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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사진 > 사진이론/비평/역사
· ISBN : 9788932474625
· 쪽수 : 460쪽
· 출판일 : 2022-03-05
책 소개
1. 빠르게, 그러나 너무 빠르지는 않은 속도로 책장을 넘기며 사진을 훑는다.
2. 1번을 몇 번 반복한다.
3. 이제 보통의 독서를 시작한다.
같은 듯 다른, 다른 듯 같은
이 과정에서 사진의 리듬감을 느꼈다면 『지속의 순간들』을 더 풍부하게 읽을 기반이 마련됐다. 리듬감은 반복되는 피사체 때문에 생기고, 반복되는 피사체는 이 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 안에서 반복되는 눈, 등, 모자, 계단, 이발소, 시각 장애인을 만난다. 언뜻 보면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똑같이 눈을 감고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는 시각 장애인을 찍은 듯한 두 사진은, 한 사진가의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한 명은 시각 장애인이 아닐뿐더러, 같은 사진가가 찍은 것도 아니다. 하나는 에번스가, 하나는 케르테스가 찍었다. 만약 누군가 장난으로 에번스의 사진에 케르테스의 이름을 써 놓는다면 눈 밝은 독자라도 헷갈리기 쉽다.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사진의 정보는 잘못 알려져 있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도로시아 랭이 아니라 벤 샨이다.”
슬쩍 바꿔 놓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사진가뿐만이 아니다. 랭이 찍은 주유소와 잭 리가 찍은 주유소는 같은 곳인 것처럼 닮았다. 이런저런 광고판과 작은 건물, 몇 개 없는 주유기가 마치 쌍둥이 같다. 하지만 랭의 사진은 1940년경에, 리의 사진은 1971년에 찍혔고 둘은 다른 주유소다. 같은 (것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사진이 약 30년의 시차를 두고 다시 찍힌 것이다.
이처럼 같고도 다른, 다르고도 같은 사진들이 책의 전반에 걸쳐 꾸준히 나열된다. 책에 내재된, 책이 만드는, ‘책의 리듬’이다.
사진 무더기 속에 손을 넣으면
“이 책의 목표는, 제본된 책이라는 한계 안에서 사진 무더기 속에 손을 넣으며 요행을 바라는 경험을 흉내 내 보는 것으로 한다.”
『지속의 순간들』에는 사실 하나의 리듬이 더 있다. 그 리듬은, 아이러니하지만 앞서 말한 리듬을 무시할 때 탄생한다.
이 책은 사진 무더기와 같다. 저자는 우리에게 손을 넣으며 요행을 바라는 독서를 하길 권장한다. 차례에서 볼 수 있듯 본문은 17페이지부터 406페이지까지 장 구분 없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글이다. 그 사이에 100여 장의 사진과 그 이상의 사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진과 이야기들은 피사체별로 어느 정도 구획되어 있어 앞서 말한 리듬을 따라 순서대로 읽어도 괜찮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75페이지에서 389페이지로 껑충 건너뛰는 것이 더 좋다. “그렇게 해야 보다 다양한 대안적 순열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중간중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 좋을 곳을 마련해 두기도 했다. ‘거리’에 대한 에번스의 사진이 ‘내부와 외부’를 언급하는 단락에 소환되어 새롭게 자리 잡기도 하고, 루이스 하인의 사진 속 눈먼 걸인이 스티글리츠의 사진 속 선실에 불현듯 호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일 뿐,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다. 페이지를 넘나드는 리듬은 책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읽는 독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책에 외재한, 독자가 만드는, ‘독자의 리듬’이다.
멈춰 있던 순간들이 만나고, 삶은 지속된다
“우연은 우연이 아닌 게 될 때까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나? 얼마 동안이 순간이고, 지속되는 순간인가?”
두 리듬을 생각하면 우연에 관한 질문이 불가피해 보인다.
사진은 순간을 찍는 기술인데, 그 순간이 여러 사진가, 여러 피사체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책의 리듬’은 보여 준다. 그 순간들은 우연히 반복된 것인가? ‘독자의 리듬’이 중간을 뛰어넘어 이곳과 저곳의 연결을 보여 준다면, 그 둘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독자가 우연히 보았기 때문에 연결되었을 뿐인가?
제프 다이어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되는 순간들을 다양하게 보여 주고, 순간과 지속의 관계를 묻고, 다시 질문할 뿐이다. (실제로 글이 질문으로 끝난다.) 하지만 답이 될 만한 좋은 예를 들어 준다. 그는 벽에 손자국을 내고 있는 소년을 찍은 유진 스미스의 사진과 손 모양의 핏자국이 남은 벽을 찍은 낙트웨이의 사진을 ‘우연히’ 연결시킨다. 이는 ‘손’이라는 피사체를 공유하는 ‘책의 리듬’과 109페이지에서 400페이지로 이동하는 ‘독자의 리듬’의 만남이기도 하다. 찍은 작가도, 찍힌 시기와 장소도 다른 두 사진이 연결된다. 스미스는 낙트웨이와, 1950년대는 1999년과, 피츠버그는 페치와 연결된다. 나아가 소년의 낙서는 피의 낙서와 맞닿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프 다이어는 여기서 입을 꾹 다문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멈춰 있던 순간들이 만나면, 삶은 지속된다고.
목차
사진 목록
지속의 순간들
주
옮긴이 주
참고 자료
사진가 연대표
작가의 말
찾아보기
리뷰
책속에서
“개념 사진”에 대해서는 수전 손택이나 존 버거, 롤랑 바르트가 쓴 훌륭한 책들이 있다. 사진의 역사나 역사 속 다양한 장르와 흐름에 대해서도 책 분량의 뛰어난 연구서가 많다. 큐레이터들이나 학자들이 특정 사진가에 대해 쓴 매우 수준 높은 책과 에세이도 수없이 많이 있다. 사진가들도 그들의 매체에 대해 굉장히 잘 설명했다.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다. 기준이 워낙 높았기에 그 아래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앤 아버스의 말대로 내가 “사물의 특성에 관한 어떤 미세한 부분만큼은 독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세월이 흘러 푸스코의 사진이 전시되고 출판되었을 때 사진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틀림없이 예전에 자신이 지나온 순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 거기에 없었던 - 우리가 공유하게 되는 관점이다. 우리는 역사가 그들을 지나가는 게 아니라 그들에 의해 역사가 지나가던 날을 돌아보면서 마치 우리가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인 것처럼 이 사진들을 본다.
케르테스의 사진에서 자주 보이는 검은 윤곽의 인물들이 모두 죽음을 향하고 있거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면 지나친 것이겠지만, 그들이 항상 벤치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벤치는 일종의 죽음을 상징한다. 벤치는⋯⋯ 벤치 신세다. 참여하지 못하고 주변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삶을 관찰만 할 뿐 더 이상 삶에 관여하지 못하는 케르테스 본인의 대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