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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36465001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25-10-31
목차
11장 첫사랑
12장 수치
13장 남자의 세계
14장 넓어지는 원
15장 환희의 쓴맛
16장 무지개
작품해설
작가연보
발간사
책속에서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삶의 이원성이, 즉 한편으로는 사람들과 통학 열차와 의무와 숙제들로 된 평일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바다 위를 걷고, 주의 얼굴을 봄으로써 눈이 멀고, 구름기둥을 따라 사막을 가로지르며, 타닥거리고 타오르지만 불타 없어지지는 않는 떨기나무를 목격하던, 절대적 진실과 살아 있는 신비로 된 일요일의 세계가 있던, 의심의 여지 없는 종전의 이 이원성이 돌연 쪼개져버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평일의 세계가 일요일의 세계를 압도해버린 것이었다. 일요일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었다. 적어도 당면한 현실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당장의 행동으로 사는 것 아닌가.
평일의 세계만이 중요했다. 그녀 자신이, 어슐라 브랭귄이 평일의 삶을 감당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육신은 세상의 평가에 좌우되는 평일의 육신이어야 했다. 그녀의 영혼은 세상의 지식에 따라 평가되는 평일 세계의 가치를 갖추어야 했다.
“난 군인이 싫어, 뻣뻣하고 나무토막 같아. 자기, 정말 뭘 위해 싸우는 거야?”
“난 국가를 위해 싸우려는 거야.”
“그렇다고 자기가 국가는 아니잖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뭘 하고 싶어?”
“난 국가에 소속된 사람이고 국가가 정해주는 내 임무를 수행해야 해.”
“하지만 국가가 자기의 복무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을 땐, 전투가 하나도 없을 땐? 그땐 뭘 하고 싶어?”
그는 짜증스러웠다.
“남들이 하는 일을 하겠지.”
“그게 뭔데?”
“아무것도 아닌 거. 날 필요로 하는 때를 대비하고 있겠지.”
분에 찬 대답이었다.
“내가 볼 땐,” 그녀가 대답했다. “자기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 같아. 마치 자기 있는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단 말이야. 자기, 정말 뭐라도 있는 사람이야? 자기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녀는 거기 없었다. 그녀는 망토를 걸치고 스크리벤스키에게 손을 맡긴 채 앉아서 꾹꾹 참았다. 그러나 그녀의 벌거벗은 자아는 거기서 멀리 떨어져 가슴과 배와 허벅지와 무릎으로 달빛에 부딪히고, 달빛으로 돌진하여 만나고 교감했다. 그녀는 옷가지를 훌렁 벗어던지고 달아나, 이 어두운 혼돈과 뒤죽박죽인 사람들을 떠나 저 언덕으로, 저 달을 향해 진짜로 가려고, 거의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위에 사람들이 돌이나 자석처럼 서 있어서 진짜로 가지는 못했다. 내리누르는 맷돌 같은 스크리벤스키, 그의 존재의 무게가 그녀를 붙들어맸다. 그녀는 그라는 짐, 눈멀고 집요하며 축 처진 짐을 느꼈다. 그는 축 처져서 무겁게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녀는 고통스러워 한숨을 쉬었다. 아, 저 달처럼 시원하고 온전히 자유로우며 찬란할 수 있다면. 아, 그녀 자신이 되고, 온전히 하고픈 대로 할 차가운 자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멀리 떠나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어둡고 불순한 자성磁性에 짓눌린 반짝이는 금속 같다고 느꼈다. 그는 금속 찌꺼기이고, 다른 이들도 그랬다. 저 청신하고 자유로운 달빛으로 달아나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