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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중세사(위진남북조~당,송)
· ISBN : 9788950955885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14-08-25
책 소개
목차
추천사: 역사의 삭은 과일에서 희망의 술을 뜨자
1. 수.당 제국 : 중국의 재통일과 세계 제국의 위용
수 왕조, 중국을 다시 통일하다 / 수의 멸망과 당의 건국 / 당 태종과 ‘정관의 치’ / 고종과 무측천의 시대 /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 개원의 치와 양귀비 / 안사의 난과 당의 쇠퇴 / 황소의 난과 당의 멸망
2. 송 나라 : 전통 중국에서 최고의 물질 문명을 이루다
송 태조 조광윤의 무혈 창업 / 황제권 강화와 중앙집권화 / 중앙집권이 낳은 관료주의의 병폐 / 전연의 맹약과 왕안석의 신법 / 정강의 수치와 남송 건립 / 악비와 진회, 충신과 간신의 한 전형 / 남송의 멸망 그리고 사상과 경제 발전
3. 돌궐 제국, 거란, 여진 : 동아시아 북방민족들의 흥기와 쇠퇴
투르크계로 넘어간 초원의 패권 / 돌궐의 분열과 당의 이민족 정책 / 돌궐의 부흥과 멸망 / 중국의 역사 인식과 동북아시아 역사 / 만주 유목민족의 변천과 거란의 흥기 / 여진족 금 나라의 흥기와 쇠망
4. 칭기즈칸 : 몽골 초원을 제패하고 세계 제국의 문을 열다
칭기즈칸의 이미지를 만든 창작물들 / 칭기즈칸 이전 유목 사회의 정세 / ‘초원의 늑대’ 테무친, 몽골 초원을 제패하다 / 내부를 다지고 밖으로 눈을 돌리다 / 칭키즈칸의 약탈과 응징을 위한 전쟁 / 조직의 천재 칭기즈칸과 몽골 군대의 위력 / 몽골 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5. 몽골 제국과 원 : 칭기즈칸의 후계자와 그들의 제국
칭기즈칸의 후계자와 후예들 / 후계 분쟁과 쿠빌라이 대칸 등극 / 몽골 세계 제국의 느슨한 연합체제 / 칭기즈칸은 원 왕조의 태조인가? / 원의 패퇴와 몽골 제국의 붕괴 / 몽골족의 원이 중국에 남긴 것 / ‘몽골의 평화’가 의미하는 것
6. 칸의 후예국들 :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세운 여러 칸국의 운명
원의 멸망과 몽골 제국의 운명 / 차가타이 칸국의 부침과 성쇠 / 오고타이 칸국과 일 칸국의 운명 / 몽골군의 서방정벌과 킵차크 칸국
7. 티무르 제국 :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한 초원의 강자가 세운 제국
한 시대의 영웅 티무르의 등장 /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하다 / 마지막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떠나다 / 풍부한 일화를 남긴 풍운아 티무르 / 행정체계가 취약했던 제국의 운명
8. 중세 일본 : 귀족의 지배에서 무사가 지배하는 시대로
고대 일본의 천황 국가 확립 / 헤이안 시대의 섭관정치와 국풍화 / 일본의 상징 사무라이 / 무사와 장원공령제 / 섭관정치의 몰락과 원정의 등장 / 가마쿠라 막부 정권의 등장 / 무로마치 막부와 전국 시대
9.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 만주와 한반도 여러 국가의 발흥과 쇠퇴
삼국 시대인가 오국 시대인가 /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발전한 고구려 / 백제의 성립과 발전 / 신라의 늦은 출발과 발전 /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 / 신라 · 당 연합과 백제, 고구려 멸망 / 토번과 당의 관계가 미친 영향 / 발해의 건국과 성쇠
10. 고려 : 세계에 코리아의 존재를 알린 다원적인 통합 국가
국제적이며 다원적인 통합 왕조 / 왕건의 통합 정책과 훈요십조 / 고려 초기의 통치체제 정비 / 문벌귀족 사회와 이자겸.묘청의 난 / 무신의 난과 최 씨 일가의 장기집권 / 대몽골 항쟁과 그 결과 / 몽골과 권문세가들의 횡포 / 공민 왕의 개혁 정책과 고려의 종언
주석
저자소개
책속에서
수 문제는 뛰어난 통치자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자치통감』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문제점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을 의심하여 까다롭게 감시하고, 참소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공신과 옛 친구들의 생명을 끝까지 보전하게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는 모두 원수처럼 지냈다.” 그는 창업 공신들을 모두 숙청했으며, 북주의 황족들도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 문제의 잔인성은 그의 뒤를 이은 양제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었다. 그는 또한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능했으나 가정은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런 일들은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다. 뛰어난 인간들도 가정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세상의 일이며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날 항저우의 서호 남쪽 기슭에는 악비의 사당이 있고, 여기에 악비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그 묘소 입구에는 진회 부부의 철제 조각상이 있는데, 그들은 옷이 벗겨진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악비의 사당과 묘소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며 그들을 향해 침을 뱉기도 한다. 그래서 “교양 있는 관람을 위해 가래침을 뱉지 맙시다.”라는 팻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은 악비는 국가를 구한 영웅이고, 진회는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주창하는 중국의 입장에서 이 같은 구도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칭기즈칸을 역사상 보기 드문 ‘정복자’라고 여긴다. 당시에도 이러한 인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원사元史』 태조본기」는 “그의 용병술은 마치 신과 같았기 때문에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40개에 이른다.”고 적었으며, 이슬람권의 역사가는 그를 가리켜 ‘세계 정복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할 때 그는 농경지대를 정복하고 통치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유목 세계의 군주였을 뿐이다. 칭기즈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 감행한 원정들은 대부분 물자의 약탈과 응징 · 보복을 명분으로 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