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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5116300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14-04-25
책 소개
목차
비롯하는 글
하루와 평생이 무엇이 다른가
매상昧爽 먼동이 틀 무렵 - 인시寅時
선비들은 신새벽에 일어나 무엇을 하였을까 |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나 | 어떻게 앉아야 되는가
일출日出 밝은 이치를 살피다 - 묘시卯時
책으로부터 비롯하자 | 스스로 깨우치고, 깨우친 것에 매달리자 |
한 줄로 곧게 서지 말고 좌우로 나란히 둘러서자 | 웃는 듯한 분홍빛
식시食時 몸과 마음을 키우다 - 진시辰時
소금 많이 뿌려라! 소금 많이 뿌려! | 잦바듬히 눕혀 길게 늘여 빼게 된 까닭 |
대궁에 숭늉을 부어 버리던 과객노인 | 함께 일해 함께 먹자
우중 中 읽고 또 읽는다 - 사시巳時
읽은 것이 아니라 다 외웠다 | 소급수에 걸렸던 정조 |
겨레의 삼독번뇌를 벗어나려면 | 소설이라는 것은 오락이 아니다
일중日中 때를 놓치지 않는다 - 오시午時
모두가 하늘이 낸 사람들이다 | "솔굉이 목 자요" |
만주벌로 가고 싶은 벌때추니 | 사라져 버린 원고지를 위한 만가
일질日 다시 새벽처럼 - 미시未時
과유불급이니 몇 대를 맞겠느뇨 | 서둘러 무엇을 얻겠는가 | 하늘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일포日 몸과 마음이 하나 되다 - 신시申時
황국신민이 되어 버린 인민들 | 버마재비가 수레를 버티는 소리
일입日入 되묻고 바로 세우다 - 유시酉時
성냥바치를 제자로 두었던 퇴계 | 마음은 본디 고요한 것이다 | 외로워야 한다
황혼黃昏 하루의 갈무리 - 술시戌時
외로운 테 밖 사람, 매월당 김시습 | 네 살짜리가 들었던 방포소리 | 화엄은 부처의 다른 이름이다
인정人定 발자취는 끊어지고 - 해시亥時
허물 있는 가운데 허물 없기를 구하여라 | 진이야, 진이야, 황진이야! | 오로지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야반夜半 깊은 밤을 지나며 - 자시子時
사람들 활활 갈 때 나는 홀로 살살 오리라 | 눈 밝은 사람은 살고 눈 어두운 이는 죽을 것이니 |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나오는 소리 | 흘러가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다
계명鷄鳴 새로운 날 - 축시丑時時
옛 선비는 무슨 책을 얼마나 읽었을까-『죽서독서록』 | 온몸 운동 108배로 건강을 지키자 |
반짝반짝 작은 별, 천진동자 중광
마무르는 글
벼가 될 것인가, 피가 될 것인가 | 상기도 들려오는 할아버지 목소리
저자소개
책속에서
우주 삼라만상이 돌아가는 갈피를 두루 깨우친 큰 도인이 첫 마이크를 잡는 자리였다. 그 도인은 당신 어머니
를 모셔오게 하였다. 이 누리에 사람 몸을 받아 태어나게 하여 준 가장 가까운 피의 인연인 어머니를 많은 사람
들 앞에 앉으시게 하고, 우주가 뒤집어지는 사자후를 토하겠다는 것이었다. 장한 아드님 앞에 앉은 늙은 어머니
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염주 알만 헤아리고 있는데, 도인 아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장한 아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흡, 숨을 삼키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중년 사내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저를 낳고 길러준 어머니를 위하여 무슨 기막힌 법문을 하여 줄 것으로 굳게 믿
으며 가슴 두근거려 하던 그 늙은 여자사람은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몸을 일으키었다.
“에구머니! 어미를 위해서 거룩한 부처님 말씀을 해 준다더니, 이게 무슨 망측스런 일이람.”
종종걸음 쳐 법당을 빠져나가는 어머니를 보며 도인은 쓰게 웃었다.
“저분이 이 중생 어머니올시다. 이 중생이 어렸을 적에는 발가벗겨 고추를 조몰락거리며 예쁘다고 궁둥이를
톡톡 두드려 주며 골고루 씻겨 주시더니……. 그때처럼 발가벗은 아들을 보고는 망측하다며 내빼시네요.”
주자 이데올로기에 눌려 맥줄이 끊어졌던 조선 선불교를 불끈 다시 일으켜 세운 경허鏡虛(1846~1912) 스님
이야기이다. 참선을 하는데 가장 무서운 귀신이라는 수마睡魔, 곧 졸음을 쫓기 위하여 턱밑에 송곳을 세워두고
죽기 살기로 화두에 매달리기 석 달 만에 이대로 죽으면 고삐 꿸 구멍이 없는 소로 태어나게 되는 까닭을 깨치고
났을 때였다.
경허 스님은 왜 옷을 벗었고, 어머니는 또 왜 도망쳤던 것일까? 사람이 이 누리에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은 우는 것이다. 왜 우는 것일까? 처음 보게 되는 세상이 반갑고 좋아서 웃지 않고 왜 목이 찢어져라 우는 것
일까? 무서워서 운다. 배고파서 운다. 외로워서 운다. 그리워서 운다.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열 달 동안에는 어
머니와 한 몸이었으므로 무섭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았다. 외롭지 않았다. 그립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와 한
몸으로 이어 주던 탯줄이 끊어지고 보니 무엇보다도 먼저 외로운 것이다. 외로우니 무섭고 무서우니까 배고프며
그리고 또 막막한 것이다. 그때부터 힘든 싸움이 비롯된다. 삶이라는 허허바다 속에서 떠돌아다니게 된다. 돛대
도 없고 삿대도 없는 나뭇잎 같은 쪽배를 타고. 배는 고프고 목은 타는데 어디를 둘러봐도 쪽배를 댈 땅은 보이
지 않는다.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데 북풍한설은 몰아쳐 오고 견딜 수 없게 배는 또 고프다. 그런데 정작으로 배
고픔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외로움이고, 외로움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다. 사람은 그리하여 한뉘
동안 끝없이 내 몸에 꼭 맞는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니, 삶이라고 한다. (중략)
- 본문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나’ 중에서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하느니라.”
하늘의 뜻을 좇는 자는 살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죽는다고 맹자께서는 말씀하였다는데, 아! 아버지는
왜 하늘 뜻을 거스르셨다는 말인가? 아니, 하늘 뜻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겨우 종짓굽(종지뼈 언저리)이 떨어진 열쭝이(이제 막 날기를 배우는 어린 새) 머리통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리 파고들며 깊고 넓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땅 뜀도 할 수 없
는 하늘이었고 바다였으며 그리고 집채만 한 너럭바위였다. 캄캄 칠통 흑암이었으니, 죽음이었다. 풀리지 않는
화두였다.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5
그것도 제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뜻에 따라서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올라가게 된 뒷동산이었다. 몰방질하는 북미합중국 병정들이 갈겨 대는 총소리에 놀라 피란 갔던 곳이
었다. 글공부를 하고 나서 연당처럼 새까매진 헌 신문지 쪼가리에 쓰고 또 써 보던 붓을 연지硯池 위에 눕힌 다
음 살그니 사립을 나서는 것이었다.
외자욱길이었다. 우거진 솔수펑이(솔숲) 사이로 가르마자국처럼 좁좁한 길 밟아가는 데, 어라! 흐리마리하여
지는가 싶더니 이내 언덕이 끊어지고 어뜨무러차! 얼크러지고 설크러진 칡넌출 다래넌출 거두잡아 엎더지고 곱
더지며 극터듬어 올라간 뒷동산 마루였다. 그곳 평토된 묵뫼(주인 없이 오래된 무덤) 앞에 할미꽃 한 송이 고개
숙이고 있었다.
할미꽃 옆댕이에 아그려쥐고 앉았다. 두 무릎을 앞가슴에 붙여 세웠다. 그 위에 턱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저
아래로 허릿바(허리띠의 내포 쪽 말)처럼 길둥그렇게 반구비(쏜 화살이 높거나 낮지 않게 알맞게 가는 것) 치며
흘러가는 신작로 길을 바라보다가, 아부지이! 목이 터지라고 소리쳐 불러 보는 것이었는데, 별꼴. 메아리로 돌아
오는 뻐꾸기 울음소리였다. 꺽꺽 목 맺힌 딸꾹질 섞어 불러 보는 아버지였고, 뻐꾸기 울음소리를 이마로 받아 넘
기며 내려오노라면 발등 덮는 멧그리메였다.
화담은 그 나이 때 산에 올라 하늘 천天 자 갈피를 파고들어 한소식 해 마치었다는데, 내가 불러 보는 것은 기
껏 아비 부父 자였으니, 아, 아버지는 왜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다는 말인가?
묻고 또 되곱쳐 물어봐도 대꾸하여 주는 이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글이나 읽어라 하시었고, 할머니는 관세음
보살만 부르셨으며, 금방이라도 방구들이 꺼질 것만 같은 한숨을 내리쉬시는 어머니였다. (중략)
- 본문 ‘네 살짜리가 들었던 방포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