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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88934976295
· 쪽수 : 404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신작이 출간되고 몇 달 후, 나는 글 쓰는 일을 중단했다. 그로부터 삼 년 남짓, 나는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과장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한 줄도. 공문서에 대한 회답, 감사카드, 휴가지에서 보내는 엽서, 하다못해 쇼핑 목록 몇 줄조차 쓰지 않았다. 어떤 모양새든 형식을 갖춰 써야 하는 글이라면 한 줄, 한 마디도. 노트와 수첩과 메모지만 봐도 통증을 느꼈다. 점차 글을 쓰는 동작 자체가 겁이 나고 자신 없어졌다. 볼펜을 쥐는 일조차 갈수록 어려웠다. 시간이 더 흐르자 컴퓨터의 워드 파일을 열기만 해도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 나는 더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쓰기, 그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 관계가 어떻게 그처럼 빨리 진전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단 몇 달 만에 L이 내 삶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L은 나를 진정으로 사로잡았다. L은 나를 놀라게 하고, 유쾌하게 만들고,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주눅 들게 했다. L은 독특하게 웃고, 독특하게 말하고, 독특하게 걸었다. L이 내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간단해 보였다. 그토록 자연스럽고 완벽하고 조화롭기 위해서는 손뼉 한번 치면 충분한 것처럼. 때때로 그녀와 함께 있다가 헤어지거나 긴 통화를 한 뒷면 그녀와 나눈 대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그 무엇도 장애가 되지 않는 순간, 필요한 공간이 확보되는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연하게 분류되어 깨끗하게 옮겨 적히는 순간이 있다. 침묵이 되돌아오고, 쿠션이 의자 위 딱 좋은 위치에 놓여 있고, 컴퓨터 자판은 손가락이 두들겨주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이. 몰입해야 하는 순간, 리듬과 충동과 단호함을 되찾아야 하는 순간이 오는 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지 않았다. (…)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다고, 설령 고통스러웠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기쁨은 배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건 그냥 실패일 뿐이었다. 나는 멍한 눈빛으로 컴퓨터를 마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