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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7477454
· 쪽수 : 172쪽
· 출판일 : 2026-05-29
책 소개
먹지 말자, 먹지 말자.
사람을, 사람은.
손가락을 두드리면 입을 더 벌리자는 뜻,
손끝을 잡아당기면 눈앞의 것을 삼키자는 뜻
목구멍 아래로 내려보낸 뒤에도 끝끝내 튀어나와
다시 자라나고 마는 어느 ‘보글’들의 질기고도 애틋한 기록
쓸쓸하고도 따뜻한 여운을 남기는 독창적인 상상력과 애틋하고도 재치 있는 인물들로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해 온 소설가 전예진의 신작 장편소설 『보글』이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보글』은 함께라면 무엇이든 ‘먹어 치울’ 수 있는 한 자매의 이야기다. 자매는 마음이 동하면 어김없이 입을 벌려 눈앞의 대상을 삼켜 버리는데, 그 후에는 꼭 몸 어딘가에 ‘보글’이 돋아난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간단해 보이던 세상이 커 가며 실은 하나의 거대하게 엉킨 실타래였다는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혹은 간단하고 확실한 경고를 전하기 위해 행하던 자매의 ‘삼키기’도 그들이 성장할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뒤탈을 남긴다. 상자에 넣어 숨겨두거나 믹서기에 갈아 없애 버리던 ‘보글’ 역시 이럴 줄 몰랐냐는 듯 자매의 삶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둘이라면 모든 게 괜찮았던 자매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자매를 덮치는 시간의 습격을 함께 겪어 나가다 보면 우리 역시 각자의 엉킨 실타래와 마주할 용기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영 성가신데, 먹어서 없애 버릴까?
자매에게는 함께일 때만 발휘 가능한 능력이 있다. 눈앞에 곯려 주고 싶거나 미워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먹어서 없애 버리는 기술이다. 서로 뺨을 맞대고 동시에 입을 벌리면 ‘언니’와 ‘나’의 입은 하나가 되고, 그 입으로는 무엇이든 삼킬 수 있다. 처음에는 현수막, 단풍, 죽은 무당벌레이던 대상은 점점 몸피를 불려 가고, 삼키는 행위 역시 단순한 놀이에서 응징과 복수로 그 의미가 변해 간다. 나뭇가지로 종아리를 긁은 강아지는 ‘나쁜 강아지’이니 꼬리를 삼켜 혼내 주고, 자매를 두고 좋지 않은 소문을 낸 친구는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불러 세운 뒤 검지를 삼켜 앙갚음한다. 눈에 거슬리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상을 입에 넣기만 하면 손쉽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니. 과연 발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은 능력이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어 배변 활동을 하듯이, 자매가 삼킨 것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언니’의 경우에는 신체 곳곳에서 작은 씨앗이 튀어나오고, ‘나’의 경우에는 여드름처럼 붉게 돋은 돌기 안에서 귀, 코, 입 등 신체 일부가 튀어나오는 식이다. 자매는 이렇게 돋아나는 잔여물을 ‘보글’이라 부르며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추고 없앤다.
■다시는, 먹지 말자, 사람은.
어떤 대상이든 먹어 없앨 수 있는 능력은 곧 자매가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가 된다. 처음에는 속력을 조절할 수 있지만 가속도가 붙은 이후로는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긴긴 미끄럼틀을 탄 듯, 자매의 ‘삼키기’는 아슬아슬하게 지속된다. 그러다 결국 자매는 이런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다시는, 다시는. 먹지 말자, 먹지 말자. 사람을,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삼키기’를 저지르고 만 둘 사이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쌓인다. 둘만의 비밀이 생긴다는 것은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한 거짓말을 쉴 새 없이 내뱉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자매는 ‘그날’ 이후, 수시로 맥도날드에 마주 앉아 그간의 시간을 거듭 점검한다. 무심코 엄마 얘기나 할머니 얘기를 하지는 않았는지, 지어낸 사연을 수상하게 생각하는 쉼터 아이들은 없었는지, 새로 사귄 친구에게 안심하고 진실을 터놓지는 않았는지. 삶을 온통 거짓말로 새로 칠하기 시작한 자매에게는 당위가 필요하기 마련이고, 자매는 “우린 우리만 생각하면 돼.”라는 말을 수없이 되새긴다. 그러나 다짐과 당부로 쌓은 비밀의 성은 작은 바람에도 벽이 통째로 흔들릴 만큼 약하고 위태롭다.
■‘보글’ 마주 보기
삼켜 없앤 것이 형태를 바꾸어 ‘보글’이 되듯, 자매가 지우고자 거짓말로 덧칠했던 숱한 순간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그저 신기해서, 때로는 가진 능력을 무기처럼 휘두르고 싶어서 삼켜 왔던 수많은 것들은 시간 속에 섞여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끔찍한 덩어리가 된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고개를 내미는 흔적들을 그저 없애는 일로만 대처해 오던 자매는 이제 더 이상 전과 같은 방법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으리라는 체념 속에 놓인다. 그러자 어린 시절 엄마가 불러 주던 자장가의 노랫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우리 아가 살며시 눈 감고 자자, 어서 자라 먹고 뱉고 얘기를 하자, 손발 머리 눈 코 입 모두 다 나면, 성큼성큼 걸어서 멀리 떠나자…….” 둘만의 성을 허물고 세상을 비로소 마주 보게 된 자매의 시선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눈을 달아 준다. 삶을 똑바로 대면한다는 것, 그리하여 나 자신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 보게 만드는 눈을.
목차
보글 7
작가의 말 162
추천의 글_정용준(소설가) 164
추천의 글_선우은실(문학평론가) 166
저자소개
책속에서
우리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손가락을 잡고 뺨을 붙이면 언제고 우리는 달라졌다. 우리끼리만 아는 신호가 있었다. 손가락을 두드리면 입을 더 벌리자는 뜻이고 손끝을 잡아당기면 삼키자는 뜻이었다. 뱀이 먹이를 먹듯 우리는 입을 한껏 벌리고 조금씩 먹이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목구멍이 가득 차면 구멍을 좁혀 목에 걸린 덩어리를 내려보냈다. 목에 닿는 감각이 일순간 사라지고 약간의 온기와 비린 향이 남았다. 혀로 입천장과 잇몸을 더듬는 사이 입 밖에 흘러내린 침이 마르고 시큼한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따로 떨어져 나온 우리는 입가를 문지르다가 이내 옷자락을 당겨 서로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손톱 아래, 등골, 발목 위, 궁둥이와 허벅다리가 닿는 부분을 비롯해 별별 곳에 동그랗게 솟아나는 부스럼을 우리는 보글이라고 불렀다. 보글이 커지는 동안에는 가려웠다. 만지거나 꼬집으면 통증도 느껴졌다. 다 자란 뒤에는 열감만 있다가 갑작스럽게 터졌다. 터지고 나면 하루 만에 상처가 아물고 흉터도 남지 않았다. 우리는 그 행위를 뱉는다고 표현했다. 오늘 육교에 서서 과자를 먹다가 보글이 터졌어. 내가 뭘 뱉었게.
언니는 매번 새끼손톱 반만 한 씨앗을 뱉었다. 씨앗은 귓불에서, 손가락 끝에서 후드득 터져 나왔다. 언니는 씨앗을 버리지 않고 습기가 없는 곳에 모아 두었다.
글쎄, 그때는 나도 네 엄마도 너무 어려서 뭘 몰랐어. 아이를 원한 적도 없지만 어떻게든 키워 보자 했지. 근데 네 엄마는…… 그 작은 애가 내 마음을 다 읽는 것 같았거든. 지금이라면 다르겠지만 그땐…….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자기 손으로 짐을 싸서 떠나는 애를 어떻게 말리겠니. 어쩌면 그렇게 해야 둘 다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엄마는 자기를 낳아 준 사람이 없다고 했어요. 세상에 그냥 나왔다고 했어요.
할머니가 내 차를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지.
우리는 해가 뜰 때까지 무대처럼 동그란 빛이 내린 식탁을 바라봤고 그날은 할머니와 나의 또 다른 비밀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