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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91198762955
· 쪽수 : 316쪽
· 출판일 : 2025-03-26
책 소개
목차
머리말
1부.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그 청춘의 초상
1. 고종의 통역도 맡았던 ‘신여성’, 조선의 앞길에 등불을 켜다
- 미국의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한 28살 김란사
2. 자신에게 엄격했던 반듯한 청년, 미국 최초의 한인촌을 세우다
- 미국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한 27살 안창호
3. 조선인 1호 볼셰비키 혁명가, 아무르강에 혁명의 꽃으로 지다
- 33살에 처형당한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
4. 샌프란시스코에서 울린 3발의 총성, 일본의 앞잡이를 처단하다
-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한 32살 장인환
5. 세 발의 “탕, 탕, 탕!”, 세 번의 “코레아 우라!”
- 하얼빈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30살 안중근
6. 이토가 처단되었으니, 을사오적을 처단하리라
- 매국노 이완용을 비수로 찔러 치명상을 입힌 22살 이재명
7. 감시 대상 ‘12310’번 의열단원의 찬란하고 슬픈 독립투쟁
-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26살 김익상
8.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10대 독립운동가의 ‘불멸의 순수’
- 독립 만세운동을 하다 옥사한 18살 유관순
9. ‘동대문 철물점 홍길동’, 수백 일경과 벌인 전설의 총격전
-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34살 김상옥
10. 황해도를 뒤흔든 투사, ‘수탈의 첨병’을 응징하다
-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34살 나석주
11. ‘대한독립’과 결혼한,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 고문당한 몸을 추슬러 미국으로 유학간 35살 김마리아
12. 일제의 압제와도 싸우고, 참혹한 궁핍과도 싸우다
-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독립운동을 하던 33살 박자혜
13. ‘신일본인’에서 ‘독립투사’로, 짧고 강렬한 반전의 삶
-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32살 이봉창
14. ‘‘중국 백만 대군이 못한 것’을 해낸 스물넷 청년의 ‘의거’
- 훙커우 공원 폭탄 의거를 수행한 24살 윤봉길
15. 함정수사에 걸려든 미완의 거사, 상하이 ‘육삼정 의거’
- 주중 일본 공사 암살을 시도했던 37살 백정기
16. 마지막 여름방학,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 일본 유학 중에 고향에서 여름을 보낸 25살 윤동주
2부. 돌아온 독립운동가들, 그 청춘의 초상
17. 영특한 소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한 정치가가 되다
-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15살 김규식
18. 26년간 임시정부 이끈 민족주의자의 조국 광복을 위한 풍찬노숙의 역사
-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친 30살 김구
19.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앞당긴 ‘샌프란시스코’의 총성
- 일본의 앞잡이인 미국인 처단을 시도한 24살 전명운
20. 여성 해방은 경제적 자립에서 시작된다
- 경성에서 여성 직업 교육에 매진한 30대 중반의 차미리사
21. 20대 의열단장, ‘현상금 100만 원’의 사나이가 되다
-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열단장이 된 21살 김원봉
22. 단발머리의 ‘모던 걸’, 또는 ‘코레예바’의 사랑과 혁명
- 모스크바에서 대학에 다니던 28살 주세죽
23. ‘파수꾼’으로 임정과 함께한 부부, 분단 조국에서 ‘이산’의 비극까지
- ‘동지 결혼’하여 항저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20대 연미당과 30대 엄항섭
24. 창공을 날아올라 ‘일왕의 궁궐’ 폭격을 꿈꾸다
- 중국 공군에서 선전 비행을 준비하던 34살 권기옥
25. 권문세가의 담대한 셋째딸, 임정의 밀사로 압록강을 여섯 번 건너다
- 난징에서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은 35살 정정화
26. 그해 여름, ‘돌베개’를 베겠노라 다짐하다
- 삼천리를 걸어 임정에 합류하고 광복군이 된 27살 장준하
참고문헌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일제는 두 사람이 법정 최고형을 받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일랜드계 미국인 변호사 세 사람의 적극적인 변호에 힘입어 전명운은 1908년 6월 27일 증거 불충분으로 가석방되었다. 장인환은 그해 12월 23일 사형을 면하고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로 25년 금고형을 받아 샌 쿠엔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배심원들도 이 거사가 애국적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참작한 듯하다. 먹고 살기 위해 이국땅으로 이민 온 무명의 젊은이는 조국을 위한 의거의 결과 11년 동안 징역을 살아야 했다.
인력거를 탄 이완용이 그의 앞을 지나갈 때 이재명은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공격은 주효하여 인력거 주변은 피가 흥건하게 흘렀다. 목적을 이루었다고 여긴 이재명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순사의 군도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이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유유자적하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태웠다고 한다. 그를 가로막은 인력거꾼은 절명했으며,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는 등 치명상을 입었으나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의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1921년 4월, 김마리아는 사가(私家)에서 요양하려 한다며 성북동의 농가에 월세방을 얻었다. 6월 20일에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었고, 아흐레 뒤에 김마리아는 농가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하여 인력거에 오른 그는 다음 날 새벽 인천으로 갔고 7월 초에 상하이 망명자들의 가족과 함께 밀항선에 올라 7월 21일에야 산둥반도 웨이하이(威海) 항에 닿을 수 있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극비리에 진행된 이 망명은 4,000원의 거금을 망명과 정착 비용으로 지원한 선교사 맥큔(G.S. McCune)과 임시정부 요원 윤응념의 도움으로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