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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0001540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25-07-15
책 소개
삶의 섬세와 고투와 탐미를 투시하는 ‘문정희’라는 언어
영원히 탄생을 거듭할 시의 길을 한 권으로 엮다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생명력으로 거침없이 충동하고 충돌하며 온몸으로 시를 살아온 문정희 시인의 시의 미학을 망라한 선집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가 나남문학선 54권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스웨덴 시카다(Cikada)상을 수상하고 스페인 ‘말하는 돌의 정원’에 한국어권 대표로 선정되어 시비를 세우는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한국 현대시사에 뚜렷한 궤적을 그려냈다. 그는 “원시적이고 폭발적인 힘으로 생명의 신성성과 여성과 남성, 자연의 순결성을 노래”(스웨덴 시카다상 선정의 말)하는 시인으로, “독자적 개성으로 무장한 시의 화신”, “한국 여성시의 정점”으로 불리며 세계 곳곳의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시인 문정희는 “시를 낳을 적마다 다른 시인이 되었고, 태어난 시로 인해 또 다른 시인으로 변모”(평론가 최진석)하며 삶과 시대에서 가장 절실한 목소리를 시로 옮겨냈다. 전 세계를 유랑하며 포착한 시적 순간들은 ‘문정희’라는 진솔하고 매혹적인 언어로 번역되었고, 몸의 언어로 만든 신을 신고 출발하여 몸의 국경을 넘어선 시인은 끊임없이 낯설고 새로운 시의 영역을 탐닉한다.
이번 문학선은 총 16권의 시집에서 165편의 시를 고르고, 다섯 개의 부에 재구성해 실었다. 또한, 1973년 출간된 첫 시집 《문정희시집》 등 절판된 8권에 실렸던 작품을 새 편집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반갑다. 시뿐만 아니라 4편의 에세이와 대화 〈영원히 젊고 찌그러지고 아름다울 것〉을 함께 실어 독자가 시인의 언어를 여실히 감각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에세이 〈나의 시, 나의 몸〉은 시인 내면에 존재하는 영감의 원천을 엿볼 수 있는 글로, 사유를 확장하는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평생 시에 생명을 부여하고 시에 운명을 의탁하며 발화와 호명의 방식을 쉼 없이 갈구해 온 시인의 시적 여로를 한 권으로 그려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모두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에서 떼어내어 먼 곳으로 떠나보낸 생(生)의 조각들이다. 시인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언어가 한없이 거칠고 흉흉해진 시대”에도 원초적 희망을 품고 펄펄 살아 생동하는 ‘생명의 언어’를 그려낸다. 생명의 언어가 있기에 시인은 언제나 사랑에 빠진 존재로서 “사라져 가는 모든 슬픔과 아름다움”(〈이 가을에〉)을 고요히 더듬는다. 시는 그런 사랑의 쓰기로부터 고독과 자유의 형상을 부여받아 긴긴 유랑을 시작한다. 하여 우리는 문정희의 시를 읽음으로써 타오르고 남은 사랑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 흔적을 한 땀 한 땀 이어 붙이면 결국 시인이 반세기 넘게 걸어온 길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 길은 몸의 바깥, 지도 너머의 닿을 수 없는 영역까지 뻗어나가 “목숨을 채우”는 거대한 시의 공간을 직조한다. 수천의 물살을 견디고 탄생한 지독하고 강렬한 생명의 암각화이자, “뼈와 살로 된 신전”(〈공항의 요로나〉)으로 남을 영원한 언어의 장소가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의 힘이 시의 강렬한 아름다움이요, 힘이지요. 시는 강물이기보다 연출이에요. 시는 자연발생하는 것 같지만, 언어로 시적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이 있어야 하죠. 언어가 한없이 거칠고 흉흉해진 시대, 시는 진정한 생명의 언어로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가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저 너머의 세계, 그 심연의 향기와 비밀을 시가 아니면 또 무엇이 표현할 수 있을까요.”
_〈영원히 젊고 찌그러지고 아름다울 것〉에서
“끈끈한 비밀들”로부터 생명의 이름을 호명하다
살아 있음 자체로 목적이 되는 실존의 시학
시인 문정희가 그리는 여성 이미지는 결코 고귀하고 거룩한 순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검진을 위한 유방 촬영에서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유방〉)고, 생활을 짊어진 채 “지폐와 식기와 메뉴에 철저한 중년 여자로 살아날 때 세상은 무사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시인은 가장 낮은 곳에서도 창조의 힘을 잃지 않는 여성-존재로 거듭난다.
시인은 여성의 욕망을 긍정하고 신체를 날것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저 태어남으로써 살아 숨 쉬는 생명의 힘, 살아 있음 자체로 목적이 되는 실존의 에너지를 얻는다. 그가 들려주는 여성의 목소리는 개인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다수의 것으로 분화하며, 그 외연을 넓혀 사회적 폭력에 대한 고발이자 세계를 향한 외침이 된다. “남성 중심의 언어가 아닌, 생명의 원천으로서 피의 언어”로 끊임없이 쓰며 억압받고 삭제된 여성의 목소리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문학선 전반에 녹아 있다.
또한 시인은 “콘돔과 감별당한 태아들과/들어내 버린 자궁들이 떼 지어 떠내려가는”(〈머리 감는 여자〉) 모습을 목도한 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죽어버린 생명들을 호명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를 꿈꾼다.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통과하고 구획을 무화하는 몸짓을 익혀야만 한다. 시인은 세계 곳곳을 떠돌며 마주한 상처 자국들을 문자로 써내려가면서도, 작가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팬티를 벗”(〈작가의 사랑〉)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은폐되고 말해지지 않던 것들을 화두에 올리고 영영 기억하겠다는 약속이며, “끈끈한 비밀들”을 공동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벗어나지 못하는/슬픈 둘레”(〈불면〉)를 걷고 또 걸으며 나아가겠다는 숙명적인 선언으로 귀결된다. 그 걸음을 따라 오래도록 켜켜이 쌓인 시편들과 에세이를 읽다 보면, 매 순간순간 표현의 최대치를 살며 세상에 유의미한 발화를 남기고자 분투하는 시인의 모습이 선연하다.
“어린 날, 가장 슬픈 자들의 울음을 대신 울어 주었던 곡비(哭婢)처럼 나는 인간 속에 내재된 고독과 자유혼을 언어로 표현하고 신성한 호흡으로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이고 싶다. 그러므로 시인이 먹어야 할 유일한 음식은 고독이요, 시인이 마셔야 할 유일한 공기는 자유라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길을 떠난다. 생명의 원천인 물처럼 흘러간다. 나의 시는 그 물로 나를 씻기는 노래, 내게 먹이를 주는 물의 바닥에서 파득거리는 뻘밭의 노래이다.”
_〈나의 시, 나의 몸〉에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시어들이 온통 얽히고설켜 숨을 틔우고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음이 느껴진다. 몸의 언어로 만든 신은 닳고 닳아 그 모양과 형체를 잃어버리기에 이른다. 걸어온 길에 남은 자국들은 곧 반세기 넘는 시간을 느슨하게 공유하며 한 권으로 묶인 시편들이다. 이 책은 “미완을 향해 끝없이 길을 떠나”는 시인의 종착지 없는 여행에 독자를 기쁘게 초대한다. “시는 아무것도 주장하지도 간섭하지도 않고 그냥 존재”할 뿐이지만, 우리는 문정희의 시를 읽는 동안 몸과 대지의 경계가 사라지고 시와 삶이 하나가 되어 흘러감을 감각하며, 비로소 자유로운 읽기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시인이 만들어낸 시의 숲은 끝없이 살아 있다. 그저 살아 있음으로 찬연하다.
목차
시인의 말_슬픔으로 기쁨으로 시인으로
1부 사람들은 왜 밤에 더욱 확실해지는가
노래|불면|눈을 보며|만가(輓歌)|유령|폐허의 노래|새에게 쫓기는 소녀|연|폭풍우|비|눈|겨울나무|하늘|겨울 일기|새 떼|콩|소|선언|참회 시 1|우울한 날은|대못|시인을 기다림|흐름에 대하여|술병의 노래|하늘을 보면|식기를 닦으며|시간 1|바다 앞에서|타국에서|황진이의 노래 1|황진이의 노래 2|사랑은 불이 아님을|어린 사랑에게|비의 사랑|고독|할미꽃|찔레|아들에게|절망의 노래|보석의 노래|서시|죽은 시계|비수|강물보다 더 먼|새와 뱀|천둥
2부 썩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
이명|곡비(哭婢)|순은의 펜으로|문신|감자|꿈|손톱|작은 부엌 노래|마흔 살의 시|이 가을에|남한강을 바라보며|베개|파꽃길|이별 이후|네가 내게 온 후|오빠|잘 가거라, 나비야|딸기를 깎으며|추석 달을 보며|신록|어머니의 편지|중년 여자의 노래|나는 나쁜 시인|사랑하는 것은|시작 노트_나는 늘 위독하다
3부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성에 꽃|한계령을 위한 연가|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체온의 시|유방|알몸 노래|남자를 위하여|다시 남자를 위하여|러브호텔|머리 감는 여자|보라색 여름바지|가을 우체국|사람의 가을|율포의 기억|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몸이 큰 여자|키 큰 남자를 보면|지는 꽃을 위하여|술|아름다운 곳|유쾌한 사랑을 위하여|밤 이야기|축구|치마|머플러|통행세|물을 만드는 여자|흙|사랑 신고|나무 학교|새우와의 만남|돌아가는 길|남편|조등(弔燈)이 있는 풍경|딸아 미안하다|공항에서 쓸 편지|성공 시대|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사랑해야 하는 이유|먼 길|테라스의 여자
4부 거대하게 떠밀리는 언어의 물거품
꽃의 선언|“응”|동백꽃|화장을 하며|집 이야기|그 소년|초대받은 시인|내가 한 일|늙은 꽃|독수리의 시|쓸쓸|지금 장미를 따라|명봉역|여행가방|부부|나 떠난 후에도|낙타초|물시|늙은 창녀|물의 시집|해벽(海壁)|뜨거운 소식|감촉|떠돌이 물방울|미로|길 잃어버리기|이제 됐어|내가 운다|미친 약속|바느질하는 바다|살아 있다는 것은|너는 책이다
5부 살아 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며
토불(土佛)|강|작가의 사랑|공항의 요로나|겨울 호텔|구두 수선공의 봄|우리 순임이|구조대장의 시|떠날 때|곡시(哭詩)|거위|당신을 사랑하는 일|나의 옷|나의 도서관|비누|나는 내 앞에 앉았다|망한 사랑의 노래|탱고의 시|나 잘 있니|보고 싶은 사람|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도착
6부 아름다운 미완을 향해서_에세이
책탑을 쌓으며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 살아남는다
여자의 시 쓰기는 신과의 입맞춤
나의 시, 나의 몸
대화_영원히 젊고 찌그러지고 아름다울 것
문정희 시인 연보
수록 시 출처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도 없이 그냥 걸어왔습니다. 어떤 고난, 어떤 절망, 어떤 시대가치 앞에서도 나는 문학이었습니다. 언어로 존재하고 언어로 사유하고 언어로 새로 태어나는, 실로 저주받고 실로 축복받은 삶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시인의 말 중에서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율포의 기억〉 중에서
우리들의 가슴에는 언제나
한 장의 순수한 백지가 있었다
목이 긴 새가 되어
가장 새롭고
가장 날카로운 시력으로 날고 싶은
오래고도 그윽한 숲이 있었다
이 땅에 태어나
밤마다 외로움에 떨며
별을 바라볼 때
별과 나 사이에는
어둠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 있듯이
고통의 백지를 적시며
슬프고도 찬란한 내 모국어는
밤마다 숲을 흔들며 날고 있었다
―〈순은의 펜으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