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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7702020
· 쪽수 : 244쪽
· 출판일 : 2022-01-20
책 소개
목차
*여는 이야기 ‘바다 건너 당신’으로 만나기 4
*등단작
김미경 | 노인이 된다는 것 14
김홍기 | 열쇠가 지붕 위에 올라앉은 날 18
유금란 | 토씨를 바꾸면 행복해진다 23
정동순 | 헛간이 허물어졌을 때 28
홍진순 | 나치 소녀(Nazimaedchen) 32
*음식 이야기
김미경 | 탕수육 두 접시 40
김홍기 | 짜장면을 먹을 때면 순금이가 따라온다 44
유금란 | 족발 권력 49
정동순 | 타말리 먹는 밤 54
홍진순 | 사랑 역시도 불고기를 통해서 온다 58
*신발 이야기
김미경 | 집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63
김홍기 | 황토색 맹꽁이 68
유금란 | 굽을 내리다 74
정동순 | 하얀 운동화가 있는 정물화 79
*모국어로 수필가가 되기까지 83
*홍진순
더블린에서의 일탈 분재 98
분재 104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불러보세요 112
우리 정원의 작은 기적들 116
첫사랑의 수수께끼 121
행복을 느끼는 순간 127
*정동순
굴뚝 수리 132
눈산 137
호미와 연필 141
호박이 넝쿨째 굴러갔다 146
A4와 레터 사이즈 151
*유금란
뜨거웠던 날은 가고 156
바다의 기척 161
원더미어 호수의 시 165
리카의 주근깨 169
모고에서 가져온 바람 소리를 듣다 174
*김홍기
누룽지 이야기 182
엄마의 성경책 187
우리 동네 풍경 하나 191
질긴 것 196
하프타임 200
*김미경
구걸 206
내 귓속에 매미 한 마리 210
빈터 214
손 이야기 218
조선배추 222
*함께 읽고 서로 나누는 이야기 227
*수필U시간을 함께하면서 239
저자소개
책속에서
배추 앞에서 발이 멎었다. 볼수록 탐스럽게 잘 생겼다. 시드니 7월, 이맘때쯤의 배추는 그 튼실한 자태와 초록빛이 특히 아름답다. 다른 볼일로 나왔고, 집에는 아직 김치가 많이 남아 있음에도 마트 앞에서 싱싱한 배추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실한지 내 머릿속 에서는 벌써 배추에 칼집을 넣고 있다. 칼끝에 힘을 주면 쩍 벌어지면서 드러날 노란 속살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치마폭처럼 겹겹이 쌓인 초록잎 속의 노랑은 여인네 속곳처럼 은밀하기까지 하다. 어느새 입에 침이 고인다. 노랑 속잎에서 나온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지고 있다. 머리채를 잡고 슬쩍 칼집을 한 번 더 넣고는 풀어 놓은 소금물에 담근다. 소금에 절인 배추는 얼마나 탄력 있고 야들야들한가. - 김미경, <조선배추>에서
초등학교 4학년쯤의 일이다. 그해 초여름, 우리 집 검은 염소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 엄마는 그중 한 마리를 팔려고 오일장이 서는 점등으로 끌고 갔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점등에 있어 등굣길에 모자가 동행을 했다. 학교를 파한 후 장에 가보니 그때까지 엄마는 참기름 집 담장 밑에 염소와 같이 서 있었다. 새끼 염소는 앞발을 들고 폴짝 뛰어 머리로 들이받는 자세를 하며 나를 맞이했다. 파장이 되어 간 듯 상점들 앞 차일이 걷히고 상인들도 저마다 짐 꾸리기에 바빴다. 그때 나이 지긋한 아저씨와 엄마의 흥정이 시작되었다. 만원은 받아야 한다는 엄마와 8천원이면 사겠다는 아저씨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결국 8천원에 받고 새끼 염소를 묶은 줄을 아저씨에게 건넸다. 그런데 새끼염소는 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마 발 앞에 붙박고 서서 엄마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저씨가 줄을 당기니 따라가지 않겠다는 듯 앞발로 제 몸을 버텨냈다. 목에 걸린 줄이 가을 운동회 줄다리기처럼 팽팽하도록 아저씨와 어린 염소의 실랑이가 계속됐다. - 김홍기, <질긴 것>에서
드디어 시드니에서 고향 맛이 듬뿍 밴 족발이 탄생했다. 명문 족발집에서나 전승한다는 씨앗 양념간장을 남겨 냉동고에 보관했다. 그 후로 나는 ‘족발 삶는 여자’가 되었다. 뼈를 발라내고 랩에 싸서 예쁘게 모양 잡은 족발은 선물용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가족처럼 지내던 지인은 뒤뜰에 야외 가스통을 설치해주고 커다란 들통까지 사주면서 나의 족발을 요구했다. 그즈음 나는 열심히 족발을 삶으면서 지인들과의 관계도 쫄깃하게 다져 나갔다. ‘겉보기와 다르다’느니, ‘어쩜 이런 것까지 잘하느냐’는 등의 말에 으쓱해져서 더 열심히 춤을 추었던 것 같다. 그러나 춤추는 고래도 한때라고 몇 년 지나자 점차 시들해지더니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 유금란, <족발 권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