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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36810115
· 쪽수 : 656쪽
· 출판일 : 2011-05-30
책 소개
목차
1장 고대 국가와 삼국 시대
BC 108년 고조선과 한나라 전쟁
371년 백제의 평양성 공격
400년 광개토대왕의 신라 파병
475년 함성 함락과 개로왕 전사
501년 백제 동성왕 피습
513년 신라 지증왕의 울릉도 복속
527년 이차돈의 순교
554년 관산성 전투
612년 살수대첩
642년 연개소문 집권
645년 안시성 전투
675년 매소성 전투
726년 발해 무왕의 요동 공략
822년 김헌창의 난
846년 장보고 반란
2장 한반도를 재통일한 고려
930년 고창 전투
942년 만부교 사건
993년 서희의 담판
1009년 강조의 정변
1019년 귀주대첩
1107년 윤관의 여진 정벌
1126년 이자겸의 난
1135년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
1170년 무신정변
1198년 만적 봉기
1232년 처인성 전투
1270년 삼별초 봉기
1274년 여원 연합군의 1차 일본 정벌
1380년 황산대첩
1388년 위화도 회군
3장 유교 국가 조선
1394년 한양 천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1419년 대마도 정벌
1446년 훈민정음 반포
1453년 계유정난
1456년 사육신 사건
1467년 이시애의 난
1498년 무오사화
1510년 삼포왜란
1519년 기묘사화
1559년 임꺽정의 난
1575년 동서 분당
1589년 정여립 옥사
1592년 한산도대첩
1593년 행주대첩
1597년 정유재란
1609년 기유약조 체결
1623년 인조반정
1624년 이괄의 난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1658년 제2차 나선 정벌
1680년 경신환국
1696년 안용복 사건
1712년 백두산정계비 건립
1728년 이인좌의 난
1755년 나주 괘서 사건
1762년 임오화변
1776년 규장각 설치
1801년 황사영 백서와 신유박해
1811년 홍경래의 난
1839년 기해박해
1862년 진주 농민 항쟁
4장 격동하는 근대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서원 철폐령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요호 사건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85년 거문도 사건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1895년 을미사변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대한제국 성립
1898년 만민공동회
1899년 경인선 개통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국채보상운동
1907년 헤이그 밀사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0년 강제 병합
1919년 3·1운동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1923년 암태도 소작 쟁의
1925년 제1차 공산당 사건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운동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5장 현대의 물결
1945년 8·15 광복
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
1948년 5·10 총선거와 대한민국 수립
1950년 6·25 전쟁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1964년 6·3 사태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 항쟁
책속에서
견훤이 929년 12월 고창에서 고려군 3,000명을 포위하자, 왕건은 직접 구원병을 이끌고 고창에 이르렀다. 견훤은 이미 고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죽령을 봉쇄한 상태였다. 왕건은 3년 전 대구 공산(公山)의 동수(桐藪) 전투에서 견훤에게 참패한 이후 계속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고창 전투가 갖는 의미가 컸다.
고려와 후백제 군사들이 서로 마주보며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을 때 왕건은 의외의 원군을 얻었다. 현지 지리에 밝은 고창군 성주 김선평(金宣平) 등이 향군(鄕軍)을 이끌고 고려군에 합세한 것이다. 이들은 견훤이 927년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을 숨지게 한 것에 대해 앙갚음을 하고 싶었다. 격전 끝에 후백제 군사들은 퇴각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후백제의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고려군에게 생포되고, 8,000여 명의 후백제군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왕건이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정세는 급변했다. 경상도 지역의 30여 개 군현과 명주(溟州, 강릉)에서 흥례부(興禮府, 울산)에 이르기까지 110여 개의 성이 고려에 항복했다고《고려사절요》는 기록하고 있다. 충청 일대에서도 30여 개의 성이 고려의 지배로 들어왔다. 또 신라계를 비롯한 각 지역 호족들이 가세하면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기반
을 다질 수 있었다. 반면 후백제는 고창 전투 패배 이후 급격히 동력이 상실된 데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부자간 갈등까지 겹쳐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고창 전투는 3년 전인 927년에 벌어진 공산 전투와는 그 양상이 확연히 달랐다. 공산 전투도 왕건과 견훤이 직접 맞붙은 결전으로, 후삼국 시대 주요 전투로 기록된다. 공산 전투의 발단은 925년 조물성(曹物城, 경북 의성)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_930년 | 고창 전투
당시 함경도 혜산 첨사를 지내던 신유는 조정의 원정 지시를 받고 원산과 경성, 회령, 연길을 통해 영고탑(寧古塔, 흑룡강성 영안)에 이른 뒤 사이호달(沙爾瑚達)의 청나라 군대와 합류해 북상하던 중 나선군과 마주쳤다. 이때 조선군은 모두 260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조총 부대가 200명, 초관 등이 60명이었다. 조선군, 특히 조총 부대의 원정은 청나라의 거듭된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가 단독으로 나선군을 공격하다 계속 나선의 총포에 당하자 조선에 총수(銃手)의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1차 정벌 때는 청나라가 조선 원정군에게 군량을 지급해 주는 조건이었지만, 2차 정벌 때는 조선이 자체적으로 군량을 조달해야 했다. 때문에 당시 조선군은 영고탑까지 행군하는 동안 군량미를 직접 실어 나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익숙하지 못한 지역에서 나선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당시 조총 부대의 전투력이 향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선은 흑룡강 북쪽 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흑룡강변의 풍부한 자원 발굴과 모피 수집 등을 통해 경제를 꾸려 나갔으며, 일부 세력은 새로운 토지와 은광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보니 청나라 경계 지역에 나선 세력이 출몰하는 일이 잦아지고, 끝내 청나라 조정을 자극하였다. 청나라가 국경 진입을 막기도 했으나, 나선 세력은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청나라가 나선 정벌을 위해 처음 조선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효종 5년인 1654년 2월이었다. 청나라는 한거원(韓巨源)을 사신으로 보내 조선에서 총수 100명을 선발해 3월 10일까지 영고탑에 파견하고, 청군의 통솔을 받아 나선 정벌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은 이때 나선이 어떤 나라인지, 근거지가 어디인지 등을 한거원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청나라의 요구를 받은 조정은 함경도 병마우후(兵馬虞侯) 변급으로 하여금 조총 부대 100명과 초관 등 50명을 이끌고 청나라를 지원하게 한다. 변급은 회령을 거쳐 영고탑에 도착한 뒤 명안달리가 이끄는 청군 3,000여 명과 합세했다. 이어 이들은 송화강 중류 지역인 혼동강에서 나선군을 맞아 7일간 교전을 벌인 끝에 패퇴시켰다. 이것이 1654년 4월에 벌어진 제1차 나선 정벌이다.
_1658년 | 제2차 나선 정벌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계엄 해제와 유신 세력의 퇴진을 요구했다.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앞서 4월 24일 서울 지역 대학교수들이 학원 민주화 성명을 발표했고, 5월 16일에는 군사 정권의 재등장에 반대하는 지식인 134명이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오랜 독재에 짓눌린 시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거세게 분출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신군부는 주요 대학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학생운동 지휘부와 정치권의 주요 인사 검거에 나섰다. 학생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김대중, 김종필 등이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대학생과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면서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불씨가 지펴졌다. 신군부의 계엄 확대 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학생 200여 명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무차별로 구타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광주 시내 금남로에서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고,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시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갈수록 불어났다. 이들은 계엄 철폐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오후 3시 무렵부터 계엄군은 골목까지 쫓아다니며 학생과 시민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리고 차에 태워 강제로 끌고갔다.
19일에는 대학생과 시민은 물론 고등학생까지 가세해 시위대가 5,000여 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금남로와 계림동, 충정로 등지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계엄군은 소총에 칼을 부착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위협했으며, 가톨릭센터와 공용터미널 주변 등 곳곳에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20일 오후 광주 시내 중심가에는 10만여 명이 사람들이 연좌농성을 벌였다. 택시 200여 대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시위에 가세했다.
노동자와 도시 빈민, 회사원, 점원, 주점 종업원 등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여 초기의 학생 시위는 이미 민중 항쟁으로 진전되어 있었다. 이날 밤20만 명 규모로 불어난 시위대는 노동청과 신역, 전남도청 앞 등지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계엄군의 총칼에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맞섰다. 자정을 전후해 계엄군은 건물 옥상에서 장갑차에 올라탄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_1980년 | 5·18 광주 민주화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