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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4644822
· 쪽수 : 228쪽
· 출판일 : 2017-03-30
책 소개
목차
부산에서 _007
K의 어머니와 면회를 갔다 _033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 _063
연금생활자와 그의 아들 _091
난장이의 죽음에, 나는 잘못이 없다 _115
모든 것이 붕괴되기 이전에 _139
약의 역사 _165
호적戶籍을 읽다 _189
발문│윤경희(문학평론가) 엽렵한 동급생 같은 _213
작가의 말 _225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전등을 켜지 않은 거실 한쪽 의자에 앉아 일 년 가까이 보아온 수평선이 지워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래지 않아 시선이 닿는 곳이 밤하늘인지 밤바다인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속이 빈 허공이든 몸을 낮게 깔고 있는 바다든 금을 그어 가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바다는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허기진 어둠에 완전히 삼켜져버렸다. 나는 근시의 눈을 몇 번이고 깜박였다. 마루 위에 놓인 종이 상자가 그림자같이 딱딱한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문득, 내가 부산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다면, 그건 부산이 아니라 서울에 대한 이야기가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부산에서」)
1막이 끝날 때까지는 객석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무대 아래 무엇이 웅크리고 있든 지금은 무대 위의 유령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햄릿>을 재해석한 대본이라 햄릿의 비중이 원작에 비해 훨씬 작다 해도, 광대만을 연기했던 내가 왕자 옷을 입게 된 첫 공연이었다. 개막일에 관객이 절반밖에 차지 않은 무명 극단의 공연이라도 나는 햄릿이었다.(「연금생활자와 그의 아들」)
친한 후배, 라는 말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가 나보다 두 살 많으니 친구라는 호칭도 맞지 않고, 사귄다고 말하기도 곤란한 사이였다. 나는 그의 대학 후배도 과 후배도 아니었지만, 친한 후배라거나 아는 후배라는 말이 가장 부담스럽지 않게 들렸다. 우리는 오랫동안 각자의 가족에 대해, 읽고 있는 책에 대해, 그리고 어린 시절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서로의 손을 잡아본 적은 없었다.
섭은 약장에 기대어, 나는 웃풍이 센 벽에 등을 대고 귤을 먹었다. 나는 이것이 그와 나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거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또 한번 확인하는 느낌이 쓸쓸하면서도 편안했다. 나는 어느 누구의 손도 잡고 싶지 않았다.(「약의 역사」)