피는 시선은 점차 타인과 사회, 세계로 확장되고, 낙담은 침잠의 시작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되는 움직임의 첫걸음이 된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편의 질문으로 나아가는 이 책의 궤적은, 그를 기자로 만들었고 수많은 독자들이 뜨겁게 반응했던 성찰의 밀도와 필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1부 「기자라서 좋았고, 기자라서 슬펐다」에서 저자는 평생 가진 단 하나의 직업인 기자로 지냈던 17년의 시간을 정직하게 돌아본다. 너무도 중요해서 잘해내고 싶지만 언론이라는 윤리상품에 내재된 모순에 무릎이 꺾이던 순간, 여전히 현장에서 분투하는 동료들을 향한 애틋함과 존경심, 사랑했지만 결국 떠나온 세계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이 펼쳐진다. 2부 「내 슬픔의 레퍼런스」에서는 기쁨과 환희보다 슬픔에 이끌리는 인간인 자신을 통과한 여린 감정들을 응시한다. 피아노 교습소의 아이들을 바라보다 불현듯 떠오르는 어린 날의 가난, 햇살 같은 사랑을 주던 아이가 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불쑥불쑥 솟아나는 자기연민 앞에서 마주하는 당혹감과 자괴감. ‘구제불능의 낙담가’인 저자는 그럼에도 ‘지독한 염세의 늪’에 머무는 대신 그 감정들을 디딤돌 삼아 ‘더 슬프고 더 현명한’ 인간의 자리로 나아가고, 마침내 3부 「타인에 대한 예의」에서는 시선이 본격적으로 바깥을 향하며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윤리를 묻는다. 고통의 영토에서 발을 뺀 자에게 고통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타인의 불행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웃음과 농담은 언제나 옳은가. 자신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들은 삶의 비참과 슬픔이 어떻게 공적인 고민으로, 사회적 책임과 윤리감각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보여주며 우리가 어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한다.
나는 어떤 인간으로 남고 싶은가
―낙담 이후를 견디게 하는 오래된 가치들
숭고, 윤리, 순정, 우직, 신의, 성실, 권선징악, 인과응보. 누구나 한 번쯤 품었지만 너무 무거워 멀리 밀어놓고 더는 입에 올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저자는 이 오래된 단어들을 꺼내들고 그 가치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범속한 현실 속에서도 저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드는 마음이 우리 안에 남아 있음을 상기시킨다. 4부 「숭고를 향하는 인간들」은 회한과 실패, 자기연민을 딛고 다시 살아가려는, 끝내 숭고를 꿈꾸는 인간들의 고투에 집중한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살 것 같은 마음’으로 흔들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이들이 회피와 망설임 끝에 무릎을 세워 다시 일어나는 순간들. 헤밍웨이가 평론가들의 사형 선고를 받고도 위대한 작품을 써냈고,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의 참혹 가운데서도 존엄을 지키기 위해 몸가짐을 정결하게 했듯이 고통 속에서도 인간됨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의 사투는 낡고 진부하게 여겨지는 가치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패배 이후에도 다시 몸을 일으켜 쓰고 말하고 사랑하려는 인간들의 고집은 마침내 우리에게도 하나의 질문을 돌려준다. 나는 어떤 인간으로 남고 싶은가.
기자라는 직업을 사랑해서 낙담했던 저자는 도처에서 슬픔을 마주하며 또다시 낙담하지만, 그것은 아직 자신의 삶과 세계를 단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많은 것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낙담은 삶과 세계를 다시 바라보고, 다시 쓰고, 다시 말하게 하며, 슬픔은 인간을 더 현명한 존재로 만든다. 그저 하루치의 낙담을 하고 다음 날을 다시 견디게 하는 작지만 분명한 희망, 인간과 세계에 대한 믿음의 조각들이 어떻게 지켜지는지 우리는 이 책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렇게 저자는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울 일이 많지만, 슬픔이 우리를 더 현명한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인간은 잘 살고 싶어서 비관하고, 낙담한다는 것은 결국 생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목차
프롤로그 | 도망치기, 숨기, 낙담하기
1부 | 기자라서 좋았고, 기자여서 슬펐다
찰리 스키너 국장을 기리며
우리가 우직했던 순간들
하지 않은 일들, 하지 않은 말들
언니들의 어깨
우리가 멀어져갈 때
2부 | 내 슬픔의 레퍼런스
슬픔 수집가
내가 가여울 땐 「엘리제를 위하여」
용기의 장르들
기타교습소에서 배운 것
투 머치 러브
3부 | 타인에 대한 예의
고통의 속지주의
올드머니와 위대한 유산
타인의 불행에 대한 예의
클로저
웃을 일이 아니다
4부 | 숭고를 향하는 인간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
헤밍웨이의 트렁크
지긋지긋한 것은 힘이 세다
목욕하는 인간
에필로그 | 최초의 혀
주
참고자료
저자소개
책속에서

‘낙담: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몹시 상함.’ 떨어질 落에 쓸개 膽을 쓴다. 쓸개가 떨어지는 기분. 사막의 낙타가 흘리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어떤 뜨듯하고 축축한 액상의 정서가 이 단어에는 배어 있다. [낙땀]. 비슷한 뜻을 지닌 그 모든 단어들 중에서 낙담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럽고 대견한 단어다. 시무룩한 얼굴과 축 처진 어깨, 저무는 석양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고개를 한 채, 떨어진 쓸개를 주워담으며 하는 말. 에이, 다시 한번 해보자. 쓸개를 떨어뜨린 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단어에서 풍기는 한시성은 마음껏 낙담하도록 거대한 자유를 준다. 작은 일을 도모하며 작게 실패한 사람이 금세 딛고 일어나 다시 이뤄낼 그 작은 무언가를, 낙담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상상한다. [……] 나는 절망하지도 않았고, 비관하지도 않았고, 체념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치의 낙담을 하고, 다음 날이면 다시 하루치의 작은 기대를 품으며 사소하고 한심한 일들을 계속한다.
회한은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 바닥에서 잘해낼 자신이 없으니까. 나는 정말 이 말 많은 세계에 질려버렸으니까. 그런데 「뉴스룸」 시즌 2의 시그널이 나오는 인트로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클로즈업된 어느 기자의 손이 형광펜으로 조간신문에 슥슥슥 줄을 치는 찰나의 장면. 피트니스 센터의 사이클 위에 앉아 그 장면을 돌리고 또 돌려 봤다. 남들은 무슨 기사를 썼나, 혹시 물먹은 건 없나(역시 있군!) 출근하자마자 조간신문들을 펼쳐놓고 빠르게 읽어내던 시간. 손가락으로 행갈이를 하면서 미간을 찌푸리던 시간들이 내게도 있었지. 세상의 급류에 몸을 담그고 바짝 긴장한 채 물살을 가르며 헤쳐나가던 그 시간. 이제는 내게 없을 그 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