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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4450362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4-04-15
책 소개
목차
엘자의 하인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영악한 쥐들과 매정한 종선이, 얄궂게 비아냥거리는 광섭이 아저씨를 마음속으로 저주했다. 하늘에서 불침 같은 번개가 쏟아져 그들의 꽁무니에 연방 꽂히거나 수천 개의 차돌 같은 우박이 후둑후둑 머리 위로 떨어져 나를 희롱하고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어머나, 눈이 오네.”
바로 그때, 내 저주에 하늘이 화답했다. 비록 불침 같은 번개나 차돌 같은 우박은 아니었지만 분명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의심할 여지없는 눈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꽃잎처럼 난분분 흩날렸다. 가장 먼저 눈 소식을 알린 옥선 이모가 손바닥을 펼쳐 눈을 받으며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별일도 다 있구먼. 아직 음력으로 추시월인데.”
“가자, 하인.”
엘자도 그 뒤를 따랐다. 잠깐, 하인이라고? 그건 내 이름이었다. 하지만 엘자는 내 쪽은 돌아보는 척도 않고 컴온의 목줄을 끌어당겼다. 나를 부른 게 아니란 뜻이었다.
“너, 그 개 어디서 났어?”
할 땐 몰랐는데 생각할수록 우스꽝스러운 말이었다. 개가 어디서 나다니. 염라대왕이라도 찾아가 죽은 컴온에게 목줄을 채워 돌아왔을 리도 없을 텐데. 멍청한 말을 꺼낸 내 입을 원망하던 그때, 엘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파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해부용 개구리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지하에서.”
나는 귀를 의심했다. 차라리 귓밥이 가득 차서 ‘기차에서’ 혹은 ‘지방에서’ 따위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빠의 무릎에 머리를 괴고 귓밥을 판 게 어제였고, 주전자 속에 든 생쥐들이 먹이를 조르느라 찍찍거리는 소리까지 선명했던 터라, 귀를 의심할 수 없었다. 컴온, 아니 이제는 하인이가 된 엘자의 개가 경주마처럼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주인을 따라나섰다.
엘자의 말이 맞다면 컴온의 무덤은 지금쯤 텅 비어 있을 거였다.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늦가을 쏟아지는 괴이한 눈바람을 뚫고 아름답고 이상한 모녀를 실은 돼지부동산 티코가 마당을 빠져나갔다.
엘자를 에워싸고 있던 아이들 중 낯이 익은 둘이 작지 않은 목소리로 떠들며 시시덕거렸다. 둘 중 키가 작고 눈가에 수두 자국이 눈물처럼 얽힌 아이는 엄마 오촌 당숙의 손자 순택이었다. 종선이의 질주를 따라잡던 엘자의 검은 안경알이 두 소년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곤 그린 듯 얌전하게 꼭 다물었던 입술을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자그맣게 달싹였다. 엘자의 목소리가 소년들처럼 크지 않은 탓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표정이나 입술의 움직임으로 보아 욕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정신이 올똘하던 시절, 할머니가 종종 외던 불경처럼 엘자의 입술은 쉬지 않고 나직한 말들을 조곤조곤 뱉어내더니 이내 굳게 닫혀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