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47549578
· 쪽수 : 540쪽
· 출판일 : 2024-06-20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여기 오기 전까지는 새로 산 《초심자를 위한 와인》이라는 책 한 권과 친애하는 구글 님을 스승 삼아 저녁에 벼락치기로 공부할 계획이었다(계획이라 부르기 민망하지만). 그렇게 얻은 얕은 지식으로 적당히 속여 넘길 작정이었다. 외딴곳에 박힌 허름한 호텔이니 그 정도면 요령껏 여름을 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곳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더러운 거지 소굴이 아니라 고급 식당을 갖춘 호화로운 소규모 호텔이었다. 스무 쪽에 달하는 새 와인 리스트를 해독하려면 세계 정상급 소믈리에가 필요했고, 물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와인은 어떤 걸 추천하시나요?”
토머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당황해서 메뉴판을 내려다보니 점심 스페셜 와인은 열두 개쯤 됐다. 이 정도면 찍어볼 만하지 않을까? 아니면…….
“아, 샴페인 아니면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둘 다 주문하시면 어떨까요?”
베티의 비웃음 소리가 귀에 꽂혔다.
가능한 선택지를 모두 따져 봤다.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리면 헤더가 무책임하게 도망친 꼴이 될 터였다. (사실 애초에 이 일을 하기로 해놓고 내뺀 건 헤더지만……, 어쨌든 지금 여기 와 있는 사람은 ‘헤더’이니 이 방법은 쓸 수 없었다.) 다 털어놓고 떠나도 헤더의 명성에 흠집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떠날 거라면 확실한 핑계를 대고 헤더의 신분으로 떠나야 했다. 갑자기 가족이 죽었다는 핑계가 좋았지만 죽을 사람이 없었다. 헤더에게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다른 핑계가 필요했다. 헤더의 평판에 해를 끼치지 않을 핑계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