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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기타 명사에세이
· ISBN : 9791195315819
· 쪽수 : 310쪽
책 소개
목차
서문
언론 탓에 쓰게 된 40대의 자서전
제1장 투덜이 대학생, 학교와 겉돌다
나는 386 세대가 아니다. 1990년대 학번이다
날아오르라 봉황이여
재수 끝에 턱걸이로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다
서울대 미학과인가 무용과인가
투덜이 스머프, 소설창작학교에 가다
세계 최강의 군대, 미군의 문을 두드리다
카투사 경험은 CEO 변희재의 출발점
미 여군과의 잊을 수 없는 추억
카투사 시절에 경험한 인종차별
1997년 IMF 위기, 그리고 대선에서 DJ를 지지한 이유
제2장 신좌파 운동권세력과의 사투
신좌파의 성지에서 학생운동권과 한판 붙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부잣집 자식들의 고상한 취미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인의 삶을 경험하다
반포중학교에서 자유경쟁사회의 아름다움을 깨닫다
서울대 성폭력 조작 사건, 페미니즘 권력과 사투를 벌이다
아직도 가장 가슴 아픈 패배
안티조선을 시작으로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나의 자유주의 노선
제3장 노무현 그리고 안티조선과의 결별
창업 실패 후 대자보에서 재기를 꿈꾸다
2002년 10월17일 김민석 탈당으로 노사모 서프라이즈에 집결
웹진 서프라이즈 대표를 맡은 이유
노무현 세력의 민주당 분당, 웹진 서프라이즈를 분열시키다
서프라이즈의 친노세력이 꾸민 음모
브레이크뉴스를 만들며 노무현 세력과 전쟁을 시작하다
노무현 탄핵으로 외톨이가 되다
탄핵은 3권 분립 위반이 핵심
제4장 대자보부터 미디어워치까지, 언론인 변희재
문학소년, 강준만을 만나며 논객으로 데뷔하다
좌우의 논객들을 모두 망라했던 대자보
대중문화평론가 활동의 시작은 <스타비평> 시리즈
핑클과 김혜수와의 잘못된 만남
앙팡테리블로 불렸던 브레이크뉴스 연예팀
구설수에 오른 ‘몸 파는 여기자’ 사건
일본에서 겨울연가를 출판하다
김경재 전 의원과 함께 한 끝없는 정치적 패배
포털과의 싸움, 안티조선과의 완전한 결별
나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한겨레, 프레시안, 미디어워치는 가장 닮은 존재
광우병 거짓선동이 미디어워치 창간의 계기
사망유희, 대한민국 토론의 격을 바꾸다
과거 13년 간 부딪혀온 진중권과 끝장을 보다
나는 NLL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제5장 CEO 변희재의 미래비전과 일상
개혁의 보이지 않는 손, 창업의 길로 들어서다
서울대 미학과에서 시작한 ‘두아’ 프로젝트
젊은 날의 사업 실패,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2011년 필리핀 가수와 다문화 콘서트를 기획하다
강한 남성들의 집결지 수컷닷컴을 만들다
도전하는 자만이 꿈꿀 수 있다
청년언론인, 청년기업가, 청년정치인을 육성하자
사업은 좋아하는 것, 잘 하는 것이 아닌 해야만 되는 일을 찾았을 때 성공한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감시가 아니라 컨설팅이다
리더로 살아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
공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일상생활
내 이상형은 육영수 여사
결문
새로운 실크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새시대의 첫차 혹은 구시대의 막차로 기록됐으면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군대에서 대학으로 복학한 뒤, 학비와 생활비 등을 모두 내가 직접 벌어 해결하겠단 각오를 다졌다. 카투사 복무 시절, 대학생 신분 미군들이 군대에서 2~3년 정도 복무해 부모로부터 독립, 대학학비를 벌어가는 것을 보며 배운 생각이다. 이런 미군들을 보며 개인의 독립성은 부모의 경제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대생의 경우 조금만 노력하면 한두 건의 과외지도 아르바이트는 쉽게 구할 수 있다. 나 역시 두 건의 과외지도로 월 60만 원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서울대 인문대학 등록금이 학기 당 80만 원이었고, 발로 뛰어 찾아보면 약 30만 원 정도 장학금은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이 정도 수입이면 충분히 생활비와 등록금을 직접 마련할 수 있었다.
문제는 1999년에 ‘스타비평’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문화평론가로서 활동하고, 동시에 인터넷신문 대자보 편집장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전체적으로 수입이 오히려 과외 아르바이트 할 때보다 크게 줄었다. 반면 글을 쓰기 위한 자료수집비 등의 지출은 크게 늘었다. 결국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미학과 동기생 2명과 함께 월 15만 원짜리 지하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 명은 애초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고등학교 때부터 부모로부터 독립했고, 다른 한 명은 부유층이었는데 아버지 회사가 IMF 위기에 직격탄을 맞아 스스로 자립해야 했다.
우리 셋의 눈으로 가장 이해가 안 됐던 것은 서울대 신좌파 운동권학생들 중 부모 잘 만나 그 돈으로 ‘민중혁명’ ‘노동자 해방’ ‘가부장제 폐지’를 외치는 부류였다. 실제로 서울대 운동권학생들과 충돌한 경우 거의 대부분 부잣집 출신들이 그 상대였다.
당시 나는 이름이 제법 알려진 서울대 페미니즘 운동가와 인터넷상으로 쪽지를 교환하고 있었는데, 한 번은 “가부장제 폐지하자며 아버지 돈 받아 학교 다니고 페미니즘 운동해도 되는 건가?”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이에 그는 “그런 모순의 괴로움을 견디면서 하는 게 운동이다”란 어이없는 답을 보내왔다.
대학교 2학년 시절, 1학년 후배 한 명이 “우리 과 20명 동기 중 부모가 서울대 출신인 친구가 모두 16명인데, 우리 부모님은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라며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곤 “대체 너희들은 어떻게 부모님들의 서울대 출신 성분비율을 조사했냐. 한 자리에 모여 ‘서울대, 손들어!’ 이렇게 조사했냐”고 물어봤다.
서울대에 입학해 받은 충격은, 서울대생들이 자신의 출신성분과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있단 점이었다. 그러다보니 학년 전체의 서울대 출신 부모비율까지 조사되는 것이다.
내 동기 중 한 명은 압구정동 출신으로 서울대 재학 내내 신좌파 운동 리더로 활동했다. 그 친구는 주로 여자후배들과 술자리를 할 때마다 “나는 압구정동 출신이고, 자본가 계급의 아버지를 둔 게 너무 괴로워” 이런 식의 발언들을 자주 했다. 그럼 나는 그에 발끈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진보넷 미학과 게시판에 ‘신좌파 운동가들은 모두 상속제 폐지를 약속하라’란 글을 올리기도 했다. 나는 그 글에서 내 동기 실명까지 거론했는데, 그를 비롯한 신좌파 운동가들 누구도 상속제 폐지를 약속하지 않았다. 나는 그 동기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운동에 가난한 애들 다 끌어들였다가 미처 인생 준비를 못해 낙오되면 대체 누가 책임질 거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는 “원래 운동은 한 명의 영웅이 탄생되기 위해 무수한 민중의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나는 그때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해 그와는 향후 일체 말을 섞지 않았다.”
- ‘1990년대 학생운동은 부잣집 자식들의 고상한 취미였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