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일간
|
주간
|
월간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조선 무인

조선 무인(武人)의 긍지(矜持)와 한(恨)

(임재선의 무예역사 비평)

임재선 (지은이)
정음서원
19,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17,100원 -10% 0원
950원
16,150원 >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11st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G마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서점 유형 등록개수 최저가 구매하기
알라딘 판매자 배송 6개 14,570원 >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조선 무인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조선 무인(武人)의 긍지(矜持)와 한(恨) (임재선의 무예역사 비평)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문화예술사
· ISBN : 9791198260574
· 쪽수 : 198쪽
· 출판일 : 2024-05-25

책 소개

조선시대에 무과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무예 문화는 우리 민족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러한 무예 전통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 위용를 떨쳤으며, 또한 간고한 역경(逆境)을 죽음을 무릅쓰고 헤쳐왔기 때문에 그 고비마다 구구절절한 한(恨)이 서려 있다.

목차

■ 축사 / 도기현 11
■ 서평 / 전홍식 12
■ 서평 / 임한필 17
■ 여는 말 22

제1부
제 1 편 무학당(武學堂) 석비(石碑)가 전하는 충주 역사의 긍지(矜持)와 한(恨)

1. 무학당 석비에서 느끼는 회한(悔恨) 29
2. 고려 태조가 하사한 고을 이름 충주(忠州) 34
3. 몽고군을 물리친 충주 백성들 37
1) 13세기 초 고려와 몽고의 관계 37
2) 산성해도입보(山城海島入保) 전략과 제1차 충주성 전투 39
3) 1253년 몽고의 5차 침략과 제2차 충주성 전투 42
4) 충주성 전투의 승리 결과 44
4. 충주 백성들이 겪은 임진왜란 46
1) 달천벌 싸움 46
2) 충주 의병 - 백기(白旗)장군 조웅 49
3) 충주 무학당(武學堂)과 왜놈 목을 치는 행사 50
5. 충주 동학농민의 항일항쟁 패배와 좌절 52
1)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과 동학의 발생 52
2) 1차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 53
3) 제2차 동학혁명 (반외세 항쟁) 56
4) 충주 동학농민군의 항쟁과 성두환(成斗煥(漢)) 57
5)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의 깃발 73
6. 무학당 석비에 서린 역사여행을 마치며 75

제2부
제 1 편 감사군(敢死軍) 대장 정기룡 장군의 전적(戰績)

1. 서론 80
1) 임진(壬辰)년 조선의 상황과 전쟁의 개괄 80
2) 정기룡 장군 전적의 현대적 의의 85
2. 정기룡의 성장과정 87
3. 임진왜란(壬辰倭亂) 90
1) 청년 장교의 지략 90
2) 명마와 기병 전술 92
4. 상주성 탈환 95
1) 마상재(馬上才)와 용화동 동민(洞民) 구출 95
2) 화공법으로 상주성 탈환 97
3) 감사군(敢死軍) 대장 100
5. 정유재란 101
1) 1597년 8월, 지략과 기예의 승리 용담천 전투 101
2) 1597년 9월, 담력으로 가또오(加藤淸正) 군을 멈춰 세우다 105
3) 절충장군(折衝將軍) 정기룡의 활략 106
6. 임진왜란 후 114

제 2 편 정기룡 장군의 무예 실력과 조선의 무과 제도
1. 정기룡 장군의 무예 실력을 알 수 있는 방법 117
2. 무과제도와 정기룡 장군의 무예실력 119
3. 무과시험의 내용 122
4. 실제 전투에서 구현되는 무예 125
1)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126
2) 기창(騎槍) 127
3) 기창교전(騎槍交戰) 129
4) 격구(擊毬) 131
5. 전투에 응용된 민간전승 무예 136
1) 마상재 136
2) 석전(石戰) 143

제 3 편 조선의 무인 양성정책과 명장의 조건
1. 조선시대 문무겸비의 무인양성 정책 147
1) 병서와 역사 및 경전 과목에 대한 논란 147
2) 이론 과목의 내용 149
3) 무과 시험의 이론 과목 비중 150
4) 실전에 나타나는 무관의 지략(智略) 151
2. 문무겸전의 역사 전통과 명장의 조건 156
1) 무예교육의 역사 전통 156
2) 명장의 충분조건 - 인격과 품성 158
3) 정기룡의 인품 159
4) 정기룡 장군의 위업 - 군사조직가이자 선봉장 160
5) 명장을 따르는 군대의 위엄 164
3. 현대의 명장을 기다리며 166

제 4 편 조선의 무인과 무예제도의 현대적 의의
1. 조선시대 무예제도의 재평가 167
2. 조선시대의 무인 169
1) 무인(武人)에 대한 인식 169
2) 무인들의 무예수련 목적 171
3) 무과의 시험범위 173
4) 무과 교육기관은 없었는가? 175
5) 무예수련 방법 177
3. 조선시대 무과제도 181
1) 무과제도의 성립 181
2) 식년무과(式年武科)와 별시무과(別試武科) 183
3) 취재시험(取才試驗) - 도시(都試) 184
4. 무과제도가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 186
5. 조선시대 무예 전통의 계승을 위하여 190
1) 전통 무예의 가치 190
2) 전통 무예 복원을 위한 제언 193
3) 반세기의 반목을 씻기 위한 민족의 살풀이 196

저자소개

임재선 (지은이)    정보 더보기
●무예인, 24반무예 전수자, 호(號)는 宇玄(우현) ●민족무예도장 서울·경기 경당 관장 역임 ●충주 무학당 관장(2023 ~ 현재) 우현(宇玄) 임재선은 조선 전통의 24반무예를 전수받고 그 맥을 잇는 업을 사명으로 삼기를 자부하는 무인이다. 애초 유도를 전공하였으나(중앙대학교 유도부 창립, 초대회장 역임), 1990년 이후 <무예도보통지>를 바탕으로 전통무예를 복원한 임동규 선생으로부터 24반무예를 전수받고, 민족무예도장 서울·경기 경당 관장을 역임하면서 동국대 성균관대 성신여대 인하대 등에서 시민, 학생 등 2000여명에게 24반 무예를 직접 전수했다. 그 후 무예 연구를 위해 학업을 지속해 석사학위를 받고 중앙대·고려대에서 교양체육으로 전통무예를 강의하였다.
펼치기

책속에서

1. 무학당 석비에서 느끼는 회한(悔恨)
필자가 우연한 기회에 충주와 인연을 맺어 2023년 2월부터 충주 무학시장 옆에 6칸 정도 크기의 <무학당>을 만들고 무예를 가르치며 생활한지 바야흐로 1년이 지나간다.
당시에 건축업을 생계로 삼고 있던 필자를 이길로 이끌어 준 것은 바로 충주 시내 대봉교가 있는 무학시장 입구 천변 한켠에 묵묵히 빛나지 않게 서 있는 돌비석이었다. ‘조선의 무예’를 늘 가슴에 품고 생각해 왔던지라 자세히 읽어 보았다.

“우리 마을은 옛날에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곳으로, 일명 숲거리(봉방동과 역전동 경계선 따라 옛날 소로길 양옆)라고 불리어 왔으며 조선조 숙종 39년(1713년)에 이곳에 무학당(武學堂)이라는 건물 6칸을 세워서 (봉방동 7번지 일대) 감영의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곳으로 매년 가을 현 삼원국민학교 부근에 단(壇)을 설치하고 무학당 좌우에 기치창검을 나열시킨 후, 충주영장과 연원찰방이 갑옷을 갖추어 입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호통을 치며 왜장 가등청정의 허수아비를 효수하는 무예의 시범을 보이던 곳으로 이때 인근의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 1991년 11월 11일 설치한 무학당(武學堂) 석비의 비문

이 비석의 내용은 조선시대 군인들의 훈련과 무예 활동에 대한 기록인데, 필자는 30여년 전 1990년대부터 조선 군인들의 무예를 전수받고 시범을 보이고 지도해왔던 사람으로서 조선 무인의 구체적 활동이 적힌 글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30년 전에 가르쳤던 조선시대 무예 동작이 하나 하나 온 몸에 살아나고, 이 지역에서 조선의 군인들이 펼친 가등청정 허수아비 효수 장면이 영화를 보듯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이 돌을 만난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 지역에서 조선시대 무예를 전수하고 충주지역 군인들의 전통문화를 복원해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충주 무학시장 옆에 무예수련장을 만들고, 똑같이 <무학당>이라고 이름지어 3월 25일 개관식을 열었다.
개관식을 하고 1km 정도 거리에 충주관아가 있다고 하여 걸어서 찾아가는데, 초행길이라 그만 방향을 잃고 말았다. 길가는 시민들에게 충주관아를 물어보니 모른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다시 물어보니 한 청년이 ‘관아 공원이요!’ 하고 되묻길래 얼떨결에 그렇다고 했더니 가는 길을 잘 알려줘서 찾아간 적이 있다.
충주관아에 앉아서 500년 조선을 지키던 충주관아를 공원이라 하는 것이 옳은가, 물론 3.1운동 선언 장소를 파고다 공원이라 부르기에 그럴수도 있겠지 하고 넘기고 말았지만 마음 한 구석 허전했다.
또 내 딴에는 감동을 받은 무학당 석비도 쓰레기봉투를 수거하는 곳을 알리는 표지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며, 주변은 주차장으로 방치되어 있다. 그래서 시장상인들이나 주민들에게 시장 앞에 돌이 있는데 그 연유를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모른다는 대답이다. 그래서 ‘이곳 무학시장의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느냐’고 질문하면 ‘무학소주의 무학인가’, ‘무학대사가 이곳에 살았었나’, ‘학이 춤추던 곳인가’, ‘춤을 배우는 곳인가’ 등등의 대답이 돌아왔다.
시민들 대부분 충주의 역사를 잘 알고 자부심 속에서 생활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유구한 반만년 역사니 배달의 민족이니 하는 소리들은 입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나,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을까? 만감이 교차되면서 무학당 석비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충주의 역사를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유구한 세월동안 수많은 긍지(矜持)와 한(恨)의 사연들이 충주 역사의 날과 씨를 이루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석비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 무학당(武學堂)은 1713(숙종 39) 년에 건립되었고, 그곳에서 충주영장과 연원찰방이 갑옷을 갖추어 입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호통을 치며 왜장 가등청정의 허수아비를 효수하는 무예의 시범을 보이면 인근의 구경꾼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이 행사는 180년간 지속되다가 1893(고종30) 년에 폐지되었고, 이듬해 갑오개혁(1894)으로 무과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아예 박제가 되었다.
이 사연을 새겨 생각해 볼수록 그 속에 깊이 아로새겨 있는 한(恨) 많은 충주의 역사가 일렁이는 파도처럼 일어난다. 그것을 필자는 세 가지 질문으로 정리해 보았다.
첫번째, 무학당을 설치하고서 왜장 가등청정의 목을 베는 행사를 무엇 때문에 왜 충주에서 했을까. 조선의 역사문화에서 목을 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사는 이미지가 격렬해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충주에서는 이러한 행사를 매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강렬한 문화행사가 20년도 아닌 180년 간이나 지속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편적으로 군인들에게는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정신과 백성들에게는 하나의 축제라는 것이 전제 되지 않고서는 한 행사가 100년을 넘어 지속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두번째, 그토록 길게 이어온 전통의 유산이 1893(고종30) 년에 갑자기 폐지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통의 문화행사를 유지하고자 하는 동력보다도 강력한 뚜렷한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1592년 임진왜란 시기와 1893년~1894년 시기의 조선과 충주에서 벌어진 일과 그 역사적 상황을 알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틀림없었다. 역사 기록은 그 한 많은 사연들을 구구절절이 보존하고 있었으며, 충주 사람들은 깊은 무의식 안에 3천 여명 이상 희생된 임진년의 역사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121년이 지난 1713년 조선의 군제 개편으로 무학당이 충주에 설치되자 무의식 안에 감춰져 있던 그 한맺힌 임진년의 기억이 의식으로 살아나 응당 무학당에서는 가등청정 허수아비의 목을 베어서라도 그 한(恨)을 달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80년이 지난 1893년 무렵, 끝내 내부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서구 열강의 침탈 야욕 아래 예속의 길로 빠져들고 있는 조선 조정은 특히 일본의 압력으로 유서 깊은 행사를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894년 대일(對日) 항쟁에 나선 동학 농민 혁명이 패배하고 일본군에게 진압되자 그 한풀이 행사는 영구히 박제(剝製)가 될 수 밖에 없었으며,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형해(形骸)만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번째, 충주의 자부심으로 면면히 내려오는 호국충정의 정신마저 전통 행사의 폐지 따위에 밀려 가뭇없이 사라졌을까? 역사 자료는 충주인들이 민족의 중요한 고비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목숨을 걸고 앞장 서서 나섰음을 증명한다. 그토록 면면히 흐르는 충주의 역사 전통과 충주인의 기개는 그 기원과 뿌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필자는 충주 역사 전통의 발전 과정에서 고려 시대가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찾아 냈다. 충주는 후삼국의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공으로 충주(忠州)라는 지명을 태조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았으며, 몽고 침략시 관군이 아닌 백성의 힘으로 충주성을 지키고 승리하여 전쟁을 종결시키고 강화조약을 맺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 공으로 충주에서는 일찌기 1250년대에 모든 노비가 양민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감동은 몽고군을 물리친 것보다도 더 뼈에 사무치게 대대손손 전해왔을 것이다.
필자는 충주에 와서 무학경당을 세우고 생활한 지 1년이 지나면서 무학당 관장으로서 검술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학당 석비에 적힌 글대로 민족문화행사를 복원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충주시민이 된 사람으로서 충주의 역사와 전통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충주의 역사문화 복원과 민족정신의 계승 차원에서 일본장수들의 목을 베는 행사를 열고 <무학당>에서부터 충주관아까지 행진하며, 역사·문화 공연 등을 펼쳐 보이고 싶지만, 그 박제가 된 형식만 복원해서는 아니 되겠고, 진실로 그 역사에 맺힌 한(恨)을 풀 수 있는 길이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 나름으로 자료를 찾아 궁구하여 충주인의 긍지(矜持)와 한(恨)의 날과 씨를 이루고 있는 충주의 역사를 소개한다.  필자는 무예를 가르치는 체육인으로서 내로라 하는 역사학도는 못 되지만 이 글이 충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토론 거리로 쓰인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포스팅은 제휴마케팅이 포함된 광고로 커미션을 지급 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