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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7605208
· 쪽수 : 138쪽
· 출판일 : 2021-10-01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혈통 13
가래 굴리기 14
송정리松亭里 16
허유재虛留齋 18
지축紙杻 20
미나리 22
역대상 1-9장 24
기러기 26
달개비꽃문門 27
산딸나무 28
큰 것은 작게, 작은 것은 크게 29
이명耳鳴 30
석류를 깨뜨리며 32
내변산 실상사지에서 34
직소폭포 37
제2부
마장호수 41
호텔 샤또 42
인간극장 44
풋대추 물들다 46
황사 47
천주교 의정부교구 일산성당 48
검은 새 50
꽃도 꽃을 꺼리고 51
연어알 52
전 부치기 53
느티나무 56
삼척 57
설문雪門 · 4 58
설문雪門 · 5 59
설문雪門 · 6 60
설문雪門 · 7 61
제3부
꿈 65
보츠와나 66
끔찍하다 68
입춘 69
겹치다 70
역사 71
가창오리 떼 72
호수공원 74
동의보감 76
따뜻한 눈물 78
가시나무 79
한글 공부 80
일모도원日暮途遠 83
시詩 · 1 84
시詩 · 2 85
어느 떠돌이별 이야기 86
제4부
열대야 91
고양이 92
추도예배 94
닭곰탕 95
갈비탕 한 그릇 96
자귀나무 97
전설 98
이웃사촌 99
나무도 스스로 움직인다 101
봄볕은 따사롭고 102
고등학교 반창회 103
꼬마물새 104
극락조 106
뒤뜰에서 107
폐기물 스티커 108
반성문 109
체육공원에서 111
이사 112
해설┃여국현 113
평범한 일상의 비범한 시선
저자소개
책속에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색한 서울역 광장
굵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늦은 출근길에 종종걸음 치는 행인들 사이로
얇은 옷의 한 노숙자가 사내를 가로막았다
너무 추워요, 따뜻한 커피 한 잔만 사 주시면…
가던 길 멈추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내
자신의 점퍼를 벗어 노숙자의 꾸부정한 어깨 위로
팔을 둘러 입혀 주었다
장갑을 벗어 차가운 손에 끼워 주었다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쥐어 주었다
사내는 총총히 가던 길을 갔다
포근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 「따뜻한 눈물」 전문
그대로 풍경이다.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사실 자체를 가감 없이 묘사하고 있는 이 시는 실제로 지난해 겨울, 서울역 광장에서 있었던 실화를 보도한 신문기사 를 보고 쓴 시라고 시인 자신이 밝힌 바 있다. “굵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광장에서 “얇은 옷”을 걸친 노숙자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자신의 점퍼를 벗어”노숙자에게 “입혀 주”고, “장갑을 벗어” 그의 “손에 끼워” 준 채 “총총히 가던 길을” 가는 사내, 그 사내가 바로 시인 임채우요, 그 사내의 마음이 바로 임채우의 시다. 저 한 번의 호의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광장에 쌓이는 “포근한 함박눈”처럼 그의 시는 우리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평범한 일상의 빛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비범한 시각, 치장하지 않은 단순, 소박한 진술, 그러나 큰 울림, 시인 임채우의 시다. 평범한 일상을 포착하는 시인의 비범하고 따듯한 시
선은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다. 다음 시를 보자.
집오리 에미가 새끼 열넷을 거느리고 8차선 도로 앞에서 뒤뚱거리는 행진을 멈추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경찰관이 오리 떼가 무사히 건널 때까지 차량 통행을 얼마나 가로막았다. 대로를 건넌 오리 가족이 궁둥이를 흔들며 벼가 파릇파릇 자라는 무논으로 사라졌다.봄볕은 따사롭고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 「봄볕은 따사롭고 북한산일기 · 34」 전문
또한 일상의 풍경이다. “새끼 열넷을 거느리고 도로를 건너려는 어미 집오리”와 “오리 떼가 도로를 무사히 건널 때까지 차량을 막아주는 경찰관”, 이런 모습이 우리의 일상인 한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시인의 마음은 우리 마음까지 봄볕처럼 따사롭게 밝혀준다. 현란한 비유도, 무슨 대단한 사유도 없는 듯하지만,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에 환하게 밝혀질 등불과 입가의 미소가 그려진다. 이런 시 앞에 사유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시는 더러 이래야 하는 것이다. 어디 사람과 동물뿐인가.
산딸나무 하얀 나비 떼
마름모형 꽃이 실은 잎이라나
아파트 단지 화단 한쪽
비죽비죽 우듬지 돋고
산딸나무 꽃잎 지고
잎 색깔 열매 맺고
타고난 대로 고스란히
잎인 듯 열매인 듯
크지도 작지도 별나지 않게
투정도 시기도 다툼도 없이
있는 둥 마는 둥
엷은 초록으로
― 「산딸나무」 전문
아파트 단지 화단에 핀 산딸나무가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타고난 대로 고스란히” 요란스럽지 않게, “크지도 작지도” 않고 “별나지 않”은 이 산딸나무들은 “투정도 시기도 다툼도 없이/ 있는 둥 마는 둥” 피어 있다. 그걸 봐내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정겹고, 그 마음에 떠올랐을 올망졸망 별나지 않게 “투정도 시기도 다툼도 없이” 살아가는/ 살아갔으면 하는 이웃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있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제 모습, 제자리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들이 그렇게 제자리 지키며 있기에 세상은 굴러가는 것. 그러니 그 작고 보잘것없는 평범한 것들이야말로 진실로 큰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자주 잊히는 이 진실을 시인은 또한 놓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