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7422881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5-09-12
책 소개
나는 없애고 싶은 몸에 햇볕을 쬐어 주고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어 준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기록되지 못한 기억
그 침묵의 행간을 문학적 언어로 옮기며
김숨이 완성한 전쟁과 폭력, 애도와 치유의 서사
김숨 장편소설 『간단후쿠』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간단후쿠』는 김숨 작가가 오랜 시간 귀 기울이고 들여다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기억을 그린 신작 장편소설이다.
김숨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부독재처럼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지금 우리 사회 사각지대에 있는 평범한 이들의 상처와 삶을 수많은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그런 작가 김숨이 거듭 돌아보고 되돌아간 곳은 바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곁이다. 소설을 펴내며 김숨은 “10년이라는 ‘징한’ 만남을 갖고 나서야” 마침내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을 체화해 소설로 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생존자 한 사람의 기억을 통해 300여 건의 증언을 엮은 장편소설 『한 명』(2016)을 시작으로 길원옥·김복동 증언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2018)에 이어, ‘기록자’의 시선으로 증언 너머 침묵을 들여다본 소설 『듣기 시간』(2021)까지. 김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말뿐 아니라 말로 전하지 못한 고통까지 ‘문학’이라는 ‘공동의 기억’에 기입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지속해 왔다. 흩어져 버릴 말들을 붙잡고 말 못 할 고통을 들여다보며 이어 온 그 작업 끝에 김숨은 마침내 캄캄한 침묵으로 봉인된 상처의 근원, 그 트라우마 한가운데로 깊숙이 뛰어든다. 『간단후쿠』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일제강점기 만주 위안소에 붙들린 15세 소녀의 ‘몸’이라는 현장이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단 여섯 명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남아 있는 지금, 『간단후쿠』가 보여 주는 고통의 현장은 우리가 약속한 ‘기억’과 ‘기억의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기억’은 투쟁의 장소다. 사회적 요구와 개인의 욕망이 부딪히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들이 시간을 따라 기준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공간이다. 우리의 기억은 개인을 휩쓸어 가는 사회적 분위기와 거대 담론 속에서, 쉼 없이 뒤섞이며 유동하는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그 가운데서 『간단후쿠』가 묻는다. 우리가 약속한 기억 속에 가장 중요한 진실인 ‘고통’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해도, 증언할 생존자가 남아 있지 않을 미래에도, 우리가 이 ‘고통’에 공감하는 일이 가능할지.
■ ‘간단후쿠’라는 몸 ― 여성의 몸으로 말하는 전쟁
‘간단후쿠’는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입고 생활한 원피스식의 옷을 부르던 말이다. 또한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그 옷을 입은 이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간단후쿠’를 입고 한 번 ‘간단후쿠’가 된 여자애들은 그 옷을 입어도, 벗어도 ‘간단후쿠’다. ‘간단후쿠’는 여자애들의 ‘몸’이 되기 때문이다.
『간단후쿠』는 머나먼 만주 땅, 위안소 ‘스즈랑’에 있는 15세 소녀의 ‘몸’을 보여 준다. 이곳에 온 지 2년이 된 소녀는 원래 이름 ‘개나리’ 대신 ‘요코’라고 불린다. 소설은 소녀가 임신한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이후부터 만삭이 되어 가는 봄, 여름, 가을의 시간을 그린다.
전쟁은 한 벌의 옷처럼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몸’을 옭아매고,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몸 안팎의 투쟁을 치른다. 몸 안에서 속절없이 자라나는 또 하나의 ‘입’처럼, 몸 밖에서 끈질기게 들러붙는 군인들처럼. 그러나 ‘간단후쿠’는 벗겨지지 않는다. 벗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두꺼워지며 확장된다. 옷에서 위안소 ‘스즈랑’으로, 스즈랑을 둘러싼 벌판으로, 벌판 너머 전쟁터로.
■ ‘간단후쿠’들의 생존 방식 ― 한 사람의 내면
주인공 ‘요코’의 생존 방식은 혼자 하는 상상이다. 하늘을 보며 고향을 떠올리고, ‘간단후쿠’와 전혀 다른 삶인 ‘간호사’ 복장을 입어 보기도 한다. 때로는 ‘군복’을 입는 상상도 한다. ‘요코’는 군복을 입는 게 나을지 간단후쿠를 입는 게 나을지 고민한다. 군복을 입으면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사람을 죽이면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간단후쿠를 입으면 ‘사람 같지 않은’ 군인을 데리고 자야 한다. 간단후쿠, 군복, 간단후쿠, 군복…… 우열을 가릴 수 없어 마음속 꽃점을 치던 ‘요코’는 위문 출장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스즈랑에서도 상상할 수 없던 지옥, 전쟁을 목격한다.
스즈랑에 붙들린 열 명의 소녀들에게는 각자의 생존 방식이 있다. 땅에 편지를 쓰는 ‘나오미’, 서로를 돌보며 의지하는 ‘나나코’와 ‘하나코’, 고향에 돌아가 할 일을 생각하는 ‘아유미’, 능숙한 일본어로 처세하는 ‘에이코’, 아편에 빠진 ‘사쿠라코’, 아무에게 아무 말 하지 않는 ‘미치코’, 나이를 잊은 ‘요시에’, 죽을 때까지 저항하는 ‘레이코’, 곧 죽어도 ‘스미마센’ 하지 않는 자존심으로 버티는 ‘고토코’까지. 극한에 달하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두려움에 떠는 ‘피해자’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에 달하는 순간마다 이들이 가진 각자의 성격, 생각, 기억, 의지는 더욱 선명히 빛난다. 전쟁도, ‘간단후쿠’라는 옷도 휩쓸어 가지 못한 ‘한 사람’의 내면이다.
■ 상처 깊숙한 곳의 진실 ― ‘군표’ 같은 희망
김숨 작가가 증언을 문학으로 옮기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다시 쓴 것은 다름 아닌 ‘말’이다. 말은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한 내면을 드러내는 가장 선명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김숨은 단어, 어휘, 어순을 넘어 머뭇거림과 침묵을 표현하는 기호 하나조차 발화자의 말이 맞는지 의심하며 소설을 써 왔다. 이처럼 오랜 시간 조심스럽고도 세밀한 소설 쓰기 끝에 김숨이 발견한 것은 ‘침묵’이다. 거대한 벽에 말문이 막힌 듯한 ‘침묵’, 그 두꺼운 벽 아래서 들끓는 ‘고통’이다. 김숨은 그 침묵, 굳게 닫힌 상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간단후쿠』를 썼다.
『간단후쿠』의 모든 단어와 문장은 일제강점기 만주 위안소에 있는 15세 소녀의 말로 쓰였다. ‘위안부’가 아닌 ‘간단후쿠’라 스스로를 칭하듯이, 낯선 사물이나 병명 같은 일본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그래도 배우지 못한 말은 과거의 기억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와 붙여 부른다. 이 ‘말’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을 증언하는 동시에 과거의 기억을 붙든다. 그렇게 『간단후쿠』의 문장들 하나하나는 이들이 몰래 간직한 ‘보따리’처럼 우리 앞에 놓인다. 기만당해 사라진 꿈, 멀어질수록 또렷해지는 기억, 몰래 모으는 ‘군표’처럼 차곡차곡 비밀스럽게 차오르는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이 뒤섞여 그 속에 고스란히 있다.
목차
간단후쿠 7
삐 11
가시철조망 울타리 18
지평선 22
삿쿠 24
다다미 한 장 29
귀리죽 37
돌림노래 43
군표 50
군인을 데리고 자는 공장 58
위생 검사 66
땅 80
요코 85
요코네 94
나를 잊어버리는 병 100
1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105
만주의 바늘 장수 111
몸 116
이름 126
군인 목소리 130
새로운 돌림노래 135
조센삐 엄마 140
널뛰기 놀이 146
뻐꾸기 152
검은 보름달 156
담요 159
죗값 165
트럭 171
노란 공단 원피스 184
닫힌 입 188
군표 한 장으로 살 수 있는 것 193
흰 보따리 205
위문 출장 215
스미마센 237
흰 상여 243
귀가 251
나나코 되기 놀이 254
나쁜 말 259
배냇저고리 264
사요나라 269
열린 입 274
아타라시 여자애 276
답장 283
작가의 말 289
추천의 글_박소란(시인) 292
저자소개
책속에서
요시에는 내가 입은 것과 똑같은 간단후쿠를 입고 똑같은 간단후쿠가 된다. 나오미도 내가 입은 것과 똑같은 간단후쿠를 입고 똑같은 간단후쿠가 된다. 다른 여자애들도. 그리고 군인들을 데리고 잔다.
군인들을 데리고 자는 동안 내 몸은 간단후쿠 안에서 휘어지고, 뒤집히고, 눌리고, 부서지고, 쪼개진다.
― ‘간단후쿠’에서
나는 보따리가 갓난아기라도 되는 듯 가슴에 품어 안고 누워 있곤 한다. 그럼 내가 보따리에 매달려 어딘가를 향해 마냥 걸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보따리를 풀었다 다시 꾸리곤 한다. 풀어 헤친 보따리를 다시 싸고 풀어지지 않게 꼭 묶다 보면 이곳을 곧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다.
― ‘다다미 한 장’에서
우리가 남긴 무장아찌 한 조각이 동쪽 하늘에 떠 있다.
허수아비처럼 두 팔을 벌리고 가시철조망 울타리에 매달려 있던 간단후쿠가 시큰둥히 중얼거린다.
‘북쪽에서 군인들이 오네.’
그 옆 간단후쿠가 팔을 건성건성 흔들며 말한다. ‘어제도 북쪽에서 군인들이 왔는데.’
그 옆 간단후쿠가 목 구멍을 부풀리고 중얼거린다. ‘북쪽에서 오는 군인들한테는 그냥 ‘나 잡아 잡수.’ 해야 해.’
(……)
군인들은 서쪽에서도, 동쪽에서도 온다. 군인들은 어디에서나 온다.
― ‘귀리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