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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외교정책/외교학
· ISBN : 9788933706114
· 쪽수 : 548쪽
· 출판일 : 2011-06-25
책 소개
목차
서문
1장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중국 국공 내전(1945~1948년)
첫 번째 중·소 동맹
종전 직후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전략
지도자, 중재인, 조언자
마오쩌둥의 목표와 스탈린의 반응
스탈린, 티토주의, 마오쩌둥
2장 담판의 서막
1949년 미코얀의 중국 방문
한쪽 진영으로 기울기
전술
전쟁과 국제적 균형의 변동
류사오치의 모스크바 방문
3장 동맹의 결성
스탈린의 근심과 마오쩌둥의 행동
준비
첫 번째 무대: 원칙, 비밀, 그리고 중국의 청중들
두 번째 무대: 협상이 시작되다
세 번째 무대: 한계 긋기
국제적 배경
4장 최종 단계
공개된 합의
추가 협정과 다른 비밀 조항
5장 한국전쟁의 결정
소련과 한반도
전쟁을 위한 협의
마오쩌둥의 목표: 타이완
결정
전쟁이 시작되다
베이징의 전쟁 준비
6장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워싱턴의 계산
마오쩌둥의 우발 계획
최초의 결정, 10월 2일
정치국 내부의 토론들
중국인민지원군의 창설
스탈린의 반칙
최종 결정, 10월 13일
전쟁과 동맹
7장 결론
동반자 관계가 되다
동맹 관계를 되돌아보며
부록: 중·소 동맹과 한국전쟁 관련 문서
참고문헌
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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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러니 1949년 12월 마오쩌둥의 소련 방문이 소련과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 수립된 중국 혁명정권 사이를 동반자 관계로 만드는 데 기초를 닦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과 관계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관계는 중소우호조약 체결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그 결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두 사람이 모스크바의 회담에서 제기한 많은 문제들은 기나긴 고통으로 점철된 쓰라린 충돌의 역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회담에서 제기된 문제들과 두 사람이 이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식은 서로 상충되는 안보적 이해관계와 사상적인 편견, 그리고 두 사람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좌우되었다. 우리는 이 장에서 이 주제에 관한 방대한 양의 문헌을 파고드는 대신, 1950년 2월 14일 체결된 중·소 협정의 협상에 대한 필수적인 배경 지식의 차원에서 먼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이런 접근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역사란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중요하지만 성가신 현실이었다.
―제1장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중국 국공 내전(1945~1948년) 중에서, 16~17쪽
협상 과정 또는 최종 단계(End Game)는 1월 22일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조약의 구체적 조건을 처음으로 논의하면서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중국의 협력 관계를 공식화하고, 이 조약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과 일본이나 일본과 동맹을 맺은 국가들에 의한 적대 행위의 재개를 방지하기 위하여’ 양국이 모든 분야에 걸쳐 협력할 것을 제안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이 말을 통해 1월 2일에 그랬던 것처럼 1945년에 체결된 중소 조약을 갱신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마오쩌둥이 ‘적대 행위의 재개’와 ‘일본과 동맹을 맺은 국가’라는 말을 통해 지목한 대상은 미국이었다. 당시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미국과의 연계가 이 조약에 국제 전략적 중요성을 부여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일본의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의 장기적 안보를 고려하고 동시에 소련군의 뤼순 주둔을 영구화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지난여름 류사오치의 소련 방문 이후 스탈린은 뤼순 문제를 일본과 미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과 연계시켰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발언에 동의하면서 논의해야 할 주제들을 열거했다. 동맹조약, 중국 창춘철도에 대한 협정, 뤼순과 다롄 문제, 무역과 무역조약, 차관 문제, 그리고 민간항공 분야에서의 협력 등이었다. 스탈린은 중국 측이 협상하러 나오면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탈린은 1월 초 협상을 위한 초안에 서명한 바 있었으며 나머지는 단순한 흥정의 문제였다.
―제4장 최종 단계 중에서, 216~217쪽
소련군이 아직 북한에 진주하고 있던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사실상 38선을 통한 한반도의 분단이 공식화되었다. 양 진영은 서로 한반도의 정통 정부로 자임했고, 서로를 굳게 적대하는 상태를 고수했다. 그때부터 양측은 지속적으로 각각 자신들의 조건에 따른 통일을 위해 제일 중요한 외국의 후원자와 함께 움직였다.
김일성의 경우 해외 후원자의 도움으로는 12만 명 이상의 소련 제25군이 그해 말 철수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조선인민군에게 무기를 양도하는 형식으로 방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지원받은 것이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이것에 더해서 패전한 일본 제34군과 제58군으로부터 몰수한 병기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의 자료에 따르면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 조선인민군에 대한 모스크바의 군사 지원은 같은 기간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지원한 것을 초과했다고 한다.
중국과 북한에 대한 스탈린의 대우가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은 소련의 영향권 내에서 양국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 대부분 동안 중국인들은 존망을 건 내전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고, 이에 반해서 북한은 소련의 후원 아래 순조롭게 공산 정권을 수립해가고 있었다. 김일성의 집권과 북한 정권의 형성에 소련이 직접 개입한 것은 스탈린이 한반도 내에 전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게 했고, 김일성이 자신의 계획에서 중국이 무관하다는 시각을 형성하는 뼈대가 되었다.
―제5장 한국전쟁의 결정 중에서, 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