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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이슬람/중동/이스라엘 > 근현대사
· ISBN : 9788933707180
· 쪽수 : 208쪽
· 출판일 : 2016-08-12
목차
감사의 글
옮긴이 해제: 메흐메드 알리의 세계사적 위치
1. 고향 마케도니아
출생
유년기와 소년기
결혼
2. 이집트의 진흙탕
평생의 숙적 ‘휘스레우 파샤’를 처음 만나다
맘루크들을 카이로에서 추방하다
휘스레우를 완전히 돌려보내다
3. 권력 다지기
지역 내 정적들을 제거하다
맘루크 대학살
4. 확고한 굳히기
대체 권력 기반을 건설하다
경제 정책을 세우다
히자즈 원정에 나서다
절대 권력
나사 조이기
기반 시설에 투자하다
그래도 남은 불안감
상업적 성공을 거두다
“제 집 안에 있는 늙은 거미”
5. 확대되는 지평
운 좋은 한 해
그리스 전쟁
유럽 열강이 개입하다
휘스레우가 다시 등장하다
“경사스런 사건”
나바리노의 대재앙
다음을 위한 준비
6. 마지막 대결
시혜자
끈질긴 걱정거리
시리아 침공에 나서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재구성과 비용 절감
두 번째 시리아 위기
세습 통치를 추구하다
환희
7. 승리
파샤와 그의 엘리트: 감시자들을 누가 감시할 것인가
메흐메드 알리와 이집트 인들
파샤의 말년
8. 파샤의 다면적 유산
무엇이 잘못되었나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속에서
1805년 메흐메드 알리는 서른다섯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주의 합법적인 총독이 되었다. 4년 전 이집트에 아무 연고도 없이 온 그는, 투르크어 방언 하나와 아랍어를 아주 조금 할 줄 알았을 뿐 이집트 사람 대다수가 사용하는 아랍어는 거의 말할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제국의 수도에 출세를 도와줄 후원자도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더욱이 3년간의 프랑스 점령하에서 진이 다 빠져 버린, 그리고 여러 집단(프랑스, 영국, 맘루크, 베두인 족, 예니체리, 알바니아 인 등)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황폐화되어 버린 땅에 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4년 만에 메흐메드 알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그는 프랑스와 영국 군대의 철수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친구이자 동맹자였던 타히르 파샤가 암살되는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또 이 중요한 지역에서 줄줄이 세 명의 오스만 총독들이 이스탄불의 명령을 실행도 못 해보고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이 계속 일어나면서 이방인인 메흐메드 알리는 점점 더 힘 있는 자리로 올라갔다. 메흐메드 알리는 알바니아 인 부대의 헌신, 카이로의 울라마와 상인들의 신뢰, 도시 내 민중들의 충성을 얻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비록 마지못한 것이었지만 이스탄불로부터 이집트에서 제국을 대리하는 적법한 대표자로 승인을 받은 것이다.
맘루크들을 제거하고 나서 바로 메흐메드 알리는 이스탄불에 긴 서신을 보내, 자기가 한 일이 마치 이집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싶어 하는 술탄의 오랜 소망을 실현한 것인 양 설명했다. 그는 수도 이스탄불 사람들이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있고 자신이 점점 더 독자적인 행보를 취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음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것과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것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더 이 미묘한 균형 잡기를 해낼 수 있을까?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스탄불이 그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지 않고 이러한 운용의 묘를 발휘하도록 놓아 둘 것인가? 1807년 오스만의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 셀림 3세를 퇴위시키고 결국은 목숨까지 빼앗아 갔는데, 이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약간의 유예 기간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인해 얼마 동안 이스탄불에서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새로 등극한 술탄 마흐무드 2세가 먼 곳에 있는 반항적인 주들을 확실하게 통제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메흐메드 알리는 히자즈 원정에 아들을 사령관으로 하는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이스탄불을 달래고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킬 뿐 아니라 자기가 총독으로서 얼마나 충성스럽고 바람직한 신하인가를 보여 주는 결정이었다.
설령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 총독으로서의 임기가 1821년에 끝났다고 해도, 이 16년간의 통치는 그 이전의 어떤 오스만 총독보다도 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루어 낸 엄청난 변화와 이집트 사회 전체에 끼친 영향, 특히 이집트 전역의 보통 사람들의 삶에까지 미친 통제력은 미증유의 일이라 할 정도로 대단했다. 거기에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아라비아에서 거둔 성공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메흐메드 알리는 약 30년은 더 살 운명이었고, 통치 후반부에는 경제, 행정, 사회 전반에 걸쳐 더욱더 많은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룬 중요한 성취들이 빛이 바랠 지경이었다. 통치 후반기에는 파샤가 십 수년에 걸쳐 완성한 행정 조직이 더욱더 확고해졌고 지배권은 그 이전의 어떤 이집트 정부도 감히 침투하지 못했던 지역에까지 뻗쳤다. 이집트 인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이 새로운 행정 조직에 의해 점점 더 다면적으로 감시되고 통제되고 조종되었다. 동시에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비롯하여 새로운 기관, 학교, 병원, 공장?모두 이 새로운 행정 조직과 연관되었다?이 이집트 사회의 면면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모든 것이 작용하여 주민과 정부의 관계를 철저하게 변화시켰다. 1810년대에 파샤의 영향권은 아라비아 동부 지역까지 팽창되었고, 1820년대에는 남쪽의 수단과 북쪽의 크레타 섬, 남부 그리스의 모레아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비록 메흐메드 알리와 술탄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정면 대결의 불길한 조짐이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