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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한국정치사정/정치사 > 한국정치사정/정치사-일반
· ISBN : 9788942391356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24-12-23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면서 12
1. 어린 시절 나라는 망하고 20
전남 고흥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20
11세에 일본 유학, 민족차별 겪고 귀국 23
2. 학업과 성장기 27
3.1혁명 참여, 일경에 소금·고춧가루 뿌려 27
와세다대학진학, 3.1절행사장에 태극기게양했다가 30
미국 웨슬리안대학과 콜롬비아대학원 수학 32
3.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37
송명학교 이어 유랑극단 좌절, 조선어학회참여 37
조선어학회사건 7개월간 옥고 40
4. 해방을 맞아 45
해방, 벌교건준위원장 엉뚱한 봉변도 45
초대광주시장·전남지사, 조선대 설립 앞장 48
정실인사 충고했더니 ‘네가 나를 충고해?’ 51
5. 2대 국회의원 의정 활동 54
제2대국회의원, 곧 일어난 6.25전쟁 54
6. 서대위 살해 사건 59
살인이냐 정당방위냐 59
국회석방결의, 계엄령선포로 재수감 62
거창민간인학살사건 폭로 암살위기 겪기도 64
이승만의 독주에 맞서다 67
생명위협 느끼며 4통의 유언을 쓰다 71
손자 이름 치이(治李)·치승(治承)·치만(治晩) 짓도록 76
7. 8월혁명의 시기 79
이승만 파멸의 무덤 3.15부정선거와 4월혁명 79
8. 다시 의정단상에 서다 84
제5대 국회의원 전국제1위 득표, 부의장 84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으로 참석 87
퇴행적 보수에 실망 혁신에 기대했으나 90
9. 5.16쿠데타 시기 96
군사쿠데타, 새로운 고난과 투쟁 96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 격렬반대 98
‘박정희대통령 하야권고결의안’ 제출 102
굴욕회담반대 의원직던져 106
10. 혁신 정치에 나서다 110
혁신 정책 꺾이지만 비전은 남아 110
‘민주사회주의’ 제창하다 115
대중당을 발기하는 우리의 뜻 118
11. 혁신 정당 대중당 창당 122
대중당 창당을 주도 122
12. 혁신계의 지도자 130
혐의 풀리자 ‘조총련계 자금’ 엮어 130
대중당 대선후보에 지명되고 132
정권 교체 위해 후보사퇴 용단 135
13. 거듭된 시련 속에 재기 139
7대 국회의원 옥중당선 139
단독등원, 독불장군 등 비아냥 따라 142
14. 3선개헌 반대 앞장 146
박정희의 권력 야욕 3선개헌 반대 투쟁 146
개헌안 국민투표 신랄히 비판 150
15. 이념·원칙형 정치인의 길 154
단식농성으로 졸도, 철저한 습벽 154
<요구되는 지도자의 자세> 시론 156
박정희·유진오·서민호의 69년 연두 회견 비교 158
16. 두 권의 저서 162
저서 ‘이래서 되겠는가’ 162
‘나의 옥중기’ 집필 164
17. 최후의 결전 맞았으나 169
정권 교체 대의 위해 후보 사퇴 169
혼신 다해 DJ 지원했으나 173
18. 정계 은퇴, 통일문제 연구 177
총선 낙선 정계 은퇴 통일문제연구협회창설 177
민족주의 바탕한 통일되도록 180
유신쿠데타에도 강연·세미나·회보발행 182
마무리 글: 타계와 추도 185
71세에 타계, 민주화·통일 못보고 185
통일로변에 안장, 애족장추서 188
부록: 《나의 옥중기》(부분) 193
1장. 폭풍 전야 195
2장. 운명의 사건 259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의 유년시절 성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신 분은 부친이었다. 6살 나던 해에 말 타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강인하고 준엄하시면서도 온화한 애정으로 나를 키우려고 노력하셨던 것이다. 일찍 개화하셔서 자유로운 속에서 엄격하고 의협심이 강한 부친의 성격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와 같은 아버님의 성격에 영향을 받아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후련하리만큼 억세고 활달한 개구쟁이였다.
널푸른 바닷가 개펄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전쟁놀이로 해지는 줄 몰랐으며, 파도를 타고 물장구로 여름 가는 줄을 모르는, 검붉은 피부의 건강하고 의협심이 강한 아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철부지의 맑고 탄력 있는 동심의 세계에도 언제인지 모르게 어버이의 근심스러운 표정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곤 했었다.
1921년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4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명문이라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10여 년 전 11세 때에 보았던 일본을 이제 청년의 시각으로 지켜보고 공부하게 되었다. 대학이나 사회를 따지지 않고 일본인들의 한국인 차별과 멸시는 달라지지 않았다.
우선 일인들과 경쟁해서 이기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신념이어서 한국유학생 야구팀에 들어갔다. 유년시절부터 익혀온 각종 스포츠여서 낯설지 않았다. 야구도 야구지만, 이를 통해 한인 유학생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자 해서였다.
서민호는 반도흥업사를 운영하면서부터 은밀히 조선어학회에 기금을 댔다. 한글학자가 아니어서 연구 분야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운영위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동안 연희전문에 1500원, 보성전문에 500원의 장학금을 내고, 1939년 5월 신윤국·김양수·박창서 등과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설하면서 자본을 대고, 1940년 낙성간이학교 설립에는 기성회장을 맡아 출자했다.
그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된 것은 1943년 3월 6일이다. 이중화·장지영·이극로·최현배·한징·이윤재·이희승·정인승·김윤경·권승욱·이석린 등은 한 해 전인 1942년 10월 1일 검거되고 서민호와 김도연은 뒤늦게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