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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600만이 죽었나?

정말 600만이 죽었나?

Richard E. Harwood (지은이), 김현영 (옮긴이)
리버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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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600만이 죽었나?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정말 600만이 죽었나?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유럽사 > 독일/오스트리아사
· ISBN : 9791195053315
· 쪽수 : 220쪽
· 출판일 : 2014-07-22

책 소개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주제 '유대인 홀로코스트'. 이 책은 간략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이 주제에 접근한다. 국제 유대인 사회의 끊임없는 홀로코스트 프로파간다에 식상한 서구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홀로코스트 수정주의의 고전이다.

목차

옮긴이의 말

서문

2차대전 연표

1. 독일의 전쟁 전(前) 유대인 정책
추방을 인종말살로 선전한 유대인 / 시온주의 선상의 국외이주 정책

2. 전쟁 발발 후(後)의 유대인 정책
전시 적국 시민에 대한 정당한 구금 / 전쟁 발발 후에도 계속 추진된 마다가스카르 계획

3. 유럽의 유대인 인구와 이주
독일 치하 300만의 유대인 / 안전지대로 후송된 소련의 유대인 / 중립국 스위스의 《Baseler Nachrichten》, “150만 이상은 불가능” / 상상을 초월하는 출산율

4. 600만이 죽었다는 객관적 증거의 부재(不在)
허무맹랑한 주장들 / 객관적 증거의 부재 / 반제회의 / 제멋대로 해석하고 추측하기

5. 뉘른베르크 재판
법리적 원칙의 무시 / 고문에 의한 자백 / Wisliceny 진술서 / 아인자츠그루펜 / Otto Ohlendorf 재판 / 아인자츠그루펜에 대한 사실 왜곡 / Oswald Pohl 재판 / 허위 진술과 날조된 증거 / ‘유대인 대학살’ 혐의에 대한 독일 지도자들의 반응

6. 아우슈비츠와 폴란드의 유대인
계속 부풀려지는 희생자 수 / 아우슈비츠의 산 증인 /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 갑자기 나타난 생존자들

7. 홀로코스트 관련 출판물들
"Hoss 회고록”의 공산주의적 기원 / 아이히만 재판 관련 프로파간다 / Franz Stangl의 Treblinka 괴담 / 날조된 베스트셀러 《안네의 일기》 / “홀로코스트 생존자” 도서들의 홍수

8. 전시 강제수용소의 목적과 환경
철의 장막 동쪽의 “절멸캠프”들 / 대폭 축소된 강제수용소 사망자 수 / 강제수용소들의 인도적 환경 / 전쟁 말기의 혼란 / 조작된 사진들

9. 국제적십자위원회 보고서
유대인은 국제적십자가 벌인 구호활동의 수혜자였다 / 유대인 대학살은 없었다 /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지 않았던 유대인들

10. 폴 라시니에 교수가 전하는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진실
전시 유언비어에 불과했던 ‘가스실 대학살’ / 허구로 드러난 ‘600만’ / “최종해법”은 유대인 추방을 의미 / 거대한 불의(不義) / 결론 / 상상 속의 대학살

부록

1. 유대인 David Cole의 아우슈비츠 방문기
2. “소련 비밀경찰의 명령으로 나는 Sachsenhausen에서 가짜 가스실을 만들었다”
3. 구(舊)소련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아우슈비츠 사망자명부
4. 홀로코스트 관련 기사 및 동영상
5. 주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6. 서양사 및 홀로코스트 수정주의 웹사이트

저자소개

Richard E. Harwood (지은이)    정보 더보기
Richard E. Harwood란 필명(筆名)으로 《Did Six Million Really Die?(1974)》를 쓴 Richard Verrall(1948- )은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 Westfield College) 사학과를 수석 졸업한 뒤 1970년대 영국민족전선(British National Front)의 부의장과 당 기관지 《Spearhead》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BNF는 다문화주의를 반대했던 전(前) 보수당 정치인들이 창당한 정당으로 70년대 영국 중산·노동자 계층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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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영 (옮긴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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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히틀러의 독일은 유대인을 나라에 불충하고 탐욕적이며, 독일인의 문화와 예술에 퇴폐적 영향을 퍼뜨리는 파괴적인 외국인 집단으로 간주했다. 유대인의 이러한 영향에 대한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독일인들의 부정적인 시각은 독일제국의 붕괴 후에 태어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를 통해 고착화 되었다. 독일 전체 인구 6,700만에서 50만, 즉 0.75%를 차지했던 유대인은 실로 바이마르 시절 독일의 정부, 법조계, 언론, 금융, 학술, 예술계에서 그들의 인구에 어울리지 않는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많은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좌파적 성향에 주목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를 필두로, 로사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g)와 칼 리쁘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같은 혁명가들을 보며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공산주의나 사민주의와 같은 좌경 정치운동들의 배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의도는 독일인들이 가졌던 이러한 인식의 옳고 그름을, 또한 이러한 인식 하에 그들이 유대인을 상대로 취했던 조치들의 정당성이나 부당성을 논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단순히 전하고자 하는 사실은 유대인 문제(Judenfrage, Jewish Question)와 관련하여 독일이 취했던 조치란 유대인에 대한 인종말살이 아니라 일련의 입법 행위들을 통해 독일 사회에 대한 유대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유대인의 국외이주를 최대한 유도하려 했다는 점이다. 간단히 얘기해 독일의 유대인 정책은 유대인 추방이었지 학살이 아니었다. 이를 반영하듯 1939년까지 독일 유대인의 대부분이 그들의 재산을 가지고 독일을 떠났다.

그러나 유대인은 추방을 인종말살로 선전했다

독일 유대인에 대한 국외이주 장려 정책을 일부 유대인들이 재빨리 ‘인종말살(genocide)’로 선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유명 문인이었던 유대인 리온 포이트뱅어(Lion Feuchtwanger)의 《50만 독일 유대인의 절멸(Der Gelbe Fleck: Die Ausrottung von 500,000 deutschen Juden, Paris, 1936)》은 좋은 예이다. 책의 첫 장부터 포이트뱅어는 ‘국외이주’ 대신 “인종말살”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히틀러의 집권 이후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좌경분자들과 일부 변태성욕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놓기 위해 세워진 강제수용소들이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같은 책에서 1936년 당시 Dachau 수용소의 유대인 수감자가 고작 100명이었으며, 이들 중의 60명이 1933년부터 구금되어 있었다고 전하며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한다.” - 1. 독일의 전쟁 전(前) 유대인 정책 中에서


“독일이 2차대전 중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들이 애초부터 어떤 공신력이 확실한 자료에 근거해 그런 수치를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실제로 유대인 600만이 죽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점 하나에 대해선 ‘나치 독일의 유대인 인종말살 계획’을 주장하는 쪽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쪽이나 이견(異見)이 없다. 그래서인지 때론 좀 더 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길 의도로 이 ‘600만’보다 낮은 수치가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 한 예로, 유대인에 친화적이며 전후 뉘른베르크와 도쿄 전범재판에 깊숙이 관여했던 좌파 정치인 러셀 경(Baron Russell of Liverpool)은 자신의 저서 《갈고리십자가가 불러온 대재앙(The Scourage of the Swastika, London, 1954)》에서 ‘600만’보다는 “최소한 500만 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같은 책에서 “실제로 얼마가 죽었는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최소한 500만 명”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유대원조위원회가 선호하는 수치는 5,012,000명이다. 이에 비해 유대인 “홀로코스트 전문가” 라이틀링어가 제시하는 사망자 수는 4,192,200명이다. 그는 이중에서 1/3이 전쟁 중 자연사했다고 말한다. 그럼 독일이 의도적으로 학살했다는 수는, 적어도 라이틀링어에 따르면, 2,796,000명이라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1948년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유대인의회(World Jewish Congress) 총회에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Dr. M. Perlzweig는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는 나치즘과 파시즘을 박멸하기 위해 700만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와 같이 ‘600만’, ‘700만’외에도 800만, 또는 900만이 제시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짚어봤듯이 이런 숫자의 유대인은 전쟁 중 독일 치하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황당무계한 얘기이다.” - 4. 600만이 죽었다는 객관적 증거의 부재(不在) 中에서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전 수개월 동안 독일의 강제수용소들은 지극히 열악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국제적십자위원회의 1948년 보고서는 이에 대한 주된 원인으로 독일 도로와 철도망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무차별 폭격을 지목한 바 있다. 식량 자급 능력이 없었던 강제수용소들은 독일의 수송망 붕괴로 독일 민간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마지막 3-4개월 동안 식량과 의약품을 거의 공급받지 못했다. 또한 소련군의 진주에 따라 폐쇄된 동부지역 수용소 수감자들이 Buchenwald와 Bergen-Belsen과 같은 서부의 수용소들에 과밀 수용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1945년 3월 Belsen 수용소에서 발생한 대규모 발진티푸스 사태는 1월 말 폐쇄되었던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의 이송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렇게 사망한 Belsen 수감자들의 시신 수천 구를 이 수용소를 해방시킨 영국군이 불도저로 대형 구덩이에 밀어 넣는 영상은 독일이 전쟁 중 강제수용소들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증거로 가장 자주 제시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피골이 상접해 있는 시신들의 상태를 볼 때 이들이 독일군에게 학살된 것이 아니라 기아나 전염병 때문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1966년 출간 이후 큰 인기를 누렸던 《Purnell's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Vol. 7, No. 15)》에는 해방 직후 Belsen 수용소의 상황에 대한 Dr. Russell Barton의 정직한 기술이 담겨있다. Dr. Barton은 현재 Essex의 Severalls 병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의대생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Belsen 수용소의 해방 후 그곳에 한 달 동안 머물며 Glyn Hughes 장군의 전염병 통제 작업에 참여했다. 다음은 위 책에 실려 있는 그의 증언이다, “Hughes 장군은 이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에 대한 학살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의 대부분은 독일이 희생자들을 고의적으로 굶겨 죽였을 거라고 믿었다... 그들이 겪었다는 학대와 독일군의 만행을 수용소를 방문한 영국과 미국 기자들에게 폭로하는데 열심이었던 수감자들도 있었지만 다른 수감자들은 1944년 말까지 수용소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나무 숲을 뒤로 세워진 수감자 병영들은 개별적으로 세면대, 화장실, 샤워실, 난로를 갖추고 있었다... 포로가 된 독일군 의무관은 1945년 1월말부터 식량과 의약품 보급이 끊겼다고 말했다. 그는 도로나 철로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연합국 전폭기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수용소에서 압수된 문서들 가운데 지난 2년 동안 이 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음식이 조리되고 또 배급되었는지를 기록한 문서들을 보고 나는 많이 놀랐다. 그 후로 나는 독일이 고의적으로 수감자들을 굶겨 죽였다는 선전을 믿지 않게 되었다... 독일의 항복 전 수개월 동안 이 수용소에서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한 원인은 과밀 현상으로 빚어진 발진티푸스의 창궐, 식량, 의약품, 그리고 깨끗한 물의 부족이었다.” - 8. 전시 강제수용소의 목적과 환경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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