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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20143
· 쪽수 : 299쪽
책 소개
목차
마네킹 24호
명왕성이 자일리톨에게
굿 초이스
미끄러운 경사면에 대한 두려움
역주행
우리는 진화하거나 소멸한다
봄날
서울, 펭귄, 비둘기
섬에는 비상구가 없다
움
해설_남루한 삶에서 희망 찾기·오생근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쭈그리고 앉아 마네킹 25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만지면 눈가에서 물기가 묻어날 것 같다. 가만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잘 다듬어진 반질반질한 매끄러움. 물기가 묻어날 것만 같던 환상은 이내 깨지고 만다. 몸을 아주 천천히 더듬는다. 딱딱하고 차가운 덩어리. 깊은 동굴 속에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흉흉한 동물의 뼈를 만지는 듯 그 이상의 무엇이 느껴지지 않는다. 잘 가. 슬픈 피에로. 나는 천천히 옷을 벗는다. 마네킹 23호와 25호 사이에 몸을 눕힌다. 찬 기운이 살 속을 파고든다.
엄마도 아버지도 명왕성도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뒷면들을 오려낸 자리가 휭하니 뚫렸다. 코끼리 분비물처럼 쌓여 있던 단물 빠진 자일리톨로 그 구멍을 틀어막았다. 뒷면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희미한 자일리톨 향이 풍겼다. 다 오려진 뒷면들이 웅성대며 나를 둘러쌌다. 다들 숨을 죽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영문 모르는 나는 주위를 살폈다. 내가 오롯이 오려지고 있는 중이었다. 드디어 내가 사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옆에서는 자일리톨에 둘러싸인 지구가 기우뚱 한쪽으로 기운 채 느리게 돌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발들을 본다. 어디론가 열심히 향하고 있는 발들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여자의 발은 못생겼다. 그래서 좀처럼 발을 드러내지 않는다. 알타리 쭉정이같이 제멋대로 생긴 발가락은 세상을 등지고 있다. 매끈하지 못한 발등은 조악하고 폐쇄적이다. 공장을 전전한 이력이 고스란히 발 속에 들어 있다. 여자는 가끔 자신의 발을 들여다보면서 살이 적당히 오른 방등과 곧은 발가락, 부드럽고 수려한 발바닥을 전화기 조립하듯 조합해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