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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희곡 > 외국희곡
· ISBN : 9791194232193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5-09-10
책 소개
『단편극집 I』은 사뮈엘 베케트가 영어로 먼저 쓴 극작품 열아홉 편을 묶은 선집이다. 다양한 매체를 위해 쓰인 단편극들은 구성과 전개 방식 등이 저마다 각기 다른 형식으로 펼쳐진다. 이는 당연하게도 글이 변환되어 구현될 이후의 매체를 주요하게 염두에 둔 결과로 보인다. 베케트에게 극장,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등의 매체는 글의 다른 모습을 위한 도구나 장치를 넘어선 글의 대상 자체였고, 글과 함께, 글과 또 다른 각도에서 작품을 입체적인 존재로 만들어 가는 동등한 요소였다고 여겨진다.
베케트의 어느 작품에서든, 베케트와 번역이라는 문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특히 입말을 예정하는 대사와 상황과 동작을 지시하는 지문이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이루어 가는 극작품은 구어와 문어를 절묘하게 줄타기한다. 한국어판 『단편극집 I』에서, 장광설과 침묵을 오가며 수학적인 움직임으로 정교하게 조직된 베케트의 언어는 번역가 이예원의 섬세히 생동하는 한국어를 맞춰 입고 한국어 사용자들이 그간 알아 왔던 언어를 다시금 새롭게 인식하게끔 이끈다. 작품 번역에 뒤이어 번역가가 정리한 「단편극의 출간, 공연과 방송, 번역에 대해」는 베케트 작품의 궤적을 되짚으면서 변화하는 작품 세계와 한국어판 번역의 실마리를 조금씩 남겨 간다. 한편 사뮈엘 베케트 연구자·번역가 김두리는 글 「돌들: 부동하는 점들의 세계」에서 베케트의 극작품들을 분석하며 극 속 인물과 현실의 복잡성, 두개골로 형상화되는 ‘벗어날 수 없음’, 말이라는 행위의 변주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 인형과 같이 정확하게 움직이며 획득되는 우아함과 부동심, 대칭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특정한 구조와 철학적 문제, 움직임이 사라진 채 맺어지는 장면들을 “시각적 시”에 다다른 “돌 이야기”로 묶어 낸다.
들리는 것
극작품이라는 형식의 글을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나누어 바라볼 때, 베케트의 극은 달리 읽히는 면이 있다. 말과 음악과 소리는 ‘들리는 것’으로서 베케트의 극에서 주요하게 작용하며, ‘보이는 것’을 여러 방식으로 드러낸다.
소리와 불가분의 관계인 라디오를 위한 극 「지는 모두」에서,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혼잣말 내지 여담 같은 대사는 발을 끌며 걷는 소리와 동물 울음과 달구지 바퀴 소리와 자전거 종소리와 경적과 흥얼거림과 코 푸는 소리와 킥킥거림과 폭소와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등을 두루 거느리며 소리로 꽉 찬 극을 만들어 간다. 역시 라디오를 위해 쓰인 「불씨」의 인물은 몽돌 해변을 걸으며 바닷소리 위로 죽은 이에게 긴 혼잣말을 걸고, 이 혼잣말에 아내가 거는 말과 아이가 피아노와 승마를 박자 맞춰 연습하는 소리와 울음이 겹쳐진다. 라디오라는 매체를 분명히 의식한 듯 읽히는 이 작품들은 말과 약간의 음악을 여러 소리와 함께 들려준다. 이 극들에서 음악은 작은 요소로 쓰이며, (극의 내용과 연관한 해석과 별개로) 다양한 소리 중 하나로 들리게 된다.
한편 음악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이 있다. 라디오극 「말과 음악」의 ‘말’은 ‘음악’과 서로 견준다. ‘음악’은 음악 자신의 표현을 대사로 삼아 ‘말’과 대화한다. 이때 제3자 ‘골골’은 ‘말’을 ‘조’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말’과 ‘음악’을 등장인물의 자리에 확실히 위치시킨다. 3막으로 이루어진 텔레비전극 「유령 삼중주」는 통상 ‘유령’ 삼중주라 불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 5번」 2악장 ‘라르고’를 카메라의 움직임과 함께 극의 구조로 반영한다. 이 책을 닫는 작품인 텔레비전극 「나흐트 운트 트로이메」 역시 곡명을 극의 제목으로 삼은 경우로, 슈베르트의 리트 「밤과 꿈」 마지막 일곱 마디와 함께, 꿈꾸는 이가 곡을 읊조리고 흥얼거리는 것 외의 대사 없이 흘러간다. 이 라디오극과 텔레비전극에서 음악은 배경음악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음악은 등장인물이 되고, 대사가 되고, 구조가 되고, 주제나 주요한 흐름이 된다.
극 속에서, 베케트의 어떤 인물들은 말을 쏟아 낸다. 쏟아지는 이 말들은 듣는 이가 들은 말을 곱씹거나 거를 틈 없이 말을 덩어리로, 소리 자체로 받아들이게 한다. 일막극이자 일인극인 「크래프의 마지막 테이프」의 주인공은 오래전 테이프에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돌려 들으며 오늘의 녹음을 시작한다. 「재생」의 세 남녀는 회색 단지에 들어앉아 머리만 내민 채 번갈아, 다 함께 빠르게 말한다. 「응 조」에서 ‘조’에게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분출하는 말의 출구로서 입을 주목하게 하는 독백극 「나 아닌」과 문장부호를 벗어나 세 겹으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또 다른 독백극 「그때」, 제목처럼 한 편의 긴 독백으로 이어지는 「독백 한 편」, 흔들의자에 앉아 녹음된 제 목소리가 시처럼 흘러가는 양상을 듣는 「흔들노래」…. 덩어리진 말은 말을 소리로 체감하게 하면서, 말의 바깥을 바라보게 한다.
보이는 것
말의 바깥에 듣는 이가 있고, 움직이는 이가 있다. 이들이 보인다.
베케트의 극 속에서, ‘듣는 이’나 ‘청자’는 종종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오하이오 즉흥」에 등장하는 ‘듣는 이’와 ‘읽는 이’는 생김새가 닮도록 지시된다. 「크래프의 마지막 테이프」나 「흔들노래」에서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이들이나 「그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세 방향에서 듣고 있는 이를 연상시키는 이 모습을 통해, 극을 독자로서 읽게 되는 이와 관객으로서 듣게 되는 이가 이렇게 만난다고 읽힌다. 「나 아닌」의 끝없는 대사가 펼쳐지는 윗무대 아래, 있는 듯 없는 듯 아주 조금 움직이는 청자도 있다. 텔레비전극 「응 조」에서, 제목에 등장하는 인물 ‘조’는 자신에게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자다. 조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자기 방을 이렇게 저렇게 살피다가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부터는 자리에 앉아 거의 움직이지 않는데, 화면은 그 얼굴의 미세한 변화를 비춘다. 한편 텔레비전극 「…다만 구름…」은 제목이 빌린 예이츠의 시 구절을 향해 가면서 말하는 시늉을, 입놀림을 보여 준다.
이러한 ‘대사 있음’이 듣는 이나 읽는 이의 (주로 말을 둘러싼) 작은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면, ‘대사 없음’은 보다 명확한 움직임과 그에 따른 리듬을 때로 드러내 보인다. 텔레비전극 「사방」의 실연자 넷은 가운과 쓰개로 몸과 얼굴을 가린 채 정사각형 내부가 양 대각선으로 구획된 구역을 각자에게 주어진 경로로 규칙적으로 걸으며, 대사 대신 발소리와 함께 타악기 네 종류를 여러 조합으로 연주해 간다. ‘작은 극’ 「오고 가고」의 경우, 최소한으로 전개되는 절제된 대사가 세 인물의 손과 팔의 특정한 움직임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영화 각본 「필름」 역시 한 마디(“쉿!”)를 제외하고 대사 없이 흐르면서 카메라가 ‘눈’이 되어 ‘대상’인 인물의 동선과 움직임을 뒤쫓다가, ‘대상’의 눈에 다다라 비로소 멈춘다. “존재함은 지각됨”이며, “자각은 존재 내에서 지속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증명된다.
내가 나를 지각한다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움직임이 계속됨을 증명한다. 말의 바깥이라고 말하면서 말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베케트의 세계는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혹은 그 반대의 모순을 계속해서 실현한다. 이러한 운동성이 짐짓 굳어진 형태로 작품의 곳곳에 붙박여 있다. 들릴 수 있고, 보일 수 있으면서.
목차
지는 모두
크래프의 마지막 테이프
불씨
말과 음악
재생
필름
오고 가고
응 조
숨
나 아닌
그때
발길
유령 삼중주
…다만 구름…
독백 한 편
흔들노래
오하이오 즉흥
사방
나흐트 운트 트로이메
부록 I / 단편극의 출간, 공연과 방송, 번역에 대해 / 이예원
부록 II / 돌들: 부동하는 작은 점들의 세계 / 김두리
작가 연보
작품 연표
책속에서
바람이 거세지네요. [사이. 바람 소리.]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도 이제 지났어요. [사이. 바람 소리. 꿈꾸듯.]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해 오후 내내 계속 내릴 테죠. [배럴 씨, 간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거든 비구름이 걷히면서, 저무는 해가 한순간 반짝 빛을 내고는 이내 질 테지요, 저 언덕 너머로. [배럴 씨가 사라진 걸 깨닫는다.] 배럴 씨! 배럴 씨! [침묵.] 다들 내게서 멀어지려 들지. 다들 내게 다가오지, 내가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지난 일은 지난 일이란 듯이, 넘치는 친절함으로, 도와주지 못해 안달하며… [북받쳐]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다시 만났다고… 건강한 모습으로… [손수건.] 그에 난 마음에서 우러나온… 간단한 몇 마디… 그러고는 또… 혼자가 되지…. [손수건. 격하게.] 집 밖에 나오질 말아야지! 담장을 벗어나질 말아야지! [사이.] 아, 저기 피트란 여자가 보이네, 날 보고 인사나 건네려나. [피트 양이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소리. 피트 양,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피트 양! [피트 양, 멈춰 서며 흥얼거림을 그친다.] 내가 투명 인간이 됐나요, 피트 양? 이 크레톤 옷감이 내게 하도 잘 어울려서 아예 돌벽으로 녹아들어요? [피트 양, 계단을 한 칸 내려온다.] 그래야죠, 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때 여자였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지는 모두」)
[힘 있고 다소 거만한 목소리, 아주 오래전 크래프 본인의 목소리임이 분명하다.] 오늘로 서른아홉, 종소리 짱짱 -[보다 편안한 자세를 취하다가 탁자에서 상자를 하나 떨어뜨리고, 욕설을 내뱉고, 스위치를 끄고, 상자들과 장부를 바닥으로 들입다 쓸어 버리고, 테이프를 처음으로 되감고, 스위치를 켜고, 다시 자세를 취한다.] 오늘로 서른아홉, 종소리 짱짱하고, 내 이 오랜 결함만 아니면, 지적으로도 어느새 정점… [머뭇댄다.] …파도 꼭대기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충분한 근거가. 지겨운 당일은 요 몇 년간 해 온 대로 술집에서 조용히 보냈다. 아무도 없이. 난롯불 앞에 앉아 두 눈 감고 알갱이와 쭉정이를 갈랐다. 봉투 뒷면에 간간이 메모도 했다. 서재로 돌아와 헌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너무 좋군. 방금 바나나를 유감스럽게도 세 개 먹었고 네 개째 먹으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나 같은 질환을 가진 사람에게는 치명적이건만. [거칠게.] 다 쳐내! [사이.] 탁자 위에 조명을 새로 달았더니 한결 낫다. 어둠에 이리 온통 에워싸이니 혼자인 기분이 덜 든다. [사이.] 어떤 면에서는. [사이.] 일어나 어둠 속을 오가는 게 그렇게 좋고, 그러다 다시 돌아온다… [머뭇댄다.] …나로. [사이.] 크래프로.
[사이.]
알갱이라, 보자, 내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무슨 뜻으로… [머뭇댄다.] …아마도 한바탕 먼지구름이 잦아들고 났을 때 -나라는 먼지구름이 잦아들고 났을 때 손에 쥐고 있을 만한 것들을 말하는 걸 테지.
눈을 감고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상상해 본다.
[사이. 크래프, 잠시 두 눈을 감는다.]
(「크래프의 마지막 테이프」)
저기, 들어 봐! [사이.] 눈 감고 들어 봐, 저게 뭐 같아? [사이. 격하게.] 뚝뚝! 뚝뚝! [뚝뚝 떨어지는 소리, 급격히 증폭하다가, 돌연 끊긴다.] 다시! [다시 뚝뚝 소리. 증폭한다.] 아니! [뚝뚝 소리 끊긴다. 사이.] 아버지! [사이. 안달하며.] 이야기, 이야기, 해마다 수없이 지어내며, 비로소 내가 필요를 느낄 때까지, 누군가 내 옆에 있길, 누구든, 낯선 이라도 좋으니 말할 상대가, 그가 내 말을 듣는다고 상상하며, 그렇게 지내 온 세월만, 그랬는데, 이제는 기왕이면… 나를 알던 누군가, 오래전에, 누구든 좋으니, 나를 알던 이가 내 옆에 있길, 그가 내 말을 듣는다고 상상하며, 있는 이대로의 나, 지금의 내 옆에서. [사이.] 역시 부족해. [사이.] 역시 미달이야. [사이.] 다시 해 봐. [사이.] 흰 세상, 소리 하나 없고. [사이.]
(「불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