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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3612040
· 쪽수 : 263쪽
· 출판일 : 2024-08-01
책 소개
목차
푸른 마그마 _ 009
신의 날 _ 046
사로잡힌 영혼 _ 071
불멸 - 107
내 마음에 사랑이 _ 134
나비 여행 _ 165
니비루를 위하여(중편) _ 202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파란 수의를 입은 수형자들의 교정을 맡은 교정위원이다. 인생의 온갖 풍상을 겪은 수인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돌에 새기고 싶지만 크나큰 은혜는 고사하고 한 줌의 은혜조차 받아보지 못한 그들을 생각하노라면 마음이 설핏 저려온다. 세상에서 받은 냉대, 억울함과 차별대우와 아픔… 그 모든 것을 한으로 삼아 돌에 깊게 새기고 때가 되면 남김없이 갚아 주리라 마음속 칼날을 갈았을 그들. 흉악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많은 이들이 날선 비난과 저주를 쏟아낸다. 몇 년간 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며 나는 범죄자들 역시 모습이 다른 또 하나의 피해자임을 알게 되었다.
수인들을 면담하며 그들이 고통스런 수감생활 속에서 희망을 놓지 않도록 돕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A목사로부터 부탁을 전해 들었다. 종교분과 교정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A가 남편을 독살한 여죄수를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A는 중국에 세운 개척교회에 긴급한 일이 생겨 한동안 중국에 나가 있어야 한다며 여죄수를 꼭 접견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 목사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그 요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여죄수는 교정위원의 면담을 거부하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면담하겠다고 했단다. 그 죄수는 남편을 독살하고 시신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웃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텔레비전에서 현장검증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남편을 살해하고 무기형을 선고받은 한 여인을 처음 접견하는 날, 교정 생활에 어느덧 이력이 붙은 나였으나 왠지 긴장되었다. 서울 구치소에 도착해 접견신청서를 쓰고 한참 동안 기다렸다. 사회의 어둡고 절망적인 곳에서 생활했을 그 죄수를 생각하며 몇 날 동안 전심을 다 해 기도를 드렸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며 행복과 불행이 부지불식간 넘나드는 세상살이. 그 죄수는 온갖 풍상을 겪으며 석고가 굳듯 마음이 딱딱하게 굳었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가족을 내팽개치고 야반도주라도 했다면 남편을 죽이는 천인공노할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색이 희미해졌지만, 전혀 쇠하지 않은 그녀의 절망감이 가을바람마냥 내 마음을 건드렸다.
‘칸의 학정이 지속되는 동안 현인들과 지성을 갖춘 학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 엔키두란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우라쉬는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현인들을 만났으나 그들로부터 얻은 것이라곤 실망뿐이었다. 그는 시름에 잠겨 있다가 충직한 부하가 죽어간다는 보고를 듣고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부하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한 후 여행길에 올랐다. 살덩이가 녹아내릴 듯 맹렬한 열기를 뿜어대는 태양빛이 칼날처럼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새벽녘 어스름이 안개마냥 희뿌옇게 보일 때 성문을 빠져 나왔으나 햇빛을 피할 보호처가 보이지 않아 바삐 이중 천막을 칠 수밖에 없었다. 열기를 피하고 있는데 멀리 나무 밑에 쓰러진 사람의 형체를 본 수하들이 웅성거렸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우라쉬를 일으켰다. 눈을 보호하는 안경이 달린 투구처럼 보이는 모자를 덮어쓰고 한걸음에 달려 그 사람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천막으로 들어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발목까지 내려온 장삼 차림의 남자가 입술을 달싹거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다. 수하에게 물을 먹이라고 한 뒤 눈을 감고 있는 보고의 귀에 부하들의 경악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간 부하의 눈에 더러운 피부를 한 남자가 들어오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서너 발자국 물러서며 탄식하는 소리. 저건 피부암이 생긴 거야…… 핏물이 질질 흐르는 모양이 죽어가던 동네 사람과 똑 같아… 오존층이 파괴돼 지구인의 대다수가 멸절된 뒤 강인한 유전자를 가진 몇 종족만이 살아남았다. 지도자는 어떤 힘에 붙들린 듯 몸이 사시나무마냥 떨려왔지만, 이를 악문 채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핏물과 진물이 흐르는 상처부위가 보였다. 얼굴 가득 거무튀튀한 반점이 퍼져있는 남자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먹을 걸 주세요. 자비를… 베푸소서. 비상식량을 물에 개어 남자의 입에 넣어주길 몇 차례 반복했다. 음식과 물을 먹은 남자가 정신을 차린 듯 일어나 앉았다. 남자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본 부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육십 평생 사는 동안 깨달은 것이 있소. 속삭이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다음엔 크게 외쳐야 하는 법이요. 단꿈에 취한 기득권자들은 하층민의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인 적 한 번도 없다오. 그래서 갈등과 전쟁이 끝없이 일어나는 것 같소.”
사람은 차별당하면서 자신이 차별받는 걸 전혀 못 느낄 거에요. 중얼거리는 제인에게 힐끔 눈길을 주며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해 준다. 그 순간 무거운 짐을 진 채 일생을 산 여인들이 떠올라 대화를 이어나간다.
“여성들은 직업이 있거나 전업주부이거나 여성에게 짐 지워진 가사노동을 자연스럽게 감당해야 했소. 돌봄 노동, 곧 노인이나 병자를 간병하는 일 역시 예부터 여성의 몫이었다오. 시대가 바뀌어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고 온 여성들이 옛날과 똑같이 가사노동을 강요받는다면 그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거요.”
제인이 내 말을 받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불쌍한 ‘패니’가 생각나요. 패니는 부유한 친척의 대저택으로 옮겨 온갖 실수를 저지르지요. 패니는 난로가 없는 방에서 끔찍한 겨울을 지냈어요. 그녀는 불우한 처지를 불평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옳게 살려고 무척 애썼거든요.”
‘맨스필드 파크’에 나오는 내용 같은데, 내가 아는 체하며 그녀의 말허리를 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