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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일본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25578675
· 쪽수 : 576쪽
· 출판일 : 2022-03-24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오늘도 쾌청하게 맑다. 태양은 층수 높은 집합주택이 늘어선 거리를 벌꿀색으로 비추고 거리에 짙은 그림자를 또렷이 드리웠다. 곳곳의 굴뚝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문이 쾅쾅 열렸다 닫히고, 사람들이 움직이고, 태엽을 감은 장난감처럼 도시가 살아 숨 쉰다. 길바닥에 깐 돌이 상할 대로 상한 길에 발부리가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걷는데, 눈앞에 벌거숭이 아이가 불쑥 뛰쳐나오더니 바로 뒤에 어머니임 직한 여성이 따라 나와 아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말없이 스웨터를 입히자 까치집 지은 어린애의 머리가 구멍으로 쑥 빠져나왔다.
카페가 문을 열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노인이 칠판 앞에 웅크려 앉아 몽땅한 분필로 ‘오늘의 아침, 호밀빵 포함 콩 수프 20마르크, 소시지 100마르크, 진짜 쇠고기 수프 120마르크’라 고 적었다. 카페 의자에 앉은 사람은 대부분 군복을 입은 적군 장교다. 그 앞을 중년 여성이 세탁 봉투를 쌓은 짐차를 끌고 지나가고, 작은 여자아이가 돌멩이를 늘어놓고 “한 개에 20마르크야.” 하며 소꿉장난을 했다. 길모퉁이에는 소련의 붉은 깃발을 단 배급차가 서 있고 제각기 접시를 든 독일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행렬은 중간부터 지수전 앞에 늘어선 줄과 뒤섞여 꾀죄죄한 헌팅캡을 쓴 남자가 어느 쪽이 어떻게 줄을 섰는지 알 수가 없다며 투덜거린다. 두 량짜리 노면전차가 묵직하게 천천히 달려와 만원인 칸에 승객을 더 태우자 사람들이 출입구에서 삐져나왔다. 그렇게 살아가는 독일인 대부분이 오른팔이나 가방 혹은 몸 어딘가에 하얀 천을 둘렀다. 항복의 표시다.
진녹색 군용 트럭 옆을 걸을 때 달리지 않으려고 자신을 타 일렀다. 그 시절처럼. 숨어 지내던 이다에게 식사를 나르던 나 날 동안 나는 절대로 뛰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미군은 친위대나 비밀경찰과는 다르다. 설령 들통나더라도 사정도 듣지 않고 단두대에서 목을 매달거나 총으로 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알지만 안으로 침입한 뒤부터 심장이 불안으로 터질 것 같았다.
U.S.ARMY의 하얀 스탬프를 차체에 찍은 군용 트럭 운전사는 더러운 양말을 창문으로 내밀고 군 기관지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를 읽었다. 다음 트럭은 빈 짐칸에서 병사가 트럼프 카드로 포커에 열을 올리고 있고, 다음 UNRRA 트럭은 운전석 문을 열고 팔짱을 낀 민간인 남성이 코를 골며 꾸벅꾸벅 졸고 있다. 왼쪽 어깨 아래에 UNRRA의 빨간 와펜이 달려 있었다. 나는 전후좌우를 확인하고 와펜을 손으로 잡았다. 운 좋게도 대충 꿰매 붙였는지 실이 뜯어져 살짝 당겼을 뿐인데 빨간 실이 천에서 스르륵 빠졌다. 그가 깨지 않도록 신중하게 와펜 을 뜯고 웃옷 뒤에 신분증을 고정했던 안전핀을 풀어 신분증은 가방에 넣고 핀으로 웃옷 왼쪽 어깨에 와펜을 고정했다.
트럭이 가려서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에는 접이식 테이블 몇 개를 내놓고 화물 분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각각 ‘의류’, ‘일용품’, ‘식량’이란 종이가 붙어 있다. 빠른 말로 떠들면서 분류하는 여성들 틈을 봐서 나는 쌓인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군인과 자선조직 직원에 섞여 서쪽 구획으로 들어갔다. 구획 입구에도 게이트가 있어 흑인 공병이 트럭과 통행하는 사람을 검문했다. 병사식당 개수대 담당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지만 계급장은 특기중사로 신분은 훨씬 위였다. 나는 숨을 깊게 내쉬면서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영어 응답을 시뮬레이션 하고 열려 있는 게이트로 돌진했다. 나에게는 수상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 허가받은 인간이다.
그런데 내부까지 한 걸음 남았을 때 공병이 “이봐, 거기!”하고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