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날은 맑았지만, 괜스레 물어본다
박찬호 | 다시문학
13,500원 | 20251212 | 9791197682087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결핍은 인간의 감각을 깨우고, 언어를 불러낸다. 무엇인가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 빈자리를 향한 열망이 생긴다. 시 또한 그런 결핍의 언어다. 박찬호 시인의 시는 충만함의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결핍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그는 삶의 공백을 감추려 하지 않고,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불안과 통증을 언어로 붙잡는다. “어떤 눈이었든/ 그래도/ 눈이 온다고… 바람은 차갑고/ 해는 지고/ 또 해(年)는 가고”(「그래도 눈이 온다」)라는 문장처럼, 일상의 소소한 사건조차 결핍과 온기의 미묘한 교차를 드러낸다. 또한 그는 개인의 상실과 좌절을 숨기지 않는다. “시드니 의대에 들어간 아들을 암으로 잃고/…/ 지금은/ 8.5톤 트럭으로/ 다이소 물건을 배달한다는 내 동생”(「동생2」)이라는 표현은, 삶의 불완전함과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의 고달픈 숙명을 동시에 보여준다.
박찬호 시인의 시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과 신체적·정서적 경험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결핍과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시는 개인적 고통과 상실, 관계의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통해 삶과 존재의 미묘한 감각을 탐색한다. 동시에 반복과 리듬, 시간의 흐름을 섬세하게 활용하여 아픔과 회복, 미완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사랑해
잘 가
걱정하지 마
그동안 고마웠어
감사했어요
아파도 괜찮으니까
그냥 오래오래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거예요
희망을 품고
두려워 말고
편히 가세요
그 병동에서
매일
울려 퍼지는 공명(共鳴)
- 「메멘토 모리」 전문
이 시의 말들은 완화의료 병동 한쪽에서 들려오는 작별의 인사처럼 조용히 번져 나간다. “사랑해”, “잘 가”, “감사했어요” 같은 짧은 문장들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한 이들과 남겨진 이들이 주고받는 언어의 온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슬픔의 기록이 아니라, 끝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화자는 죽음을 비극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으로 바라본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거예요”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듯,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존재 방식으로의 전환이며, 남은 자들은 그 길목에서 조용히 손을 내민다. ‘메멘토 모리’는 원래 교만을 경계하는 권력의 언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이 단어는 전혀 다른 결을 띤다. 권력과 겸손의 관계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마주한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울려 퍼지는 공명(共鳴)으로 바뀐다. 병동에 울리는 이 ‘공명’은 누군가의 마지막 숨결이 다른 이의 마음속으로 전해지는 순간이며,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이해와 수용’의 언어로 바꾸려는 시도의 흔적이다. 그렇게 이 시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차가운 경구를 ‘죽음을 함께 기억하자’는 따뜻한 위로로 전환한다.
자신의 십자가를 그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으므로 그저 자신의 의지로 감당하라는 명령은, 고통의 인정이자 해방의 선언이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게 숨겨왔던 것이라면/ 이제는 던지고 떳떳하게 거부하겠다 하라”는 대목에서, 시인은 자기 부정이 아닌 자기 회복의 신념을 말한다. 자유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내 안의 망설임을 벗겨낼 때 비로소 도달하는 내면의 순간이다. 그래서 시의 결말은 결의의 외침이 아니라, 서서히 ‘나아지는’ 존재의 호흡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천천히 나아진다/ 한결 나아진다”는 것은 완성의 약속이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증명하는 현재진행형의 자유이다.
이렇듯 박찬호의 시는 결핍과 상처, 회복과 이별의 경계를 관찰하며,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시 「반이 지났다는 이야기」에서 ‘반쯤 남은 상태’는 결핍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흐름 속에서 절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절망이나 비극이 아니라, 존재의 미묘한 감각과 상호 이해, 그리고 조용한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완전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