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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의 항일대장정)

장준하 (지은이)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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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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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돌베개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71996706
· 쪽수 : 460쪽
· 출판일 : 2015-05-18

책 소개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장준하가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 <돌베개>. 광복 70주년, 장준하 서거 40주기 기념 전면 개정판이다.
광복 70주년,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 기념 전면 개정판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 광복군에 투신한 6천 리 대장정의 기록


1944년 7월 7일, 중국 쉬저우의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가 일본군이 중일전쟁 7주년을 맞아 기념 회식을 하느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김영록.윤경빈.홍석훈과 함께 목숨 걸고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돌베개』는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고인이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이다.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7개월여에 걸쳐 쉬저우에서 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대장정에 굽이굽이 서린 숱한 일화와 1945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직후의 상황까지 2년여의 기간을 다룬 이 책의 무대는 평양에서 쉬저우→린촨→난양→라오허커우→파촉령→충칭→시안→상하이→서울 등지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함석헌 선생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이 책이 나를 빨아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회오리바람을 쳤습니다”라고 한 바 있는 이 책은 저자의 표현 그대로 자신보다 앞서 죽어간 “불쌍한 선열들 앞에 띄우는 바람의 묘비”이며, 그 내용은 망국과 분단이라는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하다. 진정한 나라 사랑의 길이 무엇인지를 뜨겁게 웅변하는 이 책을 통해 장준하라는 역사의 거목을 추모하며 다시금 오늘을 돌아보자.

▶ 광복군 3대 회고록 중 으뜸으로 꼽히는 『돌베개』,
첫 출간 이후 44년 만에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지난 100년간 한국에서 출간된 최고의 문학서”라고 상찬한 장준하 선생의 항일수기 『돌베개』는 이범석 장군의 『우등불』,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장정』과 더불어 광복군이 직접 쓴 회고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오랫동안 널리 읽혀왔다. 1971년 4월 30일에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를 펴내던 사상사에서 처음 출간된 이래 여러 번 간행되었다. 1976년 일본에서 『석침-한민족에의 유서』石枕-韓民族への遺書라는 제목으로 사이마루출판회サイマル出版會에서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고(안우식安宇植 번역), 1978년에는 화다출판사에서, 1985년에는 ‘장준하선생10주기추모문집간행위원회’에서 ‘장준하문집’으로 1권 『민족주의자의 길』, 2권 『돌베개』, 3권 『사상계지수난사』가 간행되었다. 1987년에는 청한문화사에서 『돌베개: 청년시대의 항일투쟁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2년부터는 세계사에서 간행되었으며 2006년에는 요약본 『쉽게 읽는 돌베개』가, 2007년에는 양장본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79년에 장준하 선생의 책에서 출판사명을 따와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돌베개’ 출판사에서 드디어 선생의 서거 40주기에 즈음하여 『돌베개』를 출간하게 됨에 따라 출판사에서는 저자의 육필원고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1973년에 세로쓰기 형태로 나온 제3판을 저본으로 삼고 가장 최근에 나온 세계사 간행 개정판 9쇄(2014년 3월)를 참조하여 원문을 일일이 대조해가며 수많은 오류와 누락 부분을 바로잡은 전면 개정판을 펴내게 되었다.

▶ 숱한 오류의 교정과 장정 지도.컬러도판.주요 인물소개 등 풍부한 부속자료 보강

전면 개정판 『돌베개』는 이전 판본들과 몇 가지 면에서 크게 다르다. 우선 초판과 세계사판을 막론하고 저자의 착오나 당시 식자植字의 오류 등으로 짐작되는 다수의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그중 상당 부분이 한자의 오류인데 대표적으로 ‘중앙저비은행권’을 들 수 있다. ‘중앙저비은행’中央儲備銀行은 일본이 국민당의 화폐에 대응한 새로운 화폐가 필요해서 만든 은행인데 원문에는 ‘중국주비은행권’中國壽備銀行券[중국수비은행권]으로, 세계사 판본에는 ‘중국수비은행권’中國籌備銀行券[중국주비은행권]으로 각각 한글과 한자가 다르게 나와 있으나 ‘儲’[저]의 중국어 발음이 [chŭ]인 데서 생긴 착오임을 중국 측 전문가를 통해 확인, 수정했다.
또한 원문에는 김준엽의 일군 탈출 시기가 장준하 일행보다 ‘5개월’ 앞섰다고 되어 있으나 김준엽은 3월 29일, 장준하는 7월 7일에 탈출했으므로 김준엽의 『장정』을 비롯한 대개의 관련 자료에 따라 ‘3개월’로 수정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한자 오류로 ‘감협령변구’甘陜寧邊區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한자 ‘섬’陝과 ‘협’陜이 매우 비슷하게 생겨서 흔히 일어나는 착오다(보통 ‘섬감령변구’로 불리는 ‘감섬령변구’는 산시성 북부와 간쑤성, 닝샤성 동부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 조항 중 각각 ‘광유’廣有와 ‘철교’撤橋로 잘못 기재된 한자를 ‘응유’應有(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뜻)와 ‘적교’敵僑(국내 잔존 일본인)로 바로잡았으며, 그 밖에도 용해선龍海線→롱해선隴海線, 청감靑鑑→청람淸覽, 롱윈籠雲→龍雲, 나일환→나월환, 조경환→조경한, 한성수韓性洙→韓聖洙, 고이소小機→小磯 등의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나아가 원문에는 실려 있으나 세계사 판본에는 누락되었거나 맥락과 다른 단어가 쓰인 순우리말을 원문대로 살리되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단어에는 편집자 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대표적으로 ‘스스럼히’(320쪽, 325쪽 참조)와 ‘거무푸레하다’(346쪽 참조) 같은 단어를 들 수 있다(그 외의 수정사항은 8쪽에 실린 상세한 일러두기를 참조).
그 밖에 장준하기념사업회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6천 리 장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세 지도와 이전 판본들에는 들어 있지 않던 다양한 컬러도판들, 주요 등장인물 소개 등을 보강한 새 개정판 『돌베개』는 향후 명실상부한 정본으로 자리 잡으리라 기대한다.

▶ ‘돌베개’와 함께한 6천 리 대장정 그리고 임시정부

- ‘돌베개’의 유래
‘돌베개’는 창세기 28장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장준하가 광복군이 되기 위해 일군을 탈출할 경우 아내에게 남기기로 한 암호였다. 장준하는 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 시작하는 편지 말미에 “앞으로 베어야 할 야곱의 ‘돌베개’는 나를 더욱 유쾌하게 해줄 것이다”라는 다짐을 써서 보낸 후 일군에서 탈출한다. 탈출병을 거의 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쓰카다 부대에서 탈출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 일군 탈출
마침 ‘지나사변’(일본인들이 ‘중일전쟁’을 부르는 표현) 7주년 기념 회식이 떠들썩하게 치러져 온 부대원이 만취된 상태에서 점호조차도 간단히 끝난 상황. 이를 놓치지 않고 목욕을 가는 것처럼 행장을 꾸며 부대 철조망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 장준하 일행은 이후 나침반과 성냥, 약간의 쌀에 의지해 무조건 동북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앞을 가로막는 운하, 죽을 것 같은 갈증과 배고픔 등을 이겨내며 150~160여 리는 벗어났으려니 했을 때 만난 중국 농민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기력은 회복할 수 있었지만 부대에서 고작 15리밖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휩싸인다.
그러나 일군에서 벌써 중국 농민들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다시 죽을힘을 다해 달리지만 또다시 나타난 강물 앞에서 진퇴유곡에 빠진다. 천우신조로 작은 배 한 척을 발견하여 가까스로 강을 건넜으나 김영록 동지는 낙오되고 만다. 모든 걸 체념한 상태에서 중국 중앙군 소속의 유격대에 발견되면서 이들의 탈출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그 유격대 사령부에서 쓰카다 부대 제1호 탈출병인 김준엽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행히 김영록 동지 또한 뒤늦게 중국군에 구출되어 일행은 모두 다섯으로 늘어난다.
이러는 와중에 자못 감탄스러운 일화도 있었다. 바로 중국 중앙군 23종대縱帶 사령관 한즈룽韓治隆과 관련된 실화다.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 유격대에 구출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일군 사령관과 한즈룽 사령관 사이에 2인 담판이 벌어졌는데, 이때 일군 사령관이 한국인 탈출병 5인과 중국인 30명을 맞교환하자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당시 통역은 김준엽이 맡았는데 그에 따르면 한 사령관이 이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 그러고는 일군의 허를 찌르듯 야음을 틈타 부대 이동을 단행한 것이다. 이후 장준하는 한 사령관을 이국의 은인으로 여기며 사표師表로 삼기도 했다.

-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의 3개월
장준하, 김준엽,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 이들 다섯 명은 이후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 6천 리의 대장정에 오른다. 변변한 신발이나 복장도 갖추지 못한 채 오로지 걸어야 산다는 것과 기필코 임시정부에 도착해서 우리의 지도자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열의 하나만으로 이겨낸 대장정.
장제스 휘하 중앙군의 도움을 받아 린촨에 있는 한국광복군훈련반에 합류하게 된 일행은 이미 집결해 있던 한국 청년 80여 명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고 3개월간 광복군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중국 중앙군관학교 부설인 만큼 중국 군인들의 제대로 된 훈련과는 달리 목총 한 자루도 없는 형편이어서 일행은 큰 자괴감에 시달린다.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는 지루함과 괴로움을 떨쳐버리려 하루 두 가지씩의 강좌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여러 강좌가 대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자 그 소중한 기록을 책으로 엮어내기로 하고 그 제호를 ‘등불’로 정한다. 이때부터 장준하와 잡지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취사 책임까지 떠맡게 된 장준하는 ‘크리스천’으로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중국 농민들의 고구마밭에서 고구마를 캐오는 ‘야간 침투작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술, 담배조차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어린 시절에는 길에 떨어진 돈조차도 줍지 못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고뇌를 안고 배곯는 동지들 앞에서 ‘책임 완수’의 길을 선택하는 장면은 장준하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낸다.

-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 다시 떠난 길
어느덧 한광반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중국군 육군 중위로 임명된 이들 일행은 한광반 김학규 주임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코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나게 된다. 마침 이들에게 인계된 민간인까지 포함하여 도합 53명이 1944년 11월 30일 오후 1시에 린촨을 떠나 3개월간의 충칭 행군에 오른다. 오합지졸의 중앙군 행렬을 만나 이들과 함께 일군 관할지역인 평한선을 넘기도 하고, 평균 하루 100리씩을 걸으며 마을의 보장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하고, 멋모르고 토비(마적단) 소굴에 들어갔다가 가까스로 목숨과 양식을 건져 나오기도 하고, 몸에 온통 옴이 올라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는 데다 양말도 없이 맨살에 노끈으로 잡아맨 초혜에 의지해 행군을 해야 하고, 일본 전투기의 공습을 당하기도 하고, 워낙 함산준령이라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한겨울에 서로의 체온과 굳은 의지에만 의존해 넘는 와중에 호랑이를 만나기도 하는 등 이들 앞에 놓인 역경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6천 리 대장정의 거의 모든 고비가 돌베개요, 눈으로 된 베개였던 것이다.

- 드디어 도착한 충칭 임시정부
바둥에서 5천 톤급 군용선박을 타고 8일에 걸쳐 양쯔강을 거슬러 도착한 충칭. 그러나 이들을 처음 맞이한 것은 쇠락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건물이었다. 일행은 그 초라함에 실망을 감출 수 없지만 다행히 새 임정 건물은 4개월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간 상태였다. 층암 위에 차례로 지어 올려 겉보기에는 5층짜리 같은 단층 건물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일행은 벅찬 감격에 피 끓는 환희를 느낀다. 1945년 1월 31일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정식 사열을 받은 후 김구 주석과 임정 각료들을 처음 대면한 일행은 드디어 몸 바칠 곳을 찾았다는 뜨거운 감격으로 환영회 자리에서 통곡의 바다를 이룬다. 그러나 그런 감격의 시간도 잠시, 임정 내의 무수한 파벌싸움에 곧 넌더리가 나고 만다. 한 명이라도 더 자파에 흡수해가려는 공작이 난무하는 가운데 끝없이 이어지는 환영회 자리를 일행은 딱 잘라 거절하는 한편, 임정 각료는 물론 충칭 시내 교포들까지 모두 모이는 주회週會에서 장준하는 드디어 ‘폭탄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서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들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 이를 악물고 헤매어 온 것은 아닌 것을 말합니다.”

- 이범석 장군과 OSS 훈련
그토록 그리던 임시정부에 왔으나 막상 거기서도 딱히 할 일이 없는 무위와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다 못한 장준하는 곧 임정에 요청하여 투차오土橋라는 작은 부락으로 옮겨가 이전에 내던 잡지를 속간해보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일거리를 찾고 자체적으로 기율을 강화하는 등 광복군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던 중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찾아와 광복군 제2지대장인 이범석 장군과 대면하기에 이른다. 광복군 제2지대가 시안 땅에서 미군과 합작하여 한국 침투작전을 위한 훈련을 계획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눌 수 없는 흥분에 휩싸인다. 마침내 광복군 제2지대로 배속된 장준하 일행은 정보누설을 막기 위해 가명까지 지어가며 조국을 위해 몸 바칠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나날을 보낸다.
1945년 4월 29일, 일찍이 김구 주석이 윤봉길 의사를 사지로 보내던 바로 그날, 임정 청사 앞뜰에 다시 모인 장준하 외 30여 명의 젊은 광복군들은 슬픔 가득한 김구 주석의 작별사를 뒤로하고 시안 두취지구를 향해 출발한다. 이후 미국 전략첩보대를 의미하는 ‘OSS’에 소속되어 특수훈련에 돌입한 일행은 3개월간 각자의 특기를 살려 훈련에 매진하며 조국에 상륙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러던 중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요청을 연합국에 통고해왔다는 뜻밖의 희보가 날아든다. 그러나 이들 일행에겐 실망과 환희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연합국의 한반도 상륙작전이 며칠만 더 앞섰더라면 조국을 위해 장쾌하게 혼을 불살랐으리라는 안타까움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 임시정부의 환국과 김구 주석의 비서로 보낸 나날
1945년 8월 14일, 장준하 일행은 중국 전구 미군사령부 사절단에 편승하여 국내에 진입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날 아침 미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의 공격을 받은 일로 산둥반도에서 회항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말할 수 없는 실망을 안고 다시 시안으로 되돌아온 지 나흘 후인 18일 새벽, 마침내 일행은 시안을 떠나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는 감격을 맛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간교한 일본군의 제지로 미군 번즈 대령은 휘발유만 급유받고 시안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장준하는 이렇게 해서 해외 독립투사 중 가장 먼저 고국 땅을 밟아본 특별한 경험을 갖게 된다.
1945년 11월 23일, 드디어 김구 주석을 필두로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상하이에서 중형 미군 수송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3천만의 희망이자 혁명투사인 민족의 지도자가 30여 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으나 환영 인파조차 없었으며, 미군정은 김구 일행을 임시정부의 환국이 아닌 ‘개인 자격’의 입국으로 제한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경교장으로 소문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과 이승만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끝없는 방문으로 김구 주석의 비서였던 장준하는 정작 자신의 가족을 찾아볼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끝없이 이어지는 환영회에 장준하는 ‘이런 환영을 받으러 귀국한 것인가’ 하는 깊은 회의에 빠져든다. 게다가 임시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파로 나뉘어 각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국내 상황에 차츰 깊은 우려와 실망을 느끼게 된다.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허헌의 4당수 회담을 곁에서 지켜보며 각 인물의 발언과 그들에 대한 인물평을 곁들인 부분은 당시 어지럽던 시대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더불어 이들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이라든가 해맑은 어린아이들을 대하고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 온전한 정부를 못 가지고 들어온 회한에 괴로워하는 모습 등 백범 김구의 여러 면모가 잘 드러나 읽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12월 1일 임시정부 제2진의 환국이 이루어진 뒤에도 주지육림 속에서 놀아나는 환영회들이 되풀이되는 와중에 우리 민족의 운명은 이미 강대국 손에 요리되고 있었고, 끝내 임정의 이성 또한 취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목차

발문—『돌베개』에 부치는 말

탈출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잊히지 않는 얼굴들
광복군훈련반에서 3개월
라오허커우의 공연
파촉령 넘어 태극기
눈물의 바다
자링 청수는 양쯔 탁류로
8·15 전후 I
8·15 전후 II
임시정부의 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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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장준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준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당시 한문 지식뿐만 아니라 신문명을 수용하는 데도 적극적 태도를 보였는데, 장준하의 회고에 따르면 시골 벽지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받아 볼 정도로 당대의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일제에게 불령 불온자인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장준하의 아버지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시위 참가자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며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항일 저항 의식을 보였다. 이처럼 장준하는 성장 환경 속에서 할아버지의 지식인적 삶으로부터 이후 ≪사상계≫의 잡지를 발간하게 되는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항일 저항 의식과 불의에 맞서 선(善)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민족의식과 인류 보편적 민주주의를 향한 정신을 함양하게 된다. 장준하의 이러한 모습은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그가 다니는 평양의 신성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연루돼 일본 경찰에 체포된 데 대해 석방을 요구하는 수업 거부와 동맹 시위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장준하에게 일제에 맞서 항거한 본격적 투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성중학을 졸업한 이후 장준하는 평북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의 교원이 되는데 바로 이때 스승과 제자로 만난 사람이 장준하의 반려자 김희숙 여사다. 3년간의 신안소학교 교원 생활 후 장준하는 1년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 유학에서 그는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장준하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1940년대 초 일제의 군국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더니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 총동원 체제 아래 피식민지는 일제의 전쟁 물자를 공급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 무렵 장준하는 김희숙과 결혼(1943)을 한 후 일본군의 ‘학도지원병’으로 지원한다(1944).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참전하게 된 장준하는 동료 조선인과 함께 가까스로 탈출을 했고 온갖 난경 속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 중앙군 유격대에 들어간다. 바로 그곳에서 장준하는 그보다 먼저 일본군에서 탈출한 그와 같은 조선인 학병 김준엽을 만난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무려 6000리(2400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는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심하고 일본군과 마적의 위협을 뚫고 마침내 임시정부에 들어가 중국 중앙군관학교 린촨분교 내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해 군사교육을 받는다. 이곳에서 그는 ≪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신학, 철학, 사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토론과 학습 자료를 만들며 문무를 겸비해 나간다. 특히 중국 서안에서 미국 OSS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한반도에 기습 침투하는, 오늘날 공수특공대와 같은 게릴라식 전투를 주도면밀히 준비했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작전 개시 5일 전,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중단된다. 이에 대해 장준하는 체험 수기 ≪돌베개≫에서 “떳떳한 승리의 군대로 조국에 개선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국내 치안을 주도해 보려던 꿈이 잠들고 말았다”며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일제가 패전한 후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온 장준하는 해방 공간의 혼돈 속에서 못다 한 신학 공부를 했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2년 9월 피난지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 창간에 이어 1953년 4월 ≪사상계≫를 발행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발행된 ≪사상계≫는 척박한 한국 언론의 토양을 객토하고, 무엇보다 환멸과 허무에 침잠해 있던 한국 지성사에 신생의 활력을 북돋았다. ≪사상계≫의 역할은 상상 이상 큰 것이었다. ≪사상계≫는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두 과제를 중심에 놓고 일체의 타락한 정치사회 세력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5·16군사 쿠데타 이후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가 장준하와 그의 ≪사상계≫를 탄압하기 위해 온갖 정치적 박해와 음모를 가했다는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암행 기록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사상계≫의 활동은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 부문의 수상자로 장준하가 선정되면서(1962) 국제적 명성과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장준하의 이러한 지속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장기 집권을 획책하는데, 이에 대해 장준하는 박정희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친일파, 정치적 무능력, 반민주주의 독재 등)를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재야 민주주의 인사를 통합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박정희의 정치적 탄압으로 옥중에 있을 때 옥중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했고(1967), 마침내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현실 정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이 노골화되기 시작한 유신 체제 아래 장준하는 ‘유신헌법 개헌 청원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1973)을 벌이면서 숨죽이고 있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과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를 표면으로 솟구치도록 하는 도화선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장준하는 반민주주의를 획책하고 정치사회적 억압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박정희 정부를 향한 준열한 비판과 저항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박정희 정부의 눈엣가시였던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에서 등산 도중 실족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1975). 이후 그의 죽음에 대해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는 데 한계가 있던 터에, 2012년 그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관 뚜껑을 열었는데 그의 두개골이 함몰된 것이 드러나면서 두개골 정밀 감식을 거친다. 그에 대해 2013년 3월 26일 백범기념관에서 서울대 의대 법의학자 이정빈 교수의 결과 보고가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두개골 함몰은 추락에 의한 골절이 아니라 외부 가격에 의한 손상”이고, “장준하 선생은 제3의 장소에서 살해당하고 시신이 옮겨온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로써 장준하의 죽음은 등산 도중 실족사가 아닌 타살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 때문에 장준하를 살해했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누구인가? 이 점은 아직도 미궁으로 남아 있다. 광복군으로서, 재야인사로서, 정치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장준하는 한국 현대사에서 그가 말한 대로 ‘민주대도(民主大道)’를 향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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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나는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 수기 속에서 중언부언했다. 왜냐하면 내가 광막한 중원 대륙 수수밭 속에 누워 침 없이 마른입으로 몇 번이나 되씹었고 또 눈 덩어리를 베개로 하고 동사凍死의 기로에서 밤을 지새우며 한없이 울부짖었던 이 말이 곧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못난 조상에 대한 한스러움과 다시는 후손에게 욕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단호한 결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머큐로크롬을 병째로 뒤집어씌워놓고 지혈을 시키기 위해 꽁꽁 동여매었을 뿐, 그러나 나는 일군 육군 중위와의 대결에서 판정승을 얻었다는 자부심으로 그의 앞을 물러서려고 하였다.
“……야, 내 외과의사 생활 10여 년에, 너 같은 지독한 놈은 처음 본다. 장하긴 장하다. 독종이구나.” 나의 아픔은 이 한마디로 보람을 찾은 듯이 잠시 내게서 잊혔다. 그러나 ‘너 같은 일본 놈에게 아프다는 소리는 차마 하기 싫어서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올 뻔했다. 그런데 내가 채 의무실을 나오기 전에 한 후보생이 들어왔다. S라는 초년병 동료다. (중략) S초년병은 엉덩이에 종기가 나 있었다. 의무관이 그곳을 건드리자 “아이구……”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의무관은 군홧발로 이 후보생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쾅, 쓰러진 S초년병에게 던지는 한마디가 찌르릉 귀를 먹게 하였다. “이놈! 저놈은 그 아픈 생손 다섯 군데를 그냥 쨌어도 소리 한번 안 질렀어…….”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나의 인생의 과정은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꽂고 이제부터 나를 안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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