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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한국문학론 > 한국비평론
· ISBN : 9788937427411
· 쪽수 : 424쪽
· 출판일 : 2022-10-17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문학의 자기 증명 ―7
1부 다시 만난 인간
인간이 결속하는 방식은 눈송이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25
다시 만난 인간: 스키어, 운전자, 알레르기 환자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39
새벽 4시의 모호함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47
인간의 천국, 인간의 지옥 허연론 ―59
마음의 열두 방향 김금희론 ―75
뿌리가 되는 꿈 김숨론 ―90
한 사람을 위한 이념 배삼식론 ―109
2부 자아의 후퇴
자아라는 신화 ―123
1인칭 사용법 유계영론 ―139
자아를 해체하는 물질의 시 강혜빈, 『밤의 팔레트』 ―165
정치적 무기력 서이제론 ―180
더 나은 무엇이 되어 만날 때까지 강석희,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201
처음 만나는 무게 임선우론 ―219
스스로 도는 인간 신동옥, 『달나라의 장난 리부트』 ―240
3부 사랑과 우울이 한 일
사랑에 대해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259
바람이 불어온다는 말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272
페가수스의 우울 손보미론 ―291
절망의 돌림노래 양안다론 ―315
딸의 멜랑콜리아 강지혜론 ―336
세 번째 사유상 백은선론 ―348
4부 윤리도 아름답다
감수성의 혁명 2018 구병모, 『네 이웃의 식탁』 박민정, 『미스 플라이트』 ―359
잡년의 귀환 김범, 『할매가 돌아왔다』 ―371
움직이는 좌표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382
악(惡)은 침묵할 권리가 없다 정용준, 『유령』 ―392
아웃포커스의 윤리 김혜진의 소설 ―405
‘강남역’에서 ‘신당역’까지 다시 읽는 『82년생 김지영』 ―414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문학은 언더스토리(understorey)다. 언더스토리는 하층식생 혹은 하목층을 가리키는 말로 숲 지붕과 숲 바닥 사이에 사는 생물을 뜻하는 산림학 용어다. 곰팡이나 이끼를 비롯해 어린 나무인 묘목이나 높이가 2미터 이내로 땅속에서부터 줄기가 갈라져 나오는 관목 같은 내음성 식물(그늘에서 견디는 능력이 큰 식물)들이 언더스토리에 속한다. 태양빛의 상당 부분은 숲의 지붕에 해당하는 임관층 식물들이 받아먹기 때문에 중간층, 즉 언더스토리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은 늘 빛이 부족하다. 내게 있어 문학은 적은 빛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을 환대하는 집이다.
그늘을 견디기 위해 이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영양을 마련한다. 그 생존 방식 핵심에 ‘연결’이 있다. 독립된 개체들처럼 보이는 식물들은 곰팡이를 매개로 소통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인간 사회도 식물들의 방식을 닮았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동체를 만든다. 그 절실하고 애틋한 심층의 연결에
서 이야기가 탄생하고,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향과 영양을 준다. 문학은 언더스토리(understory)다.
―서문에서
말은 남는다. 정확히 말하면 무거운 말은 남는다. 한마디 말이란 짧은 말을 의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마디 말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수치스럽기도 하고 인생의 회로가 바뀌기도 한다. 말 못할 그리움을 품은 채 평생을 견뎌 내는 힘이 한마디 말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배삼식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전후 맥락도 사정도 필요하지 않은, 그저 그 자체로 앞선 이야기와 뒤따를 이야기를 압도하는 한마디 말의 순간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한마디 말의 힘이란 상황을 규정하는 힘이 아니라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힘이고 상황을 증명하는 형식이 아니라 상황을 느끼게 하는 형식이다. 배삼식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어김없이 경험하는 것은 개념을 잊어버리게, 혹은 잃어버리게 만드는 순간들이었다. 순간은 도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착을 의미 없게 만드는 것이 순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말을 향해 진행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말을 잃어버리기 위해 순간만 남겨 두는 이야기. 배삼식의 극은 남았기에 무겁고 사라졌기에 가벼운 측정할 길 없는 한마디 말을 위해 대화라는 모험을 시작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좋은 소설의 기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설은 모두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문학의 세계에서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작가와 독자 사이에 공인된 길이 없다는 말이다. 작가는 독자의 경로를 통제할 수 없고 독자는 작가의 목적을 예측할 수 없다. 작가가 없는 곳에 독자는 도착하고 독자가 없는 곳으로 작가가 출발했을 가능성. 요컨대 오독의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말이다. 『유령』을 읽으며 나는 직감했다. 이 소설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진실에 닿기 위해 오독의 길이 필요하다면 그마저 안겠다는 의지. 그것은 용기다. 작가의 용기가 좋은 소설의 기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설은 모두 작가의 용기에 빚지고 있다. 악인의 인생사를 들려주는 이 소설은 오독의 길을 열어 놓고 있다. 그 길목을 막아서는 것이 내가 할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라고 손짓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작가의 용기가 작품을 읽은 타인의 용기를 통해 완성된다면, 철지난 사명감마저 느끼며 손짓에 열중을 기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일 뿐만 아니라 완성된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