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간증/영적성장
· ISBN : 9788953115941
· 쪽수 : 308쪽
· 출판일 : 2011-06-07
책 소개
목차
1부. ‘왜’냐고 묻고 싶은 순간들
1.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2. 죄로 병든 우리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
3. 우리를 친구로 부르시는 분
4.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 지체하신다
2부.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 우리가 할 일
5. 예수의 능력에 의지하여 견고한 진을 깨라
6. 관계를 가로막는 돌을 치우라
7. 나를 향한 사랑의 음성 경청하기
8. 받은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이 복이다
9.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는 즐거움
3부. 늦지 않으시는 하나님
10.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오늘의 삶 사랑하기
맺는말
부록 1 성경 공부 가이드
부록 2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부록 3 내 삶에 있는 견고한 진
부록 4 수의를 푸는 법
리뷰
책속에서
예수께서 현장에 오시면 그때까지 끝으로 보였던 게 늘 새로운 시작이 된다. 하지만 마리아와 마르다는 당시 그걸 잘 몰랐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자주 잊는 경향이 있다. 의문과 실망, 슬픔과 두려움이 베다니에서와 같은 상황에서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나타나시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마음속으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갑자기 누군가가 잡아채 갔을 때 심정이 어떤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실망을 하나님의 사랑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런 의문들에는 쉬이 답변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 친구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비극과 미지의 일들을 항해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실마리는 주로 막간에, 즉 하나님이 행동에 나서 주시기를 기다리는 그 가혹한 시간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하고 계시는 듯 보일 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도와주는 통찰력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사로 이야기는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즉 우리가 손을 내밀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라도 우리 것이 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드러내 보여 준다는 것이다. 설령 우리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없을 때에도 말이다. 삶이 너무 힘들고 우리가 왜 그런 역경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에도 말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서 일깨워 준다. 답답함을 느끼긴 해도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는 않을 것이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매도 맞아 보고 돌팔매질도 당했고 파선도 세 번이나 겪었던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절)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창조적 역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바울은 우리를 망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되는 바로 그 상황과 사건들, 수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 상황과 사건들이 사실은 우리 삶에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다시피 이런 시련들이 닥치는 것은 우리 믿음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눈앞의 현실에 얽매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는 일을 놓치지 말라. 하나님의 박자에 귀를 기울이며 내 삶의 통제권을 하나님의 자애롭고 주권적인 인도하심에 내어드리면 단 한 순간도 결코 허비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기다림도, 우리의 의문도, 우리의 고통까지도 결코 헛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믿으면 된다.
우리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 달려갈 수 있다.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아도 되고 할 말을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된다. 담대하게, 아니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절박하게 우리의 두려움과 실망을 그분 앞에 쏟아 놓을 수 있다. “와서 보옵소서, 주님”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보실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옥은 두려워 떤다. 사탄과 마귀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아직 완전히 다 깨닫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승부는 이미 결정났다. 돌은 굴러갔고, 무덤은 비어 있다. 그리스도의 무덤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덤까지 말이다. 왜냐하면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6:14 참조).
하지만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이 있다. 어디에서 살지 결정해야 한다. 묘지라는 익숙한 곳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좀 겁나긴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속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부활의 역사는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