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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희곡 > 외국희곡
· ISBN : 9791194232193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5-09-10
책 소개
목차
지는 모두
크래프의 마지막 테이프
불씨
말과 음악
재생
필름
오고 가고
응 조
숨
나 아닌
그때
발길
유령 삼중주
…다만 구름…
독백 한 편
흔들노래
오하이오 즉흥
사방
나흐트 운트 트로이메
부록 I / 단편극의 출간, 공연과 방송, 번역에 대해 / 이예원
부록 II / 돌들: 부동하는 작은 점들의 세계 / 김두리
작가 연보
작품 연표
책속에서
바람이 거세지네요. [사이. 바람 소리.]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도 이제 지났어요. [사이. 바람 소리. 꿈꾸듯.]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해 오후 내내 계속 내릴 테죠. [배럴 씨, 간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거든 비구름이 걷히면서, 저무는 해가 한순간 반짝 빛을 내고는 이내 질 테지요, 저 언덕 너머로. [배럴 씨가 사라진 걸 깨닫는다.] 배럴 씨! 배럴 씨! [침묵.] 다들 내게서 멀어지려 들지. 다들 내게 다가오지, 내가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지난 일은 지난 일이란 듯이, 넘치는 친절함으로, 도와주지 못해 안달하며… [북받쳐]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다시 만났다고… 건강한 모습으로… [손수건.] 그에 난 마음에서 우러나온… 간단한 몇 마디… 그러고는 또… 혼자가 되지…. [손수건. 격하게.] 집 밖에 나오질 말아야지! 담장을 벗어나질 말아야지! [사이.] 아, 저기 피트란 여자가 보이네, 날 보고 인사나 건네려나. [피트 양이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소리. 피트 양,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피트 양! [피트 양, 멈춰 서며 흥얼거림을 그친다.] 내가 투명 인간이 됐나요, 피트 양? 이 크레톤 옷감이 내게 하도 잘 어울려서 아예 돌벽으로 녹아들어요? [피트 양, 계단을 한 칸 내려온다.] 그래야죠, 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때 여자였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지는 모두」)
[힘 있고 다소 거만한 목소리, 아주 오래전 크래프 본인의 목소리임이 분명하다.] 오늘로 서른아홉, 종소리 짱짱 -[보다 편안한 자세를 취하다가 탁자에서 상자를 하나 떨어뜨리고, 욕설을 내뱉고, 스위치를 끄고, 상자들과 장부를 바닥으로 들입다 쓸어 버리고, 테이프를 처음으로 되감고, 스위치를 켜고, 다시 자세를 취한다.] 오늘로 서른아홉, 종소리 짱짱하고, 내 이 오랜 결함만 아니면, 지적으로도 어느새 정점… [머뭇댄다.] …파도 꼭대기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충분한 근거가. 지겨운 당일은 요 몇 년간 해 온 대로 술집에서 조용히 보냈다. 아무도 없이. 난롯불 앞에 앉아 두 눈 감고 알갱이와 쭉정이를 갈랐다. 봉투 뒷면에 간간이 메모도 했다. 서재로 돌아와 헌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너무 좋군. 방금 바나나를 유감스럽게도 세 개 먹었고 네 개째 먹으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나 같은 질환을 가진 사람에게는 치명적이건만. [거칠게.] 다 쳐내! [사이.] 탁자 위에 조명을 새로 달았더니 한결 낫다. 어둠에 이리 온통 에워싸이니 혼자인 기분이 덜 든다. [사이.] 어떤 면에서는. [사이.] 일어나 어둠 속을 오가는 게 그렇게 좋고, 그러다 다시 돌아온다… [머뭇댄다.] …나로. [사이.] 크래프로.
[사이.]
알갱이라, 보자, 내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무슨 뜻으로… [머뭇댄다.] …아마도 한바탕 먼지구름이 잦아들고 났을 때 -나라는 먼지구름이 잦아들고 났을 때 손에 쥐고 있을 만한 것들을 말하는 걸 테지.
눈을 감고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상상해 본다.
[사이. 크래프, 잠시 두 눈을 감는다.]
(「크래프의 마지막 테이프」)
저기, 들어 봐! [사이.] 눈 감고 들어 봐, 저게 뭐 같아? [사이. 격하게.] 뚝뚝! 뚝뚝! [뚝뚝 떨어지는 소리, 급격히 증폭하다가, 돌연 끊긴다.] 다시! [다시 뚝뚝 소리. 증폭한다.] 아니! [뚝뚝 소리 끊긴다. 사이.] 아버지! [사이. 안달하며.] 이야기, 이야기, 해마다 수없이 지어내며, 비로소 내가 필요를 느낄 때까지, 누군가 내 옆에 있길, 누구든, 낯선 이라도 좋으니 말할 상대가, 그가 내 말을 듣는다고 상상하며, 그렇게 지내 온 세월만, 그랬는데, 이제는 기왕이면… 나를 알던 누군가, 오래전에, 누구든 좋으니, 나를 알던 이가 내 옆에 있길, 그가 내 말을 듣는다고 상상하며, 있는 이대로의 나, 지금의 내 옆에서. [사이.] 역시 부족해. [사이.] 역시 미달이야. [사이.] 다시 해 봐. [사이.] 흰 세상, 소리 하나 없고. [사이.]
(「불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