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36810900
· 쪽수 : 388쪽
· 출판일 : 2016-08-10
책 소개
목차
1장 우리 역사의 시작
석기 시대의 전개
금속기 시대의 출현
**고조선
단군 왕검의 건국 신화
기자 조선과 위만 조선
고조선의 사회와 문화
**부여
**삼한
2장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고구려
주몽의 탄생과 건국 신화
고구려의 성장과 시련
소수림왕의 개혁 정치
광개토왕, 정복 군주의 등장
장수왕, 고구려의 전성기
왕권 약화와 연개소문의 등장
수나라와의 전쟁
당과의 전쟁과 멸망
경제와 문화
**백제
온조, 백제의 건국 시조
한성 시대의 백제
웅진 시대의 백제
사비 시대의 백제
도성과 행정구역
경제와 사회
문화
**신라
건국과 시조 신화
정치의 발전
영토의 확장
경제 활동
종교와 문화
**통일신라
통일 전쟁의 수행
중대, 안정에서 혼란으로
하대, 혼란에서 멸망으로
경제와 교역
종교와 문화
**가야
시대의 전개
쇠퇴와 멸망
**발해
제국의 출발과 성쇠
행정 조직과 군사 제도
대외 관계
생산과 교역
사회
종교와 문화
3장 후삼국과 고려 시대
**후삼국
견훤과 궁예의 활약
왕건과 후삼국 통일
**고려
태조의 치세
거듭되는 시해 사건
서경 천도
광종과 왕권 강화
전시과 실시
최승로의 개혁 정치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활약
거란의 2, 3차 침입과 강감찬의 활약
천리장성의 축조
문종의 개혁 정치
속장경의 간행
선종의 치세
외척의 득세
화폐 발행과 서울 천도
윤관의 여진 정벌
이자겸의 득세
서경천도론과 묘청의 난
인종 치세의 명과 암
무신 정권의 수립
계속되는 반란
연속되는 쿠데타
최충헌의 집권
최우의 정방 정치
몽골의 침입
최씨 정권의 종말
무인 시대의 종말
삼별초의 항쟁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
원의 내정간섭
공민왕의 개혁 정치
신돈의 등장
공민왕의 최후
이인임의 득세
이성계의 활약
위화도 회군
고려의 멸망
4장 조선 시대
한양 천도
1, 2차 왕자의 난
태종의 왕권강화책
세종의 문치주의
대마도 정벌과 사군육진 개척
문종의 치세
계유정난의 발발
반란과 단종 복위 운동
세조의 치세
성종의 치세
연산군의 폭군정치
조광조와 기묘사화
대윤과 소윤의 대결
보우와 불교 중흥
사림의 성장과 정치
서원의 설치
붕당의 출현
임란 전의 정세
임진왜란의 발발
정유년의 재침략
당쟁의 심화
대동법의 실시
광해군의 집권
서인 정권의 수립
인조의 ‘원종 추숭 논란’
산림의 등장
병자호란의 발발
소현세자의 죽음
효종의 즉위
북벌 운동의 추진
기해년의 1차 예송
갑인년의 2차 예송
환국과 공작 정치
희빈 장씨 사건
신임사화의 발발
붕당 타파의 실패
영조의 탕평책
사도세자의 죽음
실학파의 등장
균역법의 실시
정조의 탕평 정책
화성 건설과 개혁 정치
조선 후기의 산업
세도 정치의 시작
천주교 박해
삼정의 문란
홍경래의 난
강화도령 철종의 등극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쇄국과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와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위정척사와 개화
임오군란의 발발
갑신정변의 발발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갑오개혁의 추진
아관파천의 단행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수립
러일전쟁의 발발
을사늑약의 체결
5장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설치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반식민지 저항 운동
3.1독립만세운동의 발발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
국내의 저항 운동
민족 말살 정책과 수탈
6장 대한민국
해방과 분열
신탁통치와 단독 정부 수립
정부 수립 후의 혼란상
한국전쟁의 발발
이승만 독재 체제의 강화
4?19민주화운동 발발
박정희의 집권과 개발 독재
유신 체제의 등장
신군부와 군사 독재
민주화의 진척 과정
민주 정부 수립과 남북 관계의 해빙
보수정권 회귀
저자소개
책속에서
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무신년의 반란이 당쟁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파악했다. 반란을 일으킨 쪽은 소론과 남인이지만, 반란의 원인은 노론 쪽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 당파가 조정을 장악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영조의 생각은 탕평파, 즉 탕평책에 호응할 수 있는 온건파 인사들의 중용으로 이어졌다.
영조가 우선적으로 주목한 탕평파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공을 세운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 등 소론계 인사였다. 영조의 지원 아래 소론 탕평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노론 인사들은 집단적으로 사퇴하는 등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에 소론 탕평파는 노론 온건파인 홍치중에게 도움을 구했다. 홍치중은 노소의 공존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신임옥사 문제를 해소할 방안을 제시했다. 신임옥사의 충역의리 해석을 신축환국과 임인옥사로 분리해서 처리하자는 것이었다. 즉, 신축년에 세제인 영조의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빚어진 옥사는 충으로, 임인년에 경종을 시해하려다 생긴 옥사는 역으로 보자는 주장이었다.
홍치중의 주장에 따르면, 죽은 노론 4대신 가운데 이건명, 조태채는 신원하고 아들과 손자가 임인옥사에 연루된 김창집과 이이명은 신원할 수 없었다. 노론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4대신의 신원을 처결하면서도, 절반만 신원해 소론의 반발도 막아 보자는 절충안이었다. 이는 영조 5년(1729) 8월 18일 기유처분으로 공식화되었다.
기유처분을 통해 출사하기 시작한 노론 인사들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자 영조는 임인옥사 때 고문에 못 이겨 역모를 시인했던 서덕수의 신원을 전격적으로 추진했다. 기유처분에 배치되는 이 결정은 역모에 연루되었다고 의심받은 영조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자 하는 1단계 조치였다.
영조는 2단계 조치로 재위 15년(1739)에 소론 탕평파를 실각시키고 노론 인사들을 중용했다. 그리고 이듬해 노론 4대신의 완전한 신원 요구를 수용하는 경신처분을 단행했다. 15년 전인 을사년의 처분으로 되돌아가 충역시비를 정리한 셈이었다.
하지만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신원에만 신경 쓸 뿐, 영조의 신원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 인사들을 파직시키고 다시 탕평파를 기용하는 변덕을 부렸다. 노론의 명분이 우세를 점한 상태에서 탕평파의 이견과 조율을 거친 결과, 영조 17년(1741) 신유대훈이 반포되었다. 경종 원년(1721)의 세제 책봉은 대비와 경종의 하교에 따른 것이고, 임인옥사는 억울한 옥사이므로 화를 당한 자는 신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소의 합의로 이루어진 신유대훈을 통해 영조는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고, 정통성도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영조는 치세 전반기와 달리 노론 위주의 탕평책을 펼치며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