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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7834424
· 쪽수 : 366쪽
· 출판일 : 2013-12-12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살아 있음으로
제1부
밥에게
양치기
바람 부는 쪽으로
그림자
마음속에 묻어 둔
제2부
세상이라는 이름의 감옥
갈라파고스
중력 같은 것
미늘
제3부
태양 아래
Maus
추가 보고
작가 후기 '13'월을 지나가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어디론가 이동할 때에도 주변을 돌아보는 일 없이 재빨리 걸었다. 그런 그가 오늘만은 소처럼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붙었다. 신장 180cm 정도, 몸은 날렵하다. 책을 볼 때가 아니면 시선은 늘 정면을 향해 있으며 눈빛은 다감했다. 곧게 흐르는 턱 선은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다부진 어깨를 가졌으며 군살이라곤 없는 몸이었다. 누구에게나 예의 발랐고 미소 짓는 모습은 세상 시름을 잊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었다. 외양상 어느 하나 부족함이라고는 없는 그가 수인의 관찰 대상, 밥이다.
“괜찮은 년 데려 오면 기간은 더 짧아질 수도 있어.”
광모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자신과 관계없는 여자 몇쯤 망가져도 상관없다, 아니 애초에 몸 좀 팔았다고 인생이 망가졌다고 할 수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재황이 품어 왔던 기대, 혹은 신념은 분에 넘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어진 생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광모 쪽일지도. 홀로 거칠게 살아야 했던 지난 시간을 거치며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재황은 본능을 제어하고 지성과 이성을 갈고 닦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흔들리는 건 대학 생활 몇 년으로는 본능에 충실해야만 했던 20년 가까운 삶의 흔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어떤 연유로 그게 필요해지는 순간 제자리에 놓여 있는 가구처럼. 수인은 제멋대로 바람도 피고 제멋대로 스스로 명을 끊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할 남자, 잠들기 전 시린 등을 안아 줄 남자, 식당에서 홀로 밥 먹을 때 마주 앉아 같이 먹어줄 남자, 영화 볼 때 혼자라는 사실이 쑥스럽지 않게 곁에 앉아 있어줄 그런 남자를 필요로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수인은 그나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가구가 사라져버리면 닥쳐올 쓸쓸함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영을 꽉 붙잡지도 그렇다고 느슨하게 풀어주지도 못한 채 관계를 질질 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오피스텔로 들어서며 인식기를 확인했다. 그는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여전히 자취방에 박혀있었다. 수인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인식기를 간이 선반 위에 올려놓고 물 속에 몸을 담갔다. 불빛은 심장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거렸다. 수인은 밥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했다. 이재황, 수인과 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