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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도록
· ISBN : 9791196466022
· 쪽수 : 170쪽
· 출판일 : 2018-11-16
책 소개
책속에서
나는 유리잔을 디자인할 때마다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했다. 그러던 중 파리의 고물상에서 마음에 드는 앤티크 와인 잔을 발견했다. 몇 년간 사용해보면서 그 잔들이 지극히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식탁에 근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나는 알레시에서 도자기 식기류를 개발 중이었다. 그 앤티크 잔이 프로젝트를 보완하기 위한 와인 잔을 디자인하는 데 출발점이 되었다. 유리세공 기술자가 일일이 입으로 불어 만든 앤티크 와인 잔들은 모양이 조금씩 달라서, 나는 시간을 들여 그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완벽한지 살펴보았다. 그렇게 선택한 잔의 라인을 컴퓨터 드로잉으로 재현한 다음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정확히 내가 원하는 특성을 부여했다. 다음엔 바닥 부분을 더 키워 볼 bowl 부분이 좀 더 균형 잡힌 모양이 되게 한 후, 완성된 윤곽선을 가지고 틀을 만들었다.
디자이너를 산업에서 생산 가능한 형태를 잡아주는 기술적 전문가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생각처럼 간단한 일은 아닌데, 디자인에는 딱 정해진 모범답안이란 게 없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해결책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온다. 형태란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나올 수도 있지만, 때로는 직관과 우연에 의해 도달하게 될 때 더 큰 만족을 준다. 그러니 신뢰할 수 없는 자료라는 이유로 직관과 우연을 적합한 형태를 찾는 방법에서 배제하는 건 옳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건의 겉모습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한다는 것은 부정할 순 없지만,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거기에 치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외양에 조금만 덜 신경 써도 우리는 물건이 가진 다른 가치들을 더 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겉모습보다 그 가치들이 더 부각되도록 디자인을 하는 것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한 걸음일지도 모른다.
도쿄에서 ≪슈퍼노멀≫ 전시를 하던 즈음, 우리는 런던에서 새로운 스튜디오 건물로 이사했다. 공간은 우리에게 필요 이상으로 넓었다. 처음 계획할 때는 사무용 공간을 제외한 부분을 회의실로 남겨두었으나, 회의실이란 항상 지루하게 사용되기 마련이고 회의는 짧을수록 최선이기에 나는 회의실을 만들기가 꺼려졌다. ≪슈퍼노멀≫에 전시할 물품을 찾는 일을 하면서 일반적인 디자인 매장의 범위 바깥에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쿄에서 야나기 소리 2011년 유명을 달리한 일본 산업디자인의 선구자 의 매장에 갔던 일을 기억하면서 ‘슈퍼노멀’을 주제로 사물을 선정하여 현대식 철물점을 연다는 생각을 이 공간에 구체화했다. 현재까지 약 9년 동안 운영해왔고 여기에 온라인 매장도 결합했다.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그 자체로 도움이 된다. 루스 도나히가 구매와 디스플레이를 담당하지만 내가 여행 중에 눈길을 끄는 물건 세 점 정도를 사와 판매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