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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건축 > 건축이야기/건축가
· ISBN : 9791197992308
· 쪽수 : 316쪽
· 출판일 : 2022-10-17
책 소개
목차
책을 쓰며-걱정불안욕심쟁이
일. 마흔 전 우리 회사
마흔에는
시작은 연인
바람, 바람, 바람
누구에게나 권태기
동료, 동지, 팀워크
이. 화산분출형 계획자
왼손잡이야
여자는 살림 밑천
다행이 만났어
건축하고 그림 그립니다
삼. 집요집중형 해결사
부지런한 셔터맨
직조와 구축, 디테일
이철의 글자들
매일 수집, 조사, 글
사. 등장하고 싶은 건축가
일 찾아 공공미술
드디어 건축
책 쓰고 읽는 주말주택
무국적 상가
해와 달을 담은 다세대주택
직주일체 실험실습
쏙닥쏙닥 신혼부부의 작은집
오. 진짜 건축하기
작품 맞아
꿈을 빚어주는 직업
주택 말고 주거
살아가는 공간이 중요해
참여설계로 맞춤건축을 해
재료의 맛
육. 아쉬움은 내 몫
건물로 말할 수 밖에
결국은 대화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서버에 잠들어
칠. 워커홀릭 분리공법
생활에는 불필요하지만
삶에는 필요한 것들
먹는 게 남는 거니까
질퍽거림이 좋아
르누아르를 찾아
아무튼 떠나
안녕 바이든
젊음 충전
팔. 결국은 피리라
아직도 사모님
우리는 망했다
결국은 피리라
저자소개
책속에서
시작은 연인
친구 소개로 강남역 서울극장 앞에서 만난 이철은 모든 것이 무성의했다. 그래도 소개팅인데 예약해 놓은 식당에서 만나진 않더라도 만나서 갈 식당 정도는 알아보고 나왔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기에 우리는 12월23일 차가운 공기를 헤집고 뒷골목으로 어영부영 걸었고, “뭐 좋아하세요?” “아무거나요”라고 아무 말이나 하다 눈에 보이는 우동집을 들어갔다. 하필 그 식당은 자율배식 방식이었고 먹기 좋아하고 내숭 질색인 나도 차마 첫 만남에서 식성껏 담을 수 없다 보니 한 두 접시 쟁반에 올려 담았다. I의 첫인상은 어쩐지 고지식하고 깐깐해 보이는 모습보다 식사장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식의 자율배식 식당이 더 강렬했다.
불평불만을 반찬으로 삼아 씹어낸 우동을 소화시키기도 해야 했고, 여기서 끝내면 이 소개팅 남은 ‘자율배식남’으로 남을 것 같아 “간단히 술이나 한 잔 해요” 하면서 뒷골목의 꼬치오뎅집으로 이끌었다. 사실 남자가 일방적으로 스케줄 잡아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데리고 다니는 데이트를 질색했고, 뭘 하고 싶고 뭘 먹을지 물어봐 주거나 선택권이 나에게 있는 관계를 더욱 좋아한다. 그러니 1차에서 다소 불만스러웠다고는 하나 그날의 만남과 처음 만난 남자가 의외로 그렇게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주르륵 차려 입은 커플이 앉아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강남역 일대의 소개팅 맛집으로 부르지 않은 것이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이어진 2차에서 우리는 자정까지 놀았다. ‘놀았다’라고 쓸 수 있을 만큼 사실 그날의 대화는 즐거웠다. 내 소개팅 조건은 항상 같았는데, 1.비흡연자(담배 자체를 혐오하는 나는 담배를 피우다 끊은 사람도 제외했다. 언젠가 다시 필 수 있다는 우려보다 그 정도로 독함이 있는 사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그림 좋아하는 사람(내가 여가시간에 항상 갤러리를 가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만약 갤러리에서 아는 척 떠들어대는 성격의 사람이면 거부했다) 3.건축계 사람(설계녀는 설계남을 피하지만 오히려 그래야 내 야근과 생활을 이해해 줄 수 있다 생각했다) 이렇게 3가지 정도였다. 이 3가지는 만나기 위한 조건이고 그 다음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도전을 즐기거나 이해하고 변덕이 심한 날 받쳐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했다. 그날도 이런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그림, 미술, 예술, 문화에 대한 얘기들을 했다.
첫날 파악한 이철은 이런 것들에 대해 해박하거나 대단히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호기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런 것들에 대한 내 이야기들을 잘 들어주었고, 흥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천천히 흡수할 수 있는 성향이었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타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평온함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때문에 이철과 영화도 보고 갤러리도 가 보고 싶었다.
하필 두 번째 만남은 크리스마스였고, 두 번째를 굳이 그 날 한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지만, 딱히 피하는 것도 이상해서 극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날이 날인만큼 빈손으로 가기는 어색했고, 과한 선물도 수상해서 고민 끝에 파란색 털 고양이 핸드폰 고리를 샀다. 내가 블루캣 한 마리는 내밀자 이철은 작은 에세이 책 한 권을 줬다. ‘아 그래, 이정도 챙겨온 정도면 괜찮네!’하고 안도를 했던 크리스마스였다. 그렇게 이후 두세 번 만나고 2006년 12월 31일이 되었고, 카운트다운을 함께하기 위해 생전 처음 종각에 나갔고 2007년 01월 01일 연인이 되었다.

불안걱정시샘욕심쟁이
심야라 불리는 새벽 4시. 한때는 이 시간에 퇴근을 하는 것도 다반사였지만, 최근에는 오롯이 잠의 시간으로 보내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불면증 혹은 걱정증이 있어 지금처럼 종종 거실의 불을 켜고 앉아 SNS 창을 뒤적이거나 멍하니 풀벌레 소리를 듣거나 차를 한 잔 타서 예민한 신경을 달래보곤 합니다.
불안, 걱정, 시샘, 욕심, 질투는 모두 제가 데리고 사는 아이들입니다. 어려서 부터 어쩐지 이런 감정들과 친했고, 주변의 많은 이들을 시샘하고 질투하다 보니 그렇지 못한 자신을 다그치게 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곤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 낼 만큼 능력이 출중해서 원하는 스펙을 쭉쭉 쌓거나 질투하는 이들을 앞서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량화된 것들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은 언제나 저에게는 멀리 있었고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좀 더 열심히 해 봐’ 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지만 전 사실 그보다 더 할 수는 없을 만큼 제 딴에는 최선을 다했기에 ‘더’ 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좌절도 많이 하고 일희일비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제가 속하고 속하려 하고 달리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았고, 오롯이 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 남보다 조금 잘 하는 것을 보기로 했고 저의 걸음대로 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퇴사였고, 처음 잘 할 수 있는 것에 매달려 본 것이 그림이었고, 다시 내 방식대로 가 보기로 한 것이 우리 회사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