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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01158426
· 쪽수 : 348쪽
책 소개
목차
가장 빛나는 순간 _ 9
옮긴이의 말 _ 345
책속에서
피터는 자유를 찾아 새장을 탈출했다. 그러나 씁쓸하게도 전혀 다른 세상의, 훨씬 더 더러운 새장에 갇힌 꼴이 되었다. 어떻게 일이 이토록 순식간에 꼬일 수 있는지. 딸을 끔찍한 상황에서 구해주려고 이리로 데려왔건만 딸은 화가 나 있었고 피터는 분노와 혼란의 미로 속에 길을 잃었다. 딸은 그가 무얼 해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가 애써왔던 모든 것들이 바로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진료소에는 그가 돌봐야 할 환자들이 있었지만 피터는 문 밖으로 뛰쳐나가 거지꼴이 될 때까지 골목길에 숨어 지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레가 옷 속으로 파고들어 물기 시작했는지 셔츠 속에서 피부가 빨갛게 부풀어올랐다.
진찰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녀는 자기 몸에 기구를 삽입하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움찔하지도, 질문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이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한 얼굴로 손톱만 깨물고 있었다. 마치 자기 허리 밑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 뒤로 일어난 일은 모두 예측 가능한 것들이었다. 피터는 아이에게 옷을 입으라고 한 뒤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바하더를 체포했다. 프란츠가 ‘질풍과 노도’라고 표현한 난장판 속에서. 바하더는 그들에게 교활하고 노골적인 협박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곧 돌아와서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노라고. 진료소 문을 닫게 만들어버리겠다고.
“물론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건 ‘삼사라’래요. 그런데 스님은 삼사라에 머물고 싶지 않대요. 강간을 당하는 것은 계율을 어기는 게 아니고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는 건 계율을 어기는 거래요. 결국 군인들이 아니스 다와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건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래요. 그 순간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대요. 만약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기도 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되면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