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 잡지 > 기타
· ISBN : 9791195423910
· 쪽수 : 332쪽
· 출판일 : 2014-12-12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이준옥 |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던 밤처럼 … 4
오늘의 작가 ⑦
김홍신 소설가 | 문학은 영혼의 상처이며 내 상처를 향기로 바꾸어주는 작업 … 8
▷오늘의 작가 초대작 : 김홍신 | 달빛 … 22
소설
이병렬 | 정치학개론 서설 … 32
박주호 | 맛있는 밥을 주세요! … 72
서지숙 | 늪 … 89
이재욱 | 파랑새를 찾아서 … 107
이준옥 | 향수 … 127
이휘용 | 강남상파 … 148
최명희 | 까만 실크 스카프 … 173
최희영 | 기도 … 189
황인수 | 거미 … 208
김버들 | 선택 <제11회 부천신인문학상 수상작> … 255
비평과 평론
민충환 | 어휘탐색(3) 이규희의 <속솔이뜸의 댕이>를 중심으로 … 276
최현규 | 이문열『금시조』론 … 312
저자소개
책속에서
아마도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밤이었을 거다.
방안엔 잘 익은 숯불이 화로에서 고요히 그 열기를 피워 올려 콩기름 먹인 장판과 삭풍에 떠는 문풍지를 덥혀 주었을 거다. 화로엔 어쩌면 밤이나 고구마가 익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달콤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었으리라. 그 방에 외할머니와 아기인 나는 오두마니 앉아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려 온통 귀를 밖으로 열어 놓고 있다.
스물일곱에 홀로되신 외할머니는 남들에게 청상과부로 불렸다. 아아, 얼마나 시퍼렇게 슬픈 말인가. 청상과부! 푸르른 시절에 남편을 여읜 외할머니는 살아 계셨으면 백 살이 넘으셨으니 꼭 한 세기 전의 여인인 것이다.
외할머니는 딸 하나를 키우시며 숨죽이고 살얼음판을 걷듯 세상을 건너셨다. 잘 벼려진 시퍼런 칼끝보다 더 날카로운 말(言)의 비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딸이 시집을 가 내가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젖이 돌지 않는 딸이 애처로워 나를 품에 안으셨다. 그리고는 밤마다 그 어린 것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아이는 애기단풍잎 같은 손으로 오래도록 남자의 손이 닿지 않았던 할머니의 젖을 만지며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옛날 옛적에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에…… 호랭이가 젤 무서워 하는 것은 곶감이야……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호랭이가 동아줄을 잡고 올라가다 그 동아줄이 끊어져 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래서 수수가 빨갛단다…….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내 정수리에 박혀 혈관을 타고 흐르며 나와 함께 자랐다.
그런 밤이 몇 해 지나고 내 머리가 영글자 옛날이야기에 뒤이어 잠 안 오고, 밖에 흰 눈은 펑펑 내리고, 배고프고 추워 부엉부엉 먼 산에서 부엉이가 우는 밤, 외로움에 소름이 돋는 청상과부 외할머니는 나에게 글을 가르치셨다.
ㄱ에 ㅏ를 더하나 가요, ㄴ에다 ㅏ를 더하니 나라…… 이렇게 나는‘가나다라’를 배우고 ‘아야어여’를 배워 마침내 내 이름을 그리게 되었다. 할머니가 곱게 깎아 손에 쥐어 준 연필에 침을 묻혀 할머니가 써 놓은 내 이름을 삐뚤빼뚤 종이 위에 그렸다.
드디어 나는 읽고 그리다가 종내에는 쓰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나의 육체가 우뚝 서는 게 첫 걸음이었다면, 내 이름을 종이 위에 삐뚤빼뚤 썼던 다섯 살은 나의 정신이 우뚝 선 순간이다. 나의 육체와 정신이 비로소 일체가 되어 우뚝 선 순간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손으로 처음 쓰는 그 순간은 한 개인에게는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한 것 보다 실로 더 위대한 순간이다. 그 순간이 없었다면 인간은 달에 가지도 못했을 뿐더러 모든 예술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쓰는 글의 시작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이름을 쓰던 그 순간이 있다. 내가 애기단풍잎 같던 손으로 내 이름을 처음 쓰던 흰 눈 펑펑 내리던 그 밤, 백석은 아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설국’을 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보리스 파르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를 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처음 쓴 것은 아마도 자신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 처음의 순간이 바로 모든 예술의 시작이다.
우리 소설과 비평의 작가들도 모두 나처럼 그 순간을 지나와 <소설과 비평>이란 이름 아래 있다. 일 년 농사를 지어 <소설과 비평>이란 제호로 지방에서는 정말 드문 순수 소설 동인지를 내고 있다.
벌써 우리는 7번째 소설집을 내 놓는다.
이재욱, 이병렬, 최현규, 이준옥. 최희영. 최명희, 황인수, 박주호, 서지숙, 이휘용…… 이번 동인지엔 소설가 김홍신의 ‘작가 대담’과 함께 특별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동인지가 나오는 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던 밤처럼 흰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붉은 시루팥떡을 해서 책 걸이를 했으면 좋겠다.
-나라의 글이 백성들의 말과 달라 한자와 잘 통하지 아니하여 글 모르는 백성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일이 많아서 내 이를 안타까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두루 편하게 쓰고자 함이라-
568년 전 세종대왕의 말씀이다.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표현력이 빼어난 글을 우리가 읽고 쓸 수 있었을까.
그 분께 감사의 뜻으로 팥 시루떡을 해 놓고 부족한 우리의 이번 <소설과 비평>을 그 분에게 상재하고 싶다.
한 해가 또 간다.
내년의 소설이 벌써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우리 <소설과 비평> 동인들, 기꺼이 두 팔 벌려 내년의 소설을 힘껏 안을 것이다.
2014년 12월 5일
(소설가 / 부천 소설가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