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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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성 작가 문하에서 만화를 시작하여 공동 필명으로 《사립갱생고교》를 발표하였습니다. 순수 미술 활동 ‘부산비엔날레 사생대전’에서 다수 입상했으며 ‘하림전’ 외에 다수를 전시했습니다. 그린 작품으로는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어머니》 《홍길동전》 《아버지와 아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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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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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2011년 인문만화교양지 《SYNC》에서 만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빅이슈》, 《주간경향》, 《황해문화》, 《문화/과학》 등의 잡지와 《보고BOGO》, 《웹툰인사이트》, 《지금, 만화》 등 만화 매체에 글을 실었다. 현재 캣츠랩CATSlab과 합정만화연구학회 회원으로 동료들과 함께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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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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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러시아 문학연구소(IRLI RAN)에서 박사 학위(20세기 모더니즘 시 전공)를 받았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등에서 러시아 문학 및 문화, 러시아어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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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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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공부했습니다. 중·고등학교 과학 교사로 근무했고, 중학교 과학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집필했습니다. 지금은 청소년을 위한 과학 관련 책들을 쓰고 기획하는 과학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서양 과학사》, 《엉뚱한 생각 속에 과학이 쏙쏙》 등이 있고, 《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는 과학창의재단 우수 과학 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기획한 책으로는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60선》,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스미스소니언 교양 과학백과》 시리즈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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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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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자란 고리키는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자란 고리키는 여섯 살 때 글을 배우고, 1877년 1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외할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열 살이 되던 해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1881년 ‘선’이라는 배에서 접시닦이를 하던 그는 글을 모르는 주방장 스무리에게 책을 읽어 주며 책에 관심을 갖게 되고, 고골, 네크라소프, 뒤마, 발자크, 플로베르 등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힘든 노동과 미래에 대한 절망을 느낀 그는 1887년 19살이 되던 해에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로 인해 만성적인 폐결핵을 앓게 된다.
그 후 고리키는 코롤렌코의 서기로 일하게 되는데, 이때 자연과학, 니체 이론 등을 공부하고, 1891년 러시아를 여행하며 칼류즈니를 만나 그의 권고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892년 9월,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마카르 추드라> 이후, 여러 단편들을 계속해서 발표하던 고리키는 여러 신문에 평론이나 칼럼을 쓰며 정치 문제를 다루게 된다. 1898년에는 단편 20편과 수필을 모은 책 ≪수필 및 단편집≫을 출간해 문학적 명성을 얻었으나, 지속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해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
고리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가열되는 학생 데모와 파업을 봉쇄하기 위해 학생들을 탄압하는 정부를 비파해 세 번째로 수감된다. 톨스토이는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고리키는 감옥에서 <바다제비의 노래>를 발표해, 이 작품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혁명의 노래처럼 불리게 된다. 1902년 ≪소시민≫과 ≪밑바닥에서≫가 초연되고, 1904년 ≪별장족들≫을 저술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05년 1차 혁명을 목격하고 차르 정부를 비난하고 결국 유형을 당한다. 1906년에는 차르 정부의 러시아 차관을 차단하는 활동을 해 러시아로의 귀국이 허용되지 않아 1913년까지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정착한다. 1913년 로모소노프 가문 300주년 기념 특사로 사면을 받은 고리키는 페테르부르크로 가 문학·정치 활동을 계속하다가 다시 외국으로 나가기를 권유받게 되며, 1913년 영구 귀국 할 때까지 이탈리아의 소렌토에 살게 된다.
다난하고도 복잡한 삶을 살아 온 막심 고리키는 1936년 6월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68세의 일기로 자신의 생애를 마쳤다. 이틀 후 스탈린 등의 국가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그의 장례가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크레믈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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