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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9222168
· 쪽수 : 136쪽
· 출판일 : 2014-02-20
책 소개
목차
제1부 은신처|감자 바구니|봄날 저녁의 수채(水彩)|손의 의미|강변의 돌을 만지며|애수|카프카의 잠|흑백 수련|흑백 사람|맨발|업어준다는 것|희귀한 곤충|영혼이 진흙처럼 뻐근해지고|쿠키의 세계|돌의 북극성
제2부 돌의 주파수|귤나무 화분|오늘의 기록|물속에서 건져 올린 꽃병|빈 병이 있는 꽃밭에서|작은 꽃병|던졌던 순간|창밖의 나비|꽃병의 연대기|구름 속에 메밀꽃 심는 법|파인애플|좋은 구름|매직 트리
제3부 귀|배꼽의 위치|시곗바늘|목|시계수리공의 장례식|축제|육교에서|손금과 손등|생애전환기|신인류의 식사|빈 의자|냄비 속의 장례|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몸의 유채화|얼룩|농아를 위한 탄주|꽃게
제4부 평일의 극장|잠의 파랑이 돌아오면|반달 가슴|대궁밥|버찌|비 맞으며 일하러 가는 사람|먼지버섯|울음 주파수|새장 속의 맨발|밀양 고동국|미인도|달과 심장
해설 최라영|시인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 편집자가 꼽은 박서영의 시
좋은 구름
좋은 구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떠난다고 했다. 빈 들에 나가 여자를 불렀다. 사랑스러운 여자는 화장하고 옷 차려입느라 늦게 나갔다. 사진작가는 버럭버럭 화를 냈다. 좋은 구름이 떠나버려서, 좋은 구름이 빈 들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여자는 오래 빈 들에 서서 보았다. 사자와 치타. 새와 꽃. 눈물과 얼룩. 구름 속에서 자꾸 구름 아닌 것들이 쏟아졌다. 남자는 화가 나서 떠나갔다. 한 프레임 속에 좋은 구름과 빈 들과 여자를 넣지 못해서.
좋은 노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뛰쳐나간다고 했다. 다리 위에 서서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또 노을이 떠나버릴까 봐 화장도 하지 않고 서둘렀다.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 노을 앞에 서자 사진작가는 또다시 화를 내며 떠나갔다. 좋은 노을이 떠나버려서, 좋은 노을이 강물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땀에 흠뻑 젖은 여자는 다리 위에 서서 보았다. 사과밭 위로 기러기가 날아갔다.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붉은 구름이 흩어지고 기러기가 울었다. 노을 속에서 자꾸 노을 아닌 것들이 쏟아졌다. 이별의 순간에도 저런 멋진 장면이 연출되다니. 집에서는 혼자 두고 온 아이가 울고 있을 텐데.
여자는 바뀐 장면들을 떠올렸다. 언제나 뛰어오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구름과 노을 사이의 핏자국. 후드득 새의 깃털들. 여자는 총성이 자욱한 빈 들판에 서 있었다. 여기저기 기러기들이 떨어지는 소리 들렸다. 빛이 쉬지 않고 풍경을 찍어댔다. 하늘의 뱃가죽에서 구름이 퍽퍽 떨어졌다. 구름과 노을과 여자의 심장이 한 프레임 속에 찍혔다. 천국의 아편 같은 구름이 빈 들에 내려왔다. 남자가 떠나자 비로소 좋은 구름이 여자의 혀 밑을 파고들었다. 키스는 얼굴의 불안을 심장으로 옮긴다. 이렇게 멋진 배신의 순간, 집에 두고 온 아이가 생각나다니!
맨발
울음의 엔진은 발끝에 있다
채송화 꽃 앞에 쭈그리고 앉은 여자도
해바라기를 올려다보는 여자도
발끝에 온 힘을 집중한 채 울고 있다
발가락들은 찢어진 꽃잎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심장에 뿌리 내린 채
꽃의 갈기를 흔들어댄다
열 개의 음표를 말없이 주무르다 보면
음악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데
눈물은 내려 채송화를 적시고
때론 솟구쳐 해바라기를 적신다
심장이 어디까지 멀리 갈 수 있을지
돌아온 심장은 처음의 그것이 아니다
발가락이 운다
달과 태양까지
별의 구멍까지 쏘다닌 마음을 달래듯
울음의 시동을 부릉부릉 걸고 있다
맨발로 돌아와 잠든 뿌리여
안아주려고 했더니
오므렸다가 터졌다가 피었다가 졌다가
도무지 가만있질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
밤에 자라난 것들
씩씩하게 혼자 울기 시작한다
업어준다는 것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희귀한 곤충
산길 걸어가다가 희귀한 곤충을 만났다
그 곤충에 맨발을 집어넣었다
곤충이 죽은 나무 위를 타고 오를 때
이끼들은 잠시 길을 터주었고
어릴 땐 애벌레 속에 맨발을 넣고 다녔는데
애벌레의 부드러움이 나를 키워주었는데
이젠 태풍에 쓰러진 나무나, 뿌리 잃은 나무를 타고 오른다
이상한 나무가 내 몸을 끌어당긴다
검은 세계가 내 집인 것 같아서, 좌절의 구멍을 힐끗거리는 게
내 심장의 마지막 직업인 것 같아서
그렇게 구두는 점점 희귀한 곤충이 되어간다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신고 외출하는 저녁이 늘어난다
숨겨놓은 맨발의 뿔들을 꼼지락거리며
흔한 풍경 속에서 사랑하기 위하여 보호색을 가졌다
희귀한 곤충은 눈에 띄기 쉬운 법
그러나 갑각류의 눈부신 광채는 드러나지 않는다
당신이 가질 수 없는 심장, 나만의 시간이 있다
갑각을 두른 곤충을 보면 구두 저 혼자 어디론가 가는 것 같다
이 저녁 출몰하는 곤충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고독과 패배로 서로에게 뿔을 들이대며 싸우다가
갑자기 두 팔을 붕붕거리더니 날아가버린다
구두 한 켤레 남겨놓고,
생애전환기
의료보험공단에서
생애전환기의 건강검진 통보를 보내왔다
환승역에 닿아서 겨우 종이 한 장 받은 기분이다
겨우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어디로 갈아타야 할지 모르는데
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잔뜩 긴장해서
통보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무서운 병명들이 빼꼭히 적혀 있다
위꽃, 유방꽃, 자궁경부꽃, 당뇨꽃, 빈혈꽃, 폐결핵꽃, 정신질환꽃,
끝에 꽃을 붙이니
더 무서운 생각이 들어 정신이 번쩍 든다
꽃의 짧은 생애
붉고 아름다운 꽃의 투구와 방패를 뒤집어쓰고
생애전환기를 건너야 한다
건너는 것도 오르는 것도 갈아타는 것도
어쨌든 한 생애를 굴러다니는 일
무 자르듯 딱 생애전환기라니!
병의 기원이 적힌 흰 종이 속의 꽃밭
어떤 절벽에서 어떤 절벽으로 뛰어내리라는 건지
허공에서 바닥인지, 바닥에서 허공인지
그 경계를 지우느라
마음이 당신에게 달려가는 줄도 모르고,
일분일초가 내겐 생애전환기라는 것을
저 꽃이 다 아는데
저 새가 다 아는데
저 바람이 다 아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