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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32016498
· 쪽수 : 280쪽
책 소개
목차
백마의 기사
꼭두각시패 폴레
- 옮긴이 해설
- 작가 연보
- 기획의 말
리뷰
책속에서
그때 제방 저편에서 무엇인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반달이 희미한 빛을 내보내자 거무스름한 형체는 점점 뚜렷해졌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다리가 긴 깡마른 백마 위에 앉아 있었다. 어깨 언저리로 짙은 외투를 펄럭이며 내 곁을 휙 스쳐가는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타는 듯한 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였을까?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제서야 나는 내가 말발굽 소리도 말의 헐떡임 소리조차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말과 기사가 바로 곁을 스쳐갔는데도! 의혹에 잠긴 채 나는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틈도 없이 그가 등 뒤에서 나타나 나를 다시 스쳐갔다. 이번에는 휘날리는 외투가 몸을 스치기까지 한 것 같았지만, 그는 역시 처음처럼 소리없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점점 멀어져가던 말과 기사의 그림자가 갑자기 제방 안족에서 어른거리는 듯했다. 나는 다소 주춤하며 그들의 뒤를 쫓아 말을 타고 내려가 보았다. -- '백마의 기사' 중에서
"잘 있거라, 얘야! 착하게 지내고 어머니, 아버지께 고맙다고 인사 전해드리거라!"
"안녕! 안녕!"
리자이도 외쳤다.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모에 달린 방울이 쩔렁거렸다. 리자이의 작은 손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기 무섭게 그들은 먼 나라로 사라져갔다.
나는 다시 언덕길을 올라가 먼지를 일으키며 모래 속으로 사라져가는 작은 마차를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방울 짤랑거리는 소리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흰 수건이 다시 한번 궤짝 위에서 펄럭이더니 서서히 모든 것이 가을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러자,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감에 나는 심장이 털썩 주저앉는 것 같았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거야! 다시는!"
"리자이!"
나는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리자이!"
그러나 그와는 아랑곳없이, 길이 구부러지는 탓인지 그나마 안개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점처럼 보이던 마차도 내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미친 듯 그 길을 따라 뛰고 있었다.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고 장화 안으로 모래가 가득 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보이는 것은 나무 한 그루 없이 거친 황무지와 그 위로 드리워진 냉랭한 회색 하늘뿐이었다.
저묵 녘에 겨우 집에 이르자 시 전체가 죽어버린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첫 이별이었다. -- '꼭두각시패 폴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